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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 (출간 15주년 기념 백일홍 에디션) - 박완서 산문집
박완서 지음 / 열림원 / 2022년 5월
평점 :
처음부터 받아들임의 시간이었어요. 박완서 작가님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제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시대와 상황 속으로 여행을 가는 것 같았습니다. 박완서 작가님의 명성은 오래 전부터 들어왔지만 작가님의 책을 쉽사리 집어들지 못했었어요.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아직까지는 그분의 글을 읽을 준비가 안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번도 읽어본 적은 없었지만 저에게 시간을 주고 싶었습니다. 좀더 마음과 생각이 열린 다음에 읽고 싶어서 아껴두었었어요.
문득 작가님의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0세라는 늦은 나이에 문단에 등단하신 작가님의 이력 때문이었을까요? 저도 40이라는 나이가 지나서야 작가님의 글이 읽고 싶어졌어요. 마음이 움직였고, 한 권씩 만나고 있습니다.
<호미>는 박완서 작가님의 산문집이에요. 40여 편이 넘는 글을 통해서 작가님이 지나오신 시대와 삶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저와는 워낙 살아온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글 속에 녹아있는 문체와 어휘가 많이 낯설고 생소했어요. 지금까지 읽어온 육아서와 자기계발서와는 분명 달랐습니다. 한 번에 휙 읽어나가기 보다는 문단 하나를 읽고 한참을 글 위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았어요.
글을 읽으며 눈물짓는 저를 보고, 요즘들어 괜히 눈물이 많아진 탓이라며 애써 이유를 찾았습니다. 여전히 세상을 알아가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중이지만 그럼에도 작가님의 글을 보고 눈물짓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덤덤한 진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호미>를 읽는 동안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어휘를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어요. 신선했고, 삶을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느낌이었습니다. 자연과 일상을 소재로 적어내려 간 글은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어요. ‘공감한다’는 말의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작가소개>
박완서 작가님은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습니다.1950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중퇴하였습니다. 1970년 마흔이 되던 해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책 소개>
한 권의 책이 옷장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칸칸이 계절과 용도에 따라 들어찬 옷처럼 어떤 글을 읽어도 무리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일상을 돌아보며 쓴 글들이기에 목차를 보면서 그날의 기분에 따라서 한 두 편씩 꺼내 읽었어요.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른 곳으로 넘기지 못하고, 이 글만 여러 번 반복해서 읽게 되었어요. 노년의 작가님이 어른이 된 딸에게 전하는 글이 따뜻하면서도 먹먹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동기간처럼 딸을 의지하는 마음과 지금까지 말로 못다한 마음을 표현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친정을 방문한 뒤 차를 몰고 가는 딸을 걱정하는 모습을 통해서 부모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차라리 네가 친정에 자주 오지 말기를 바라게 된다.255쪽’ 만나면 반갑지만 그럼에도 걱정스러운 것이 모든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더 애틋하게 다가왔습니다.
네 명의 동생을 두고, 맡이 역할을 해야 했던 딸의 마음을 보듬어 주는 부분도 뭉클했어요. 알게 모르게 동생들에게 모범을 보일 것을 강요한 것은 아닌지 다 큰 딸을 두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는 작가님의 글의 보면서 저의 육아 방향도 점검해 볼 수 있었습니다.
‘한글을 깨치자마자 동생들 동화책 읽어주는 일부터 시작해서 학교 가서는 공부 잘하기, 좋은 상급학교 가기를, 다 너 잘되기보다는 동생들이 본뜨고 뒤따를 테니까 잘해야 된다는 식으로 가르쳤으니 어려서부터 나는 너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워왔구나.256쪽’
‘심지어는 남자친구 사귀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일까지 동생들의 모범이 되기를 강조했고, 넌 한 번도 내 기대에 어긋난적이 없지만 요새는 때때로 생각하곤 한단다. 너를 좀 더 자유롭게 키워 가족의 테두리 밖으로 밀어냈더라면 넓은 세상에서 한가닥 할 수도 있었을 것을 기껏 동기간의 가정에 좋은 본을 보이기 위한 모범 주부로 머물게 한 게 아닌가 하고. 256쪽’
지난 날을 후회하는 모습에서는 지금의 저를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첫째에게 누나로서의 역할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어요. 역할이 아니라 아이 자체를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무심한 듯 하지만 다정한 작가님의 글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삶의 지혜를 함께 나누는 기분이 들었어요.
마당에 핀 꽃과 나무에게 말을 걸며, 작은 생명도 소중하게 바라보는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허투루 여길 수 없으며, 가벼운 생명은 없다는 것을 다시금 배울 수 있었어요.
책의 제목이 <호미>인 것에 대한 궁금증은 ‘작가의 말’에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40편이 넘는 글 중에서 어느 것 하나도 쉽게 읽히거나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글이 없었어요. 글 자체가 어려웠다기 보다는 마음이 머무는 글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삶을 바라보고, 삶을 대하는 자세를 재검검할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내 마당의 꽃들이 내 말을 잘 듣는다고 해서 노랗게 피는 꽃한테 빨갛게 피라거나, 분꽃처럼 저녁 한때만 피는 꽃한테 온종일 피어 있으라는 무리한 주문은 안 한다. 무리한 요구를 안 하는 게 아마 꽃이 내 말을 잘 듣도록 길들이는 비법인지도 모르겠다. 아니지, 꽃과 나무들을 내가 길들였다고 생각하는 걸 알면 그것들이 아마 코웃음을 치거나 화를 낼지로 모른다. 그것들이 나를 길들였다고 정정해야겠다.15쪽’
저에게 깊은 울림을 준 문장을 적으며 이번 서평을 마무리합니다.
감사합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진심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