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여인의 선물
데니스 존슨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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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작가가 남긴 마지막 소설집이라는 소개를 보고, 나는 이 책이 삶의 끝에서 건네는 쓸쓸한 회고록일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데니스 존슨의 『바다 여인의 선물』은 단순히 죽음을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었다. 간암 투병 중 마지막 힘을 다해 완성한 이 유작은, 오히려 벼랑 끝에 선 작가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응시했던 불완전한 삶의 민낯을 담고 있었다. 그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책 속의 문장 하나하나를 허투루 읽을 수 없었다.

작품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삶의 가장 낮은 곳에 서 있다. 중독에 빠진 사람, 상처와 후회 속에 살아가는 사람, 현실과 기억의 경계가 흐려진 사람, 이미 죽음에 가까이 다가선 사람들. 그들의 삶은 아름답게 포장되지 않고, 쉽게 극복되지도 않는다. 보통 이런 이야기는 결국 변화와 구원, 희망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마련인데, 데니스 존슨은 그런 익숙한 결말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망가진 인간을 고쳐 세우려 하지 않고, 그저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을 가만히 들여다볼 뿐이다.

처음에는 왜 이런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너무 초라하고, 너무 엉켜 있고,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삶들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어쩌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결국 거창한 사건들보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순간들의 모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하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자랑할 수도 없는 기억들. 그러나 바로 그런 보잘것없어 보이는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이 책 속 인물들의 불완전하고 뒤엉킨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는 삶을 판단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끌어안으려는 태도가 배어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바라보고 기록했던 그의 문장들은 화려한 위로나 정답 대신, 한 사람이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삶의 흔적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데니스 존슨 역시 의미 없어 보이는 순간들 속에서 삶의 본질을 발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간 기억들이 정말 아무 의미 없는 것일까.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나 완벽했던 순간이 아니라, 결국 지나온 시간 속 작은 조각들이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의 제목에 담긴 ‘선물’이라는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따뜻한 위로나 희망을 기대했지만, 이 책이 말하는 선물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삶이 언제나 아름답고 완전해서 선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엉망이고 불완전한 모습까지도 결국 내가 지나온 나의 삶이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그 모든 시간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데니스 존슨이 말하고 싶었던 삶의 태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도 완벽하게 정리된 한 편의 이야기는 아니다. 후회와 실수,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우연한 순간들이 뒤섞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책은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기보다, 이미 지나온 나의 시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묻는 책에 가깝다. 깨달음을 얻지 않아도, 모든 문제가 해결 않아도, 우리 삶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무너진 삶에도 이야기가 있고, 실패한 인간에게도 바라볼 이유가 있다. 작가는 구원받은 사람만이 의미 있는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어두운 곳에 있는 인간의 모습까지 들여다볼 때 비로소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신비로운지 보여준다.

『바다 여인의 선물』을 덮고 나니, 결국 삶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상하고 불완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는 일 자체가 하나의 선물일 수 있다.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순간들, 잊고 있던 기억들, 지나쳐 버린 작은 장면들까지도 모두 모여 한 사람의 인생이 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평범하고 사소한 삶의 조각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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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습관 - 작은 시작으로 압도적 변화를 만드는 행동 공식
로버트 마우어 지음, 장원철 옮김 / 북모먼트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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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습관』을 읽기 전까지 나는 습관이라는 것을 늘 의지와 노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새해마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다짐했지만 당연하게도 그 시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처음에는 누구보다 의욕이 넘쳤지만 어느 순간 부담이 되고,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경험을 반복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단지 앞을 향해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뿐이다”라는 문장을 만났을 때 마음 한편으로는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정말 작은 한 걸음만으로 삶이 달라질 수 있을까. 말은 쉽지만 실제 변화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저자가 말하는 ‘스몰 스텝’은 단순한 긍정이나 자기 위로가 아니라, 인간의 심리와 뇌의 작동 방식을 이해한 아주 현실적인 변화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 로버트 마우어는 변화가 어려운 이유가 우리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너무 큰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늘 큰 목표를 세우고 한 번에 달라지려고 한다. 하지만 거대한 목표는 시작하기 전부터 부담과 두려움을 만든다. 반대로 실패하기 어려울 만큼 작게 시작하면 뇌는 그것을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새로운 행동을 받아들인다.

