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병에는 향수가 없다
성지혜 지음 / 문이당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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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글을 쓰기로 작정한 계기가 있다.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작가로서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여고시절 박경리 작가를 만난 순간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저자의 도발은 즉시 이 책을 읽고 싶게 했다. 존경하는 작가를 만난 순간, 미래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강단성은 그동안 얼마나 소설가의 꿈이 간절했는지 보여준다. 글 한 번 써보자고 대들며 닮고 싶은 작가가 있다는 점은 큰 자산이다. 글 길을 잃고 우왕좌왕할 때 등대가 되어준다. 저자는 박경리라는 거목을 등대 삼아 소설을 빚었다. 소설 속의 외침은 그동안 삶의 역경 속에서도 신앙과 글쟁이로서의 굳은 다짐을 주춧돌 삼아 글 쓰는 삶을 이어가리라 고백한다. 때론 느리게, 때론 몰아치는 숨으로 이야기를 잇는 문체가 무척 신선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느낌을 준 소설집이다.

 

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접하는 게 제목이다. 제목의 의미를 유추해보며 글의 행간을 짐작한다. 그러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슬그머니 글 속에 들어간다. 하지만 향수병에는 향수가 없다."라는 제목은 한참 동안 생각하게 했다. 향수 없는 향수병을 어디에 쓸까. 향수병은 있지만 인공의 향수는 향수가 아니라는 뜻일까. 단순히 향수병엔 향수가 없음을 말하는 걸까.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책을 접했다. 8편의 소설이 담겨있다

 

<나를 이겨라>는 저자가 소설가가 된 계기와 역경을 극복하며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을 이야기한 소설이다. 저자는 여고시절 박경리 작가를 만난다. 그러면서 소설가의 꿈을 키웠다. 평소 흠모하는 작가가 진주에 온다는 기사를 접한 저자는 바로 작가를 만나러 갔다고 한다. “저도 선생님처럼 소설가가 되고 싶어요.”라며 고백한다. 그날 이후로 박경리 작가의 그림자를 쫓으며 소설 쓰는 사람이 되었다. 한 사람의 일생을 가르는 어떤 계기는 드라마 속에 나 나오듯 극적 순간 같아도 이런 현실은 늘 존재한다. 어쩌면 드라마보다 더 극적이고 다양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 현실일 때도 있다. 저자는 대작가들로부터 작가의 소질을 인정받고 몇 개의 필명까지 받는다. 결국 현재의 필명 지혜는 기도 중에 하나님께 받은 은사의 선물이다. 삶의 중간에 시들병이라는 무기력에도 빠졌다. 글쓰기에 큰 위기가 왔다. 결국 저자는 신앙심으로 극복하고 나를 이겨라라는 박경리 작가의 덕담을 가슴에 새긴다.

 

파란색 보석하면 사파이어를 떠올린다. 파랗다 못해 멍든 푸르름을 머금은 청량감이 일등이다. 터키석 또한 파란색이다. 사파이어에 흰 물감을 한 방울 떨어뜨린 듯 조금 연한 파랑이다. 향수와 보석은 여자들 취향 중에 조금은 고급 진 부류에 속한다. 향수야 그렇다 치지만 색상 별로 온갖 의미를 지닌 돌덩이에 경제적 가치를 지닌 로망의 물건이다.

터키석의 파란빛을 사모한다는 새미는 남편이 터키 출장길에 사 온 터키석 두 알을 선물 받는다. 보석과 향수, 살아가는데 필요하진 않지만 만족감을 주는 물건이다.

보석을 좋아하는 새침데기 성향의 새미가 모으기 시작한 향수병, 빈 향수병을 모으기 위해 값비싼 향수를 사는 새미 취미의 원인은 가족력에서 기인한다. 윗대로 냄새를 풍기는 체질 때문이다. 역겨운 냄새를 감추기 위해 향수를 사 모으기 시작했고, 급기야 향수병의 고급 진 외양에 빠진다. 새미는 전통 물품을 파는 세계 곳곳을 찾아 헤맨다. 진품이나 모조품을 가리지 않는다. 문양의 미에 빠진 새미의 향수병에는 향수가 없다. 향수가 없는 향수병은 빈 병이다. 빈 향수병이 가득한 집에 부부의 애정이 머물지는 않았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만의 향기를 지녔잖아. 냄새가 싫다고 스스로 고립시키면 사람 사귐도 순조롭지 못하고 외톨이로 살아가기 마련이거든.” 남편의 충고는 향수병에 집착하는 아내의 수집병에 대한 충고였다. 새미 특유의 냄새에 사랑의 코가 멀었다는 남편, 수술로 특유의 냄새가 없어진 새미를 대하는 남편의 흔들리는 마음, 냄새를 그대로 물려받은 딸 토리의 결심, 이들은 냄새로 인해 향수를 접했다. 그러면서 차츰 인간에게 풍기는 진정한 향수가 무엇인지 알아간다. 결국 이젠 진정한 향수를 지녀야지라며 예루살렘 부활절 대축제 순례 여행을 계획한다. 나의 향은 무엇일까. 나만 모르는 향이 있고 모두 다 아는 향이 있을 터이다. 뿌리지 않아도 풍기는 자연스렁 향, 나만의 향이 좋은 향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결을 향한 단상>에서는 다솔이, 엄마의 자궁에서 잉태되어 느끼는 숨결로 시작한다. 그는 세상에 온갖 의구심을 품고 바람과 함께 거리를 떠돈다. 바람과 함께 성장하는 다솔, 제주도의 하르방을 보고 돌의 숨결을 느낀다. 앙코르 와트에서는 세월의 이끼가 돌의 문양과 어우러지는 신비스러움을 본다. 자연의 품에서 떠돌다 갈릴리 호숫가에 도착해 성인식을 치른다. 다시 돌아온 다솔은 정착하기 위해 지리산 토굴에 둥지를 튼다. 움막을 짓고 채소를 가꾸며 연명을 하지만 인간적인 욕망은 잠재울 수가 없다. 결국 다솔은 세상으로 나와 결혼식을 치른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성인식을 함께 했던 나탈리의 구애로 다솔은 사랑하는 여인과 둥지를 튼다. 이렇게 항시 너를 지키는 눈동자가 있다"라는 엄마의 충언은 아들에게 현실이 되었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순간 홀로 견뎌야 한다. 탯줄을 벗어난 인간은 독립적이다. 그 이치를 알아버렸나. 다솔의 여정은 생에 대한 온갖 의문으로 시작한다. 맨몸으로 겪고 느낀다. 인간은 육체적, 정신적으로도 혼자 살 수 없다는 이치를 깨닫는다. 다솔은 생에 육신과 영혼의 합일을 가져온 아내를 만났다. 저자는 결국 완전한 삶은 다솔이 도착한 지점임을 보여준다. 도착점은 다시 시작점이 되지만, 찾고 구하며 자신의 길을 나가는 이 일이 인생임을 말한다.

 

저자는 각각의 작품에서 이상적인 삶을 분주히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준다. 이렇게 소설을 누비며 드러나는 저자의 숨겨진 욕망은 어쩌면 나의 욕망과도 같았다. 글이라는 거울을 통해 비춘 나의 모습을 다시 한번 다독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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