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홀릭
야마모토 후미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창해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이제부터 앞으로의 인생, 다른 사람을 너무 사랑하지 말자.
너무나 사랑해서 상대방도 나 자신도 칭칭 옭아매지 말자.
나는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너무 꽉 잡는다. 상대가 아파하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 이제 두 번 다시 누구의 손도 잡지 말자.
체념하기로 정한 것은 깨끗하게 체념하자.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과는 정말로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
내가 나를 배신하는 짓은 하지 말자.
타인을 사랑할 바에는 차라리 나 자신을 사랑하자.

<내 나이 서른 한 살> 이후 야마모토 후미오의 소설을 한 권쯤 더 읽고 싶었다. 페이지수가 상당한데도 삼 일만에 다 읽었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주인공의 내면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완벽하고 상세하게 묘사하는 그녀의 문체는 소설에 더욱더 몰입하기 쉽게 만들어 준다. 사실 이 소설의 여주인공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주로 '음울하다'는 평을 듣는 분위기를 가진 인물인데 그러면서도 가끔 깜찍한 도발을 저지를 때가 있어서 의외성을 주는 캐릭터다. 소설은 중년여성이 된 그녀에 대해 호기심(절대 호감이 아니다;;)을 가진 한 남자 신입사원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우연히 술을 함께 마시게 된 그 신입사원 앞에서 그 중년여성, 그러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 미나즈키는 자신이 왜 지금 출판사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지 사연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이후 소설은 다시 그 여성, 미나즈키의 1인칭 시점으로 돌아가 그녀의 인생을 되짚는다. 그녀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 계기, 남편을 만난 이야기, 이혼을 하게 된 이야기, 우울했던 어린 시절 등등에 대하여 읽어나가는 동안 그녀 인생의 퍼즐이 하나씩 맞추어져 간다. 이 책의 하이라이트인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미나즈키라는 '독특한' 인물의 성향을 완전히 파악하게 되는데, 혹자는 어쩌면 그 부분에서 경악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찜찜한 건 그런 그녀를 경멸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녀가 스스로에게 무수히 던졌던 질문을 내가 나에게 스스로 해 보아도 나 역시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는 사실이다.
'만약'... 을 과거에 끼워넣는 질문. 얼마나 바보같고 부질없는 짓인지 잘 알면서도 그 질문에 답을 내리지 않고서는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 왜 있지 않은가. '만약 그 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이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류의 후회들... 혹은 '도대체 내가 어떻게 했어야 그 사람이 떠나지 않았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사람이 날 좋아하게 할 수 있을까', '난 최선을 다했는데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 따위의 자책들.


어떤 식으로 사람을 사랑해야 제대로 사랑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어떤 면도 받아들여 줄 수 있었다.
까다로운 성격, 자존심, 그 이면에 숨은 나약함.
그것을 모조리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 번도 그를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말했다.
     나를 쳐다보지 마!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어렵다. 더군다나 복잡하거나 변덕스러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더 어렵다. 하지만 단순한 사랑은 재미없다. 그렇지만 단순하지 않은 사랑은 소설 속 표현대로 '너절하다'. 물론 사랑은 사람마다 저마다의 유형이 있고 그 사랑법이 서로 잘 들어맞을 때에만 동등한 연애관계가 성립된다. 하지만 미나즈키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상대방에 집착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전부 다해주었다고 믿는 일방적인 사랑을 했다. 그런 미나즈키의 사랑 방식이 상대방의 숨통을 조였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처음엔 둘이 서로 사랑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게 어느 순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는지, 미나즈키를 불안하게 만들었는지, 폭력적이거나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그 모든 게 전부 두 사람의 사랑의 결과였을 거라는 거다. 과연 미나즈키는 그 때 어떻게 했어야 했던 걸까. 그녀는 남편을 위해, 매력적인 바람둥이 이치즈 고지로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는데 두 사람 모두 결국 그녀를 버렸다면 도대체 더 이상 무엇을 했어야 했던걸까. 아마 미나즈키는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소설의 결말, 이제는 다소 삶의 여유를 찾은 듯한 미나즈키의 모습을 보면 다소 안심이 되긴 하다만. 그리고 두렵게도 사실은 어쩌면 그녀가 나보다 훨씬 멋진 사람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지만.

작가는 미나즈키를 통해 독자에게 '당신은 당신의 사랑법에 자신있냐'는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다 어디서부터 어긋났는지도 모르게 속절없이 끝나버리는 수많은 연인관계들을 우리는 수도 없이 드라마나 영화, 소설 속에서 보면서 그들을 동정하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고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도 한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 닥친 이별 앞에 '붙잡지 않을 테니 내게 이러는 이유가 뭔지나 알려달라'며 진부한 대사를 그대로 읊고 만다. 방금 이별을 겪었다거나 차였을 때 미나즈키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결심하듯이 '구차하게 사랑 때문에 아파하느니 차라리 내 자신을 더 사랑해 주겠어!'라고 외쳐보지만, 세상에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나자신 하나 밖에 없다는 사실만큼 외로운 것이 또 어딨겠는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사람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만끽'하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이츠지 고지로와 길고 오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거리를 찾고 딴 애인을 마련하는 등 그 남자에 맞는 사랑법을 연구했던 이츠지의 여러 '새끼 양'들처럼.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미나츠키가 도달한 결론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그 사람에게 쏟아붓는 것이 완전한 사랑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개인적으로 드는 생각은 '나는 이런 식으로 사랑해 주지 않겠어?'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정말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랑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는... 또 작가인 야마모토 후미오는 확실히 헌신적인 사랑을 하다 버림받아 본 경험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디테일한 감정묘사들을.... 이거 너무 일차원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


<남과 여 그리고 이야기>라는 컴필레이션 앨범 속 어느 글이 갑자기 생각난다. 공교롭게도 미나즈키의 상황에 꽤 들어맞는 듯한.


유괴범과 바람둥이

아동 유괴범이 검거될 확률 97%

그러나 유괴범죄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유괴범들은 자신이 검거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밖의 3%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

바람둥이와의 사랑에 실패할 확률은 99%

그러나 바람둥이를 사랑하는 여자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여자들은 자신이 바람둥이를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 밖의 1%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

바람둥이를 소재로 한 영화, 드라마는 날로 우후죽순.

그것은 아직도 그를 사랑한
그녀들의 수가 더 많다는 것을 입증하는
영상매체의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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