책에서는 이를 여섯 가지 단계로 설명한다. 최소한의 질문, 최소한의 생각, 최소한의 행동, 최소한의 해결, 최소한의 보상, 그리고 최소한의 순간. 처음부터 답을 찾으려고 애쓰기보다 아주 작은 질문 하나를 던지는 것. 막연한 목표 대신 지금 할 수 있는 작은 행동 하나를 찾아보는 것. 그렇게 쌓인 작은 변화들이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더 많이’가 아니라 ‘덜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우리는 성공하려면 더 노력해야 하고,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왔다. 하지만 이 책은 오히려 조금 덜 부담스럽게, 조금 덜 완벽하게 시작하라고 말한다. 포기하지 않을 정도의 작은 크기라면 충분하다고. 그 사소함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이전과는 다른 나를 만들어낸다고 말이다.

책을 읽으며 나 역시 아주 작은 습관 하나를 바꿔보기로 했다. 평소 나는 음식을 너무 빨리 먹는 습관이 있었다. 식사를 할 때도 책을 보며 먹다 보니 음식의 맛을 느끼기보다 거의 삼키듯 먹는 경우가 많았고, 그 때문에 소화기계 쪽으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최소한의 시간, 딱 30초만 해보기로 했다. 30초 동안만 아주 천천히 꼭꼭 씹어먹고 그 뒤에는 다시 원래대로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그 짧은 30초가 생각보다 큰 변화를 만들었다. 이후의 식사에서도 이전보다 조금 더 천천히 먹게 되었고, 무엇보다 ‘나는 바꿀 수 있다’는 작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정말 작은 시작이 도미노처럼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느낀 순간이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며 “완전히 나를 위한 책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반복되는 실패 때문에 아예 계획을 세우는 것조차 망설였던 요즘, 이 책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다. 다만 예전처럼 거창한 목표를 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부담 없이 웃으며 계속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변화로 말이다.

결국 좋은 삶이란 거대한 성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주 작은 질문에서 시작해 작은 생각을 하고, 작은 행동으로 옮기며, 그 순간의 작은 기쁨을 발견하는 것. 그렇게 매일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어쩌면 우리가 바라는 인생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의 작은 한 걸음이 언젠가 돌아보았을 때, 내가 바라던 변화의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나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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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습관 #로버트마우어 #북모먼트 #책읽어주는남자 #북로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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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 - 고통 없이, 내 뜻대로, 존엄하게 죽는 일은 가능한가
박혜윤.신성준.최은경 지음 / 아몬드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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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할수록, 인간답게 죽을 권리는 오히려 길을 잃고 있다. 의학의 발전과 초고령 사회로의 진입은 죽음을 단순한 삶의 끝이 아닌, 기나긴 치료의 과정으로 변화시켜 놓았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묻게 된다. 어디까지가 치료이고, 어디부터가 단순한 연명일까. 무엇이 과연 존엄한 죽음일까. 죽음은 여전히 우리가 꺼리고 싶은 주제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사회적 과제가 되었다.

