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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정유정 작가의 모처럼의 신작이라고, 출판사에서도 독자들 사이에서도 홍보와 기대가 낭낭한 작품이었다. 그간 작가가 보여줬던 '압도적 서시와
폭발적 이야기'라 일컬어지는 저력에 비추어 이번 작품도 한껏 기대치를 높여놨고 흥분된 기대감을 갖고 작품을 읽어나가게 됐다. 이전 작품에서
그녀가 생생하게 그려냈던 '악(惡)'의 존재를, 이번에는 사이코패스 중에서 소위 '프레데터, 포식자' 등으로 불리는 최상급단계의 주인공을 내세워
끔찍한 범행의 나열로 드러낸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나 혼자 키워놓은 기대가 나를 배신하고 그 기대치 만큼의 낙폭으로 실망감을 높여놓은 건인가 싶기도
하다. 일단 문체가 좀 지나치게 묘사적이고 길다는 느낌이다. 벌어진 사건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도 불필요하게 여겨지는 비유와 묘사가 좀 질리는
느낌이고, 그래서 비교적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내용에 비해 문장들이 꽤 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뭣보다, 악의 탄생을 지켜보는 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악에 대한 통찰을 넓힌다고? 그래서? 그저 악이 탄생하고 발화하고 진화하는 그 과정을 읽다보면,
악인은 그저 그렇게 타고 났을 뿐이고, 그저 자연발생적으로 태어난 거고, 우린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가? 있는 그대로 악을,
악인을, 인정하고 순응하고 당해야 한다는 건가?
이 질문에 대한 논의와 대답을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이 악에 대한 통찰과 이, 그리고 제대로 된 대처를 논하고 있다고는 전혀
여겨지지 않는다. 그저, 이해할 수 없는 범죄가, 범죄자가 난무하는 요즘의 현실에 대한 그저 또다른 하나의 범죄 '기사'로만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답답하고 절망스럽고 허무하다...
왜 '악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되는가'를 주제로 잡았을까...? 정신의학과 학술지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리포트가 아니라, 그저 픽션일
뿐인데, 마치 그 문제를 파헤쳐보고 논의를 해보자는 식의 접근에 비해 그저 한 개인의 악의 본능에 대한 시간적 기록인 전개, 그리고 결말을
그려내는 건, 마치 읽는 '우리'를 그 악한 존재에 대해 이해시키고 그저 무기력하게 지켜보게끔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실, 작품이 재미없는 건 아닌데, 그리고 소설에서 무슨 사회적 논제에 대한 합의,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 주어져야 되는 건 아닌데,
작품 자체가 '악의 탄생'을 들여다보며 이에 대한 이해와 대처를 다룬다며 홍보한 까닭에, 평가가 너무 박해진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악'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읽기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전작들에 비해, 이번 작품은 별로 공감도 대단한 흥미도
느낄 수 없는 것은 분명하고, 그만큼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