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녀 - [초특가판]
호금전 감독, 홍금보 외 출연 / 리스비젼 엔터테인먼트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정치적으로 어지러웠던 명나라 말기, 벼슬에 뜻이 없는 선비 고성제는 초야에 묻혀 다른 이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며 살고 있다. 그는 어느 날 우연히 폐가에 살고 있는 양낭자를 만나고 아름다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양낭자는 과거 충신의 후손으로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뒤에 가족들을 몰살하려는 조정의 무사들을 피해 도망 다니고 있는 중이다. 고성제는 양낭자 일행과 합류한 뒤 병법에서 응용한 여러 가지 계략을 세워 이들을 돕게 된다.

정확히 40년 전 영화. 무협영화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쇼브라더스의 대표작 중 하나다. 아직도 중국 본토와 대만, 홍콩의 구분이 어떻게 되는 건지 감이 없는지라 정확히 이 작품이 어느 국적의 영화인지 헷갈린다. 감독 호금전은 중국 베이징 출신이지만 이후 홍콩 쇼브라더스에 입사한 이후 무협영화 걸작들을 찍었고, <협녀>를 비롯한 대부분의 경우 국적이 대만으로 되어 있다. 흠...



어쨌든 영화 자체의 스토리는 별로 특이할 만한 게 없다. 벼슬 욕심없이 홀어머니와 가난하게 살아가는 한 청년의 옆집에 정체가 불분명한 여자가 이사를 오고 그때부터 마을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그녀는 역적의 모함으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충신의 딸로 몰래 피신하여 몸을 숨기고 살아가고 있는 형편. 그런데 이 청년과 사랑하게 되고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조정에서 그녀를 잡기 위해 군사들을 보내는데 청년과 그녀, 그리고 조력자들이 힘을 합쳐 그들을 막아낸다는 이야기. 중국 어느메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민담 수준의 이야기 한 자락을 화려하고 긴 무협스토리로 굽이굽이 펴낸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후반부 30여 분이라고 콕 집어서 말할 수 있겠는데 바로 혜원대사라 불리는 스님의 활약이 등장하는 곳이다. 그녀는 청년에게 대를 이을 아기를 남기고 불교에 귀의하려는데 그녀를 재판부에 끌고 가려는 조정의 무리들이 몰려오고 이때 혜원대사가 그들을 물리친다.

주목할 만한 것은 혜원대사, 즉 불교를 상징하는 종교인의 모습이 거의 신화화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높은 곳에서 항상 역광을 받으며 나타나기 때문에 적으로 하여금 눈이 부셔서 쉽사리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나뭇잎을 밟고 사뿐히 내려선다든가 그들이 움직일 때 카메라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 등을 빠르게 교차 편집하여 이 스님들이 속세의 인간들과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는 '속세와의 인연'은 질기고도 구차한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속세와 종교의 삶이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이 스님들이 거주하는 절은 마을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산넘고 물을 건너 한참을 걸어야 당도할 수 있는 곳이며 마을은 우둔한 백성들이 죄를 짓고 살아가는 곳으로 그려진다.





혜원대사의 등장,


그 자체로 '신'과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마을에 사는 우둔한 백성들은 죄를 짓고는 귀신을 두려워 하며 소문에 예민하다. 주인공 청년 고성제의 어머니는 아들이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는 이유가 가난해서이기 때문이라고 믿으며 과거 시험에 응시하라고 아들을 다그친다. 그리고 대가 끊길 것을 염려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조정의 관리들 역시 서로 역적 모의를 일삼으며 충신을 내쫓고 그 식솔까지 멸하는 추악한 집단으로 나온다. 그런 지저분한 속세와 전혀 다른 세상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잡은 산사와 평정심을 잃지 않는 스님의 모습은 나약한 인간이 어디에 기대어 마음의 안정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려주는 듯 하다.



동네에 소문이 퍼지는 과정을 표현하는 화면분할 편집방식. 당시라면 꽤 획기적인 방법 아니었을까.


스토리는 단순하지만 화면에 담기는 소소한 부분들은 지극히 미학적이다. 칼싸움 장면이야 요즘 현란한 CG와 각종 무술 효과에 단련된 우리의 눈에는 어설프고 새로울 것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발견되는 매력들이 있다. 특히 호금전 감독은 속세에 찌들고 거짓과 욕심에 미혹되어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거미줄에 걸린 곤충에 비유하여 보여주는 듯 하다. 영화의 첫장면에서부터 거미줄과 거미를 보여주는가 하면 여검객 양낭자가 몰래 숨어 사는 집 안에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듯한 밧줄이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다. 또한 적을 공격할 때 가장 마지막에 쓰는 방법이 밧줄로 몸을 묶어 그 끝을 길게 늘어뜨려 기둥 4개에 묶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거미줄에 곤충이 걸린 모습과 닮았다. 우리는 결국 속세라는 거미줄을 벗어나려면 종교에 귀의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 당시의 영화가 여성을 이토록 진취적인 인물로 그렸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에 비하면 남자 주인공 '고성제'는 싸움보다는 점잖게 머리를 굴려 전략을 구사하는 스타일이다. 어머니에게 구속되어 반은 마마보이와 같은 상태이며 마을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마음이 여려 오히려 여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기를 남기고 절로 떠나는 아내의 모습이라니, 흡사 자식(사랑했던 기억)을 남겨놓은 채,고 전쟁터에 나가거나, 무림으로 떠나 석양 속으로 사라지는 무협영화 혹은 혹은 서부영화의 주인공들을 닮지 않았나. 왜 이 영화가 당시 새로운 스타일의 무협이라 불렸는지, 그리고 아직까지도 회고되는 고전이 되었는지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일단 스타일이 좋다. 인정. 영화는 자그마치 180분이 넘어서 상당히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일단 끝까지 다 보고 나면 그래도 꽤 재밌고 심오한 내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 세상살이가 지칠 때, 무협영화 한 편쯤 보는 재미도 쏠쏠할 듯. (조금만 화질과 음질이 좋다면..)



유일하게 로맨틱한 장면, 꽤 근사하다

<협녀>의 영어 제목은 'A Touch of Zen'이다. '선의 감촉'이라고 번역되어 있던데..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그리고 이 '협녀' 에피소드는 청나라 학자인 포송령이 지은 <요재지이>라는 책에 나오는 4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라고. (최근 개봉한 <화피>도 역시 원전을 <요재지이>에 두고 있다.) 역사가 유구하고 문명이 발달했던 만큼 아무리 캐도 이야깃거리가 마르지 않는다는 점도 장차 중국영화의 미래를 밝게 하는 요인 중 하나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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