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십자가라는 제목에 마음이 끌렸다. 십자가 앞에는 주님의 십자가 나의 십자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왜 철저한 십자가라고 했을까 라며 읽어 내려갔다 역사상 위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외로웠다. 고독은 성도가 성도로 살아가기 위해 지불해야 할 한 가지 대가인 것이다. 외롭게 살았던 사람은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 믿음의 조상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외로웠던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 고독한 발걸음을 옮기실 때 주변을 따르던 무수한 군중은 그분의 고독을 조금도 덜어드리지 못했다. 그 십자가는 예수님 한분만 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군중속의 고독을 느낄 때가 있다. 내적고독..마음에 와 닿았다. 이 고독으로 인해 하나님을 의지 하게 되고 주변의 영적 환경이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에 침묵을 지키며 하나님만 자기의 슬픔을 말씀드린다. 또 외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한 채 혼자 틀어박혀서 천국을 묵상하며 세월을 보내는 사람도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의지적으로 종속 되어야한다. 일시적 충동이나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의해 살아가려고 애쓰는 기복이 심한 감정에 의존하는 그리스도인은 잘 사는 것이 아니며 오래 지속할 수도 없다. “감정과 신앙은 다른 것이다” 나도 때론 감정조절이 안될 때가 많이 있다. 이 감정이 주님이 주신 사랑인양 분별력을 잃어버릴 때도 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기에서의 십자가는 그 결과까지 깊이 생각하고 분명한 결단에 의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순종의 길에 십자가가 서 있다. 십자가는 순종의 길, 징계는 분순종의 길.. 우리를 향한 주님의 징계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통이 십자가 때문인지 징계 때문인지 분별하여야한다. 십자가는 화평이 아니라 검이다. 하나님의 충성이 때론 가족을 갈라놓는다. 오늘날 기독교의 연약한 것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특히 친인척들과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 신앙적인 것들을 쉽게 양보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조금은 흔들렸다. 왜냐하면 요즘 교회 목사님들은 주일날 명절이 되면 가족들과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해 오후 예배를 하지 않는 것은 예사인 것이다. 가족을 만나 즐거움을 나누고 거기서 전도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이 예배인 듯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다. 예배를 드리면 구시대적 사고, 바리새인 같은 신앙등 그렇게 얘기를 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최우선을 요구하신다. 편하고 솜사탕처럼 달콤한 기독교를 믿으려는 경향이 이 시대에 진리를 깨달으면서 내적 조명이 있어야하고 그 조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진정한 믿음이 있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억지로 고난 속으로 몰아넣으시지 않는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우시지도 않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보물로 우리를 인도 하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고난을 받겠다고 선택했고, 수고와 고난의 길을 가야 할 길로 받아들였다. 십자가를 패하려 애쓰지 말고 편안한 길을 거부하고 능력도 열매도 없이 교인들의 등을 두드려주어 편히 잠들게 만드는 교회에 안주하지 말라고 한다. 만일 타협과 양보를 통해 한 영혼을 하나님 나라로 들여보낸다면 그 나라는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미하하고 상징화해왔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에는 아름다운 것이 없다. 그것은 사형의 도구였다. 십자가의 기능은 오직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십자가에서 눈물과 피와 고통을 빼버린다면 더 이상의 십자가가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을 하신다. 그건 생명의 끝이며 또 생명의 시작이다. 이 책을 통하여 왜 철저한 십자가인지 십자가를 다시 해부하면서 읽다보니 지금껏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기도한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십자가를 질 용기가 더 희미해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