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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한국, 디아스포라의 미술
 
작 성 자 김복기 입 력 일 2002-02-04 오전 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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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Diaspora)가 현대 사회 문화의 담론으로 떠오르고 있다. 디아스포라는 제3세계 국민들의 제1세계로의 자발적 혹은 강제적 이주, 소수자 국가(minor state) 국민의 다수자 국가(major state)로의 이동을 뜻한다. 세계의 시간과 공간이 극도로 단축된 전지구화 시대에 디아스포라를 통한 이질 문화의 교배는 혼성 문화, 무국적 또는 다국적 문화를 탄생시킨다. 민족 정체성의 존립을 거론하기가 무색한 복합문화주의, 다문화주의 시대다.

디아스포라는 모더니티로부터 포스트모더니티로의 이행 속에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티는 국민 국가라는 공동체가 정치 이데올로기적 억압의 산물이라는 반성을 통해 개화했다. 포스트모더니티의 디아스포라는 모더니티와는 다른 새로운 민족 정체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서로의 정체성‘차이’를 긍정한다. 디아스포라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여성의 문제(페미니즘), 동성애자 집단, 반핵 그룹, 정치적 좌익, 홈리스 등과 관련된 포스트모던의 담론들, 이른바 마이너리티(minority)에의 주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이너리티는 단지 수적 차원의 열세를 지칭하지 않는다. 마이너리티는 지배를 받고 있는 또는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집단을 의미한다. 디아스포라는 마이너리티다.

근현대기의 한국도 디아스포라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열강들의 패권 각축과 근대화의 굴절, 일제강점의 민족 수난, 해방과 세계화의 꿈으로 이어지는 140년의 굵고 다양한 궤적 속에서 현재 145개국에 560만 명의 한국인이 디아스포라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다.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무형의 한국에는 카레이스키(고려사람), 조선족, 조센진, Korean in America(한국계 미국인) 라는 이름의 또 하나의 한국인이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살고 있다. 소련·중국·일본 등으로의 초기 디아스포라는 강제이주 타의적 이주가 많다. 해방 이후의 디아스포라는 미국, 캐나다, 그리고 유럽과 남미로의 노동 이민이 중심이다. 미국의 경우 1965년의 새 이민법 제정이 중요한 기점이 된다. 특히 미국의 한국인들은 코리아타운을 형성해 살고 있지만, 이곳의 2, 3세대들은 분산되고 혼합된 정체성을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포스트모더니티의 디아스포라를 적용할 수 있는 지역이다.

한국미술은 이 디아스포라를 어떻게 수용했는가? 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디아스포라는 글자 그대로 이산의 아픔, 민족 동질성에 대한 당위적 접근에 머물러 있었다. 88 서울올림픽과 공산 국가와의 수교 이후, 냉전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깨고 옌벤(延邊), 소련, 일본의 동포작가들에 대한 재조명 차원에서 이산의 문제를 다루었다. 1937년 스탈린이 단행한 소수민족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삶의 터전을 옮겨 유랑의 삶을 살아왔다. 우즈베키스탄의 정상급 화가 니콜라이 박과 신순남은 사회주의 체제의 미술에 순응하면서도 민족 수난의 아픔을,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화폭에 담아 고국전에 선보인 바 있다. 중국의 조선족은 1949년에 건립된 엔벤조선족자치주를 중심으로 자주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중국미술과 러시아 비판적 리얼리즘이 접목된 외래 영향을 받으면서도 민족 전통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 87년 조선족 미술계의 대부 석희만을 시작으로 90년을 전후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한낙연의 국내 유작전 및 조선족 원로 중진화가들의 국내 전시가 러시를 이루었다. 또한 남북 이데올로기 대립의 축소판 혹은 대리전 양상을 띠었던 재일교포 미술 역시 90년대 이후 송영옥, 조양규 등 조총련 계열의 작가들이 속속 소개되고 있다.

디아스포라를 포스트모던의 담론으로 수용한 것은 90년대 이후다. 〈태평양을 건너서〉〈코리아메리카코리아〉 등 전시 기획의 문맥으로 디아스포라에 접근한 것은 획기적인 변화였다. 전지구화, 복합문화주의에 대한 비평적 접근이다. 2001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참여작가 두 명이 모두 해외 거주 작가로 선정된 점도 디아스포라에의 주목을 반증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2002광주비엔날레의 프로젝트 〈저기 : 이산의 땅(THERE : Sites of Korean Diaspora)〉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바야흐로 동시대 서구미술 담론으로서의 디아스포라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3, 4세대 작가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 한국인의 태생적 조건과 미국의 사회적 구성 조건 사이에서의 혼란이나 문화에 대한 정체성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작업에 끌어들이고 있다.

디아스포라는 시대와 함께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이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디아스포라의 담론이 생산되고 있다. 우리는 이 담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현대의 디아스포라 개념은 복합문화주의나 포스트모더니티의 산물이다. 여기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은 포스트모더니티의 디아스포라는 근본적으로 서구 문명을 축으로 한 논리에서 생성된 개념이라는 사실이다. 타집단, 이방인이라는 언어 자체가 수직적 위계질서(hierarchy)를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제1세계로의 디아스포라에 대한 시선은 반드시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국민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며 타문화간의 활발한 접속과 변종을 탄생시키는 디아스포라는 그 배후의 역학 구도에 또 다른 거대한 단일 국가의 재림을 예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복합문화주의가 장악한 전지구화 세계에서는 이질적인 문화들간의 교접이 대부분 문화산업간의 접합으로 치환돼 드러난다. 이 산업논리의 원천은 자본이 힘이다. 자본 및 주류의 위계질서는 여러 가지 전략과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산자들에 대한 동화 전략이 있는가 하면, 포스트모더니티를 제1세계의 지배논리로 강화하거나 아니면 상호인정이라는 허울좋은 상대주의 논리로 정식화하는 방식 등이다.

결국 이민족간의 이종교배를 통해 탄생된 새로운 혼성 문화는 그 외관의 신선함뿐만 아니라 또 다시 자본의 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를 점검해 봐야 한다. 디아스포라가 모더니티의 부정적인 결과들을 극복하게 될 포스트모던한 징후로 읽혀지고 환영받을 수 있는 것도 이러한 각각의 고유성을 확보했을 때에만 정당하고 유효하다. 전지구화-정체성의 문제에는 여전히 간단하지 않은 문화 논리가 개입되어 있다. 그 실상을 올바로 읽어낼 때 디아스포라의 올바른 접근과 해석이 가능하다.

art in culture 2002년 2월호


※디아스포라(Diaspora) : 디아스포라는 원래 그리어에서 유래된 말로 ‘분산’혹은 ‘이산(離散)’을 뜻한다. 역사적 서술에서 디아스포라는 헬레니즘 문화 시대와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를 통해 그리스 근역과 로마 세계에서의 유대인 이산을 가리킨다.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에 살면서 유대적 종교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던 유대인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이산의 유대인’ 또는 ‘이산의 땅’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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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열린사회의적님의 "역사 이면의 역사. "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지 아직 판단이 서질 않네요. 개인의 존엄성이 파괴된 시대임은 분명한데, 그 존엄성의 파괴를 단순히 박정희 자신의 권력욕 때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인지는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한강의 기적과 박정희의 개발 독재를 개인 인권에 대한 탄압과 별개의 문제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일까요? 국가를 위해 개인이 희생해야 한다는 논리가 안고 있는 문제만큼이나 나를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는 생각또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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