🖍30. "돌아갈 수 있다면 몇 살이 좋아?"
동년배 친구들과 젊음이 화제가 되면,
"서른여덟 살 정도가 좋아."
대체로 이즈음의 나이가 나온다. 20대가 보기엔 좀더 젊은 편이 좋지 않나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서른여덟 살은 얼핏 보면서른 남짓. 자세히 보면 서른 서넛. 충분히 젊다. 그리고 내가 강해졌구나, 하는 것을 그제야 느낄 수 있는 나이다.
좋은 사람으로 생각되고 싶다, 생각되어야 한다. 하는 마음에서해방되기 시작할 무렵이기도 했다.
젊은이는 자신이 원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이 높다. 이상의깃발을 계속 흔들다 이건 좀 무리네, 하고 일단 깃발을 내리는것이 30대 후반이다.
어떤 사람이든 언젠가는 서로 이해하게 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가 싫어지는 것은 내 속에서 소중히 여기는 그 무언가가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아하 그건 어쩔 수 없겠구나 하고 어깨의 힘도 빠진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그냥 사람‘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을까. 흑백 가리지 않고, 흐르는 강물 같은 관계를 맺는것도 괜찮지. 그렇게 생각하는 데 38년 정도는 걸린다.

🖍97. 볼탕스키 인터뷰 영상이 흐르는 방도 있었다. 그가 앞으로 제작하고 싶은 작품은 먼 파타고니아 땅에 거대한 트럼펫을 설치하여 바람이 불 때마다 고래의 노래를 연주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무도 볼 수는 없겠지요."
그는 냉정하게 얘기했다.
제작해도 아무도 볼 수 없는 작품.
그 작품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존재를 아는 데 의미가 있다.
지칠 대로 지친 하루의 끝에,
"오늘 밤도 극한의 파타고니아 땅에서 트럼펫이 고래의 노래를 불고 있겠구나."
상상해보는 것도 볼탕스키 작품이다. 가지 못해도 좋다, 보이지 않아도 좋다. 아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나는 그의 작품전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언제였던가, 소중한사람을 잃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해준 얘기를 떠올렸다.
그 사람은 혼자 공원을 걷고 있었다. 그때, 흰나비 한 마리가계속 뒤를 따라왔다고 한다. "이별 인사를 하러 와주었네." 생각했단다. 멋진 얘기구나, 가슴이 뜨거워졌다. 나까지 팔랑팔랑춤추는 봄나비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98. 이야기가 사람을 강하게 한다.
나는 볼탕스키 작품으로 인해, 혹은 미얀마 축제로 인해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만들어나갔다.
파타고니아에서 트럼펫이 고래의 노래를 부는 것. 미안마에서는 오늘도 "맛있네" 하고 서로 얘기하며 찻잎 샐러드를 먹는가족이 있는 것, 확인은 할 수 없지만, 알고 있는 것만으로 뭔가 기쁘다.
소중한 사람을 이 세상에서 잃었다고 해도 있었던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니 괜찮다. 그것이 흰나비를 대신하는나의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힌트는 바깥에, 사람 수만큼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108. 엄마는 "으응?" 하고 웃으면서도 가지튀김찜, 야채 튀김, 무말랭이조림 등 몇 가지 요리를 들었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이지만, 하나도 엄마처럼 만들지는 못한다.
언젠가 닥칠 엄마와의 이별은 엄마의 요리를 잃어버리는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살아 있을 동안 배워두고 싶은 마음이들지 않는다.
특히 오하기.
오하기를 좋아해서 본가에 가면 종종 엄마가 만들어준다. 팥을 어떻게 삶는지 냄비 속을 슬쩍 본 적은 있지만, 결국 먹는 것전문이다. 동생은 화과자를 먹지 않아서 오하기도 먹지 않는다.
당연히 배우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배우지 않으면 대가 끊길맛인데 귀찮다고 미루고 있다.
사카이 준코 씨가 『생활의 수첩 부록 - 생활의 수첩 인기 요리』에 기고한 아름다운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아무도 살지 않는 친정에 혼자 서성거리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카레가 있었다.
사카이 씨는 이렇게 썼다.

🖍109. 이 카레는 아마 엄마가 영원한 외출을 하기 전에 자식에게남긴 마지막 음식이지 않을까.‘
나도 언젠가 그런 요리와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134. "근력이 좀더 생기면요."
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다음 날, 나는 도쿄에 돌아가야 해서 그 전에 아버지에게 켄터키를 사 갈까. 생각했다. 별로 식욕이 없는 듯해서 한 입밖에먹지 못하겠지만, 그 한 입이 먹고 싶은 것이리라.
그러나 역 앞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까지는 버스를 타야 했다.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기다렸다가 이래저래 하면 다시 돌아올 때까지 한 시간 이상 걸린다. 생각하니 귀찮아서 결국 엄마가 깎아준 감을 들고 아버지에게 갔다. 감을다 먹고 아버지는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이 아버지가 내게는 살아 있는 마지막 아버지의 모습이 됐다.
병실을 나가는 내게,
"또 와라."
아버지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벚꽃 가로수길과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나란히 써놓고 보니 아무런 맥락도 없다.
그러나 어떤가. 순수하게 마음을 전하고, 귀찮아하지 말고 살라는 아버지의 마지막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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