어머니의 암 진단을 계기로 항암 치료 중인 환자와 보호자들이 모인 커뮤니티를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매달 항암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를 선택하거나, 임종을 앞둔 이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하게 된다. 그때마다 마지막 순간을 존엄하게 맞이하는 올바른 선택이란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게 된다.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콧줄이나 정맥을 통한 영양 공급, 기관절개를 통한 산소 투여 등 각종 의학적 처치를 동원해 생명을 연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환자의 몸은 점차 쇠약해지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진통제와 그 부작용을 막기 위한 또 다른 약들이 추가되는 악순환을 보며, 과연 이 치료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생명을 붙잡고 있는 것이 진정한 돌봄인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인지 쉽게 답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많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읽게 된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은 막연했던 죽음의 과정을 한층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연명치료, 완화의료, 소극적·적극적 안락사, 의사조력임종과 같은 개념들을 의료적·윤리적·법적 기준으로 설명해 주어, 그동안 모호하게 사용해 왔던 용어들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국내 사례뿐 아니라 해외의 다양한 사례를 함께 제시하며, 왜 ‘죽음을 선택할 권리’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읽는 내내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이 책이 조력임종을 단순히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들은 매우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며, 제도가 도입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까지 깊이 있게 짚어낸다. 겉으로는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회적·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 충분한 돌봄을 받기 어려운 현실, 경제적 어려움 등이 선택을 왜곡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저자들은 단순히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말하기보다, 돌봄과 연대가 충분히 보장되는 사회적 기반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삶을 끝까지 지탱해 줄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죽음에 대한 선택도 온전히 개인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죽음은 혼자 완성하는 일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마지막 과정일지도 모른다. ‘고통 없이, 내 뜻대로 죽는 일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법과 제도, 의료 현장의 준비, 사회적 인식, 그리고 사회 구성원 각자의 가치관까지 여전히 정리해야 할 과제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 의미가 있다. 죽음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은 ‘좋은 죽음’이 무엇인지 묻지만, 결국 그 질문은 ‘좋은 삶’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 사람이 존중받고, 사랑하는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떠나는 일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는 연결된 삶 속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결코 혼자 완성하는 일이 아니기에 존엄한 죽음을 고민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이 책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되묻는다. 책장을 덮은 뒤 우리는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 그리고 그 마지막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깨끗한죽음이라는환상 #아몬드출판사 #책추천 #조력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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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바람
예예 지음 / 오잇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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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이별하지 않았다, 『하얀 바람』을 읽고

『하얀 바람』은 반려견 뭉게를 떠나보낸 예예 작가의 그림 에세이다. 이별을 다룬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쩌면 읽기 전부터 마음은 이미 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책장을 넘기는 내내, 나의 옛 강아지들이 생각나서 예상보다 더 많이 슬펐고 더 마음이 저려왔다. 이 책에는 슬픔을 강요하는 문장도, 눈물을 끌어내려는 장면도 없다. 대신 넓은 여백과 부드러운 색감의 그림들, 그리고 짧고 담담한 문장들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담백함이 오히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특히 책 말미의 에필로그를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뭉게와 한번 더 산책을 하면 그 슬픔과 먹먹함이 더욱 커진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상실의 슬픔을 잊기 위해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몰두했다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이해되었다. '정말 완전히 사라진 걸까?', '지금은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보았을 거다. 나 역시 먼저 떠난 반려견을 떠올릴 때면 종종 그런 상상을 하곤 한다. 지금 이 세계에서는 만날 수 없지만, 강아지 별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마음. 어쩌면 그것은 믿음이라기보다, 간절함에 가까운 감정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존재는 언젠가 우리 곁을 떠난다. 하지만 함께했던 시간과 기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가 내리면 빗속에서 파다닥 물기를 터는 너의 모습이 보이고, 벚꽃이 흩날리면 꽃잎 사이로 너의 발자국이 보이고, 쏟아지는 함박눈 아래로 폴짝거리는 네가 존재한다. 그 기억들이 슬픔으로 가라앉았다가 다시 사랑으로 떠오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와 이별하지 않았다.'는 저자의 말은 너무나도 큰 위로가 되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는 천천히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하얀 바람』은 상실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주기보다, 상실을 품고 살아가는 태도를 보여준다. 떠난 존재를 애써 잊으라고 말하지도 않고, 괜찮아질 거라고 재촉하지도 않는다. 그저 사랑했던 마음과 함께 우리는 묵묵히 살아갈 것이다. 

