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풍경 제 9회 정기공연

<태수는 왜?> 09/4/16 ~ 09/5/3 | 정보소극장

권력의 축복과 경멸이 잉태한 한국의 오레스테스, 그를 향한 복수의 서막

작 : 고영범 | 연출 : 박정희


출연
태수- 호산 | 필수- 최광일 | 형사 김동호- 강승민 | 이기자- 윤복인 | 미림, 응웬- 김성미 | 형사 상욱- 김아영




연극 관람은 무척 오랜만이다. 좋은 연극이 많은데도 왜 영화 열 편 보는 것보다 연극 한 편 보는 게 더 어렵게 느껴지는지.. 대학로도 오랜만. 비는 추적추적 왔지만 은근히 기대하면서 극장으로 향했다.


 

 정보소극장은 처음 가 보는 곳이었는데 공간의 3면이 관객석으로 되어 있고 그 안에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딱히 어느 곳이 정면이라기보다는 그저 바라보는 곳에서 각기 배우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는 차이가 있다고나 할까. 배우들이 입장,퇴장하는 문도 모두 3곳에 마련되어 있다. 독특한 구조였지만 연극의 입체감을 다양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3면 모두에서 한번씩 감상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

연극의 첫장면은 빗소리를 배경으로 손을 씻는 태수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태수의 어머니가 살해되고 경찰이 수사를 시작하지만 태수는 자신이 어머니를 죽였노라고 자백한다. 굴지 기업 회장의 아들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태수가 정말 어머니를 죽였을까, 정말 죽였다면 왜 그랬을까에 대한 질문을 풀어나가는 것이 이 연극의 핵심 내용이다. 태수의 친구 필수는 책으로 펴내기로 한 태수의 소설을 형사에게 넘기고 형사들은 소설 속 주인공의 행적을 좇으며 수사를 펴 나간다. 이 연극에 모티브가 되었다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어머니에게 복수하기 위해 어머니를 살해하는 인물이다. 태수는 모두가 부러워 할만한 완벽한 조건을 지닌 인물인 듯 보이지만 암울한 시대의 희생양이자 가해자로서 열패감과 자책감으로 점차 무기력해져간다. 이 연극의 시점은 현재이지만 주요 이야기는 태수와 필수의 과거 에피소드가 벌어지는 1980년대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베트남전, 독재를 지나 민주화가 자리를 잡던 80년대를 거쳐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는 90년대, 기성세대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입혔고 자식들 역시 부모와 나라의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 또 이 연극의 주인공 두 명은 남성이지만 비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여성들의 죽음 역시 이 연극의 큰 축을 형성한다.
태수가 경험한 아버지로부터의 억압과 당시 한국사회가 자행했던 폭력이 겹쳐지고 태수와 필수의 우정과 배신이 이어지고, 과거와 현재의 에피소드가 정교하게 얽히면서 단출한 무대는 스토리와 상징으로 꽉 들어찬다.
 


 

6명의 배우들이 모두 맨발로 등장해 마루바닥으로 된 무대를 누비며 열연하는 모습도 그렇거니와 태수의 친구 필수 역을 맡은 최광일씨의 연기는 특히 인상적이다. 연극적인 딱딱한 발음이 아니라 실제로 말하는 듯 자연스럽게 발음하기 때문에 잘 귀기울여 듣지 않으면 대사를 놓치기 쉽지만 조금만 집중하면 확 빠져들게 된다. 태수 역의 호산 아저씨는 극중 대사처럼 잘생겼고 체격좋고 기타등등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주인공 역에 제격이었다는;;(또 이런다...)


 연극을 정말 오랜만에 보기도 했지만 보는 내내 참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한정된 인물이 출연하여 모든 시공간은 소품과 조명, 음향으로 연출되는 무대하며, 무엇보다 바로 앞에서 눈 말똥말똥 뜨고 있는 관객들을 마주하고 연기에 몰입하는 배우들의 집중력도 놀랍고, 모두 한 공간 안에 있는데 각기 다른 시간대와 장소의 대사가 섞이는 상황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긴박감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영화로 치자면 마치 몽타주 편집과도 같은.
대사도 한 줄 한 줄 심오하여 두 세 번씩은 곱씹어 봐야 할 듯 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다. 영화보고 나서 시나리오 읽어보고 싶어지는 경우는 (개인적으로는 사실) 별로 없는데 이 연극은 극본이 어떻게 씌여졌을까 무지 궁금하다는. 특히 이 연극이 더 그러한 이유는 태수가 필수에게 넘긴 소설이 극중에서 많이 읽히고 인용되는데, 배우들의 대사와 소설 구절을 읊는 내래이션이 뒤섞이면서 문어체와 구어체의 혼합이 묘한 리듬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사실 소극장 연극의 경우 홍보비용을 많이 들일 수 없는 만큼 이런 좋은 연극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려면 꽤 정성이 필요할 듯 하다. 그저 귀만 열어놓고 눈뜨고 있으면 침투하는 영화 홍보와 너무나 다르게 조용히 대학로 한 작은 극장에 붙박인 채 매일매일 공연되고 있는 이런 연극, 놓치긴 아쉬운데 말이다.

어쨌든 알라딘 문화이벤트 덕분에 간만에 좋은, 묵직~한 경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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