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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메초
샐리 루니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1월
평점 :
그의 아버지. 그를 대견해 하면서도 위압감을 느꼈던 아빠. 그건 너한테 맡기마, 피터. 이런 건 네가 더 잘 아니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분명 맞겠지. 스스로를 작게, 더 작게 만들다가 결국 사라졌다. 모든 게 자기 탓이라는 듯, 자신이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듯이.
이 소설은 두 형제의 이야기가 번갈아 등장한다. 처음 화자는 형인 피터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말도 안 되는 정장을 입고 온 동생이 영 탐탁지 않고, 여자친구(?)인 나오미에게 동생을 괴짜에 자폐아 같다고까지 말한다.
피터의 저 말은 ‘도대체 아이번은 어떤 사람이길래?’라는 호기심을 만들었고, 자연스럽게 아이번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했다.
내가 만난 아이번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어쩌면 피터보다 훨씬 더.
아이번은 지방에서 열린 체스 대회에 갔다가 우연히 마거릿을 만난다.
아이번은 자신보다 10살 이상 많고, 남편과 별거 중인 유부녀인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이 소식을 듣고 마거릿이 이상한 여자일 거라 단정 짓는 피터에게 화가 난 아이번. 둘은 크게 싸우고 멀어진다.
아이번은 친구도 없고, 평소에도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는 듯 보인다. 이 모습이 겉으로는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결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힘들면 본인이 왜 힘든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왜 그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분석하고 드러내고 풀어낸다. 그에 비해 피터는 가지고 있는 감정을 모두 숨긴다. 낮에는 촉망받는 변호사로 따르는 친구도 많고, 그를 좋아하지 않는 여자는 없다. 하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사랑하던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 끊임없이 방황하고,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자에게 돈을 대주고 만나며, 사람들이 안 보는 사이에 술과 약에 의존해 살아간다.
10살 가까이 차이 나다 보니 피터는 아직 아이번을 애로 생각하는데, 솔직히 읽는 내내 오히려 아이번이 더 성숙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오해가 쌓여 결국 큰 싸움이 벌어졌을 때, 비로소 피터의 속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된다.
부모의 이혼 후, 아버지와 동생을 지켜야 된다는 중압감. 당연한 미래를 약속했던 여자친구의 사고로 인해 겪은 고통, 아무도 그 고통을 알아주지 않아 겪는 외로움까지 오랫동안 피터를 괴롭혀왔다. 너무 이른 나이에 어른이 되어버린 탓에 본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고, 그 괴로운 순간들을 이겨내기 위해 술과 약에 취하고, 회피만 하게 되었다.
이런 피터의 마음을 이해하고 난 후, 사라지고 싶지만 사랑받고 싶다는 피터의 대사는, 그 어떤 대사보다도 공감돼서 너무 슬펐다.
613페이지라는 무게가 날 짓누를 것 같았지만 피터와 아이번은 물론이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힘들어 더 깊은 수렁에 빠질 수도 있을 법한 아이번을 구해낸 마거릿과 쉴 새 없이 불안하고 흔들리는 피터를 잡아준 두 여자, 실비아와 나오미까지 중요 인물들의 대사가 너무 좋아서 밑줄도 많이 긋고, 얻은 문장도 너무 많다. 특히 피터의 혼란스러움과 불안함 묘사가 굉장해서, 처음엔 피터라는 인물에 납득하지 못하고 미워했었는데, 어느새 나도 그의 편을 들고 있었다.
인터메초가 끝난 후 시작될 새로운 극에서,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고, 계속 살아보자는 피터를, 일단 흘러가는 것을 보자는 아이번을 그들의 극이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 응원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