오늘도 바람이 분다. 그리고 나는 문득 생각한다. 지금 이 바람 어딘가에 잠시 나와 이별한 친구들의 흔적이 스쳐 지나가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우리는 사랑하는 존재와 이별하지 않았다." 

#하얀바람
#오잇 #예예 #서평단 #독서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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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바다처럼 운다
임세병 지음 / 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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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는 분명 에세이라고 적혀 있는데, 왜 나는 자꾸 시집을 읽고 있는 기분이 들었을까. 임세병의 『소년은 바다처럼 운다』를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다. 이 책의 문장들은 단정하게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물러난다. 어떤 문장은 눈앞의 풍경을 보여주고, 어떤 문장은 손끝에 감촉을 남기며, 또 어떤 문장은 오래된 기억 속 냄새까지 불러낸다. 그래서 책을 읽고 있다는 느낌보다 어느 리듬 위를 천천히 떠다니고 있다는 감각에 가까웠다.

부서지는 파도처럼 이 책에는 언어의 경계도, 시간과 공간의 구분도 뚜렷하지 않다. 시각과 청각, 촉각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문장들은 단단하게 굳어 있던 마음의 벽을 조금씩 허문다. 파리와 한국, 과거와 현재, 현실과 기억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가운데 작가는 자신만의 낭만적인 사유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그리고 그 사유는 어느새 독자의 감각 속으로 스며든다.

특히 저자가 사용하는 어휘와 문장의 풍부한 감성은 책 속의 풍경을 더 생생하고 오래 남게 만들어낸다. "그날 이후로 내게 이자벨은 보랏빛 태양으로 각인되었다. 코르시카의 여름이 수십 번은 오고갔을 잔주름이 고지도의 등고선처럼 빼곡했지만, 갓 맺힌 레몬처럼 단단하던 몸."이라는 문장을 읽는 순간, 코르시카의 뜨거운 햇살 아래 서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잔주름이 새겨진 얼굴과 단단한 몸, 태양에 그을린 피부와 야생화 향기까지 떠오를 정도였다. 단지 문장 몇 줄이 만들어낸 세계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선명했다. 저자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너는 아무래도 예술가가 되려나 보다"라고 말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는 눈에 보이는 장면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감각을 포착해 언어로 옮겨내는 사람이다.

"사람은 언제나 의미를 찾아 나아가야만 하는가? 무의미하게 살아본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허무는 곳곳에서 제멋대로 싹을 틔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 해도 해마다 나는 이미 먼 우주를 여행하고 있다. 막막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아간다."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이미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날들조차 거대한 우주의 흐름 속에서는 하나의 여행이 된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의미를 찾지 못해 불안했던 순간들마저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우리는 늘 의미를 찾고, 이유를 만들고, 목적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강박에서 한 걸음 물러선다. 삶이 언제나 합리적이거나 생산적일 필요는 없다고 말하며, 목적 없이 걷는 길에서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의도하지 않았던 것들이 어느새 삶의 일부가 되고, 쓸모없어 보이던 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위로 받는다.

책을 읽다 보면 바다는 더 이상 낭만의 상징으로만 남지 않는다. 끝없이 흔들리고 방향을 잃기도 하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불안을 품고 있는 존재로 다가온다. 하지만 바다는 파도를 멈추지 않는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흔들리고, 때로는 길을 잃고, 상실과 그리움을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중요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일인지 모른다.

『소년은 바다처럼 운다』를 읽다 보면, 조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도 괜찮다고, 그래도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책장을 덮고 난 뒤에도 문장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밀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파도처럼, 오래도록 마음속을 적시며 머문다. 그리고 문득 바라게 된다. 바다를 바라보며 끝없이 질문하고, 세상을 향해 호기심을 잃지 않는 그 소년이 영원히 소년으로 남아 있기를.


#소년은바다처럼운다 #임세병 #달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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