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세계에 독백을 남길 때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조지 오웰은 좋은 산문은 유리창 같다라고 했다. 그런 글은 활자 사이를 비집고 반사되는 세세한 감정이 문장속에 살아있다. 이 글은 산문에 시의 옷을 입은 일기장같은 고백서다. 이 여정에 저자는 여행하듯 찾아와줄 독자를 기다리며 초대장을 내민다. 그러면서 깊은 밤중의 시간을 허락해 주기를 부탁한다. 저자가 독자에게 밤중의 시간을 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투명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밤에라야 적나라하게 내면을 비출 수 있기 때문일까. 이렇게 민낯을 한채, 한껏 푸릇한 시어의 세계에서, 세상을 담은 마음의 조각들이 늘때마다 저자는 속엣말을 토해냈다. 관계와 대화, 독백으로써 끊임없이.

 

그러면서 문장이란, 한 사람의 독자를 향한 화살임을 고백한다. 저자가 쏘아올린 고백의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이를테면 이런 독백의 문장들이다.

당신의 시선이 머물 때 나는 무겁게 가라앉고 비로소 땅을 딛고 설 수 있다.” 수 백 번의 호의 보다 빚어 낸 문장의 온도를 함께 느껴줄 단 한 사람의 독자, 그들로 인해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다고 말한다. 작가로서 존재할수 있는 힘의 원천을 드러내며 글의 심지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가늠하게 하는 문장이다. 글을 읽다 보면 저자의 역사가 보인다. 정형화된 프로필과는 다른 내면의 역사다. 활자 사이에는 비집고 묻어있는 고유한 향기가 있다.

 

가슴속에 맴돌던 이야기를 삼키는 게 어른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른이 되어 보니 아니다. 일그러진 마음까지도 꺼낼 용기를 가질때이다. 미성숙한 어제는 안으로만 삭이며 혼자 이해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진짜 어른이 되는일은 드러내며 자신과 타인의 모난 구석까지 마주하며 받아들일 수 있을 때라고 말한다, 나날이 성숙해가는 관계를 꿈꾸는 저자의 마음이 드러난다.

 

한 존재를 발견한 뒤 차츰 시간은 그대로도 충분했던 서로에게 틈을 만든다. 그러면서 발명에 집중하게 된다. 저자는 상대의 좋은 점을 끊임없이 발견해가는 과정이 위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빛바랜 사랑은 어느샌가 넘치는 무언가 발명하기를 갈망한다.

더 이상의 발견거리를 만들지 못하는 사랑은 유효기간이 지났음을 선고한다.

발견과 발명, 이 간극이 사랑과 이별의 거리임을 저자는 말한다. 끊임없이 한 존재에 대한 의미를 발견해가는 과정을 통해 사랑은 무르익고 유지된다는 뜻일터이다.

 

오해를 이해라 믿으며 자신을 숨기고 보이는 것은 유추할 수 있는 단서 쪼가리에 불과할 뿐, 내면의 나는 감춘 채 살았던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젠 훌훌 털고 맨얼굴로 살고 싶다는 저자의 넋두리도 보인다. 무더위는 그림자까지 쓸고 가버리고 가을은 또 세월을 달고 온다. 여름을 보내면서 저자는 무심히 치달리는 시간을 또 아쉬워한다.

 

소리 내지 않으면, 부끄럽다고 아픈 표정을 숨기면 다시는 누구의 부축도 받을 수 없다는것을 저자는 알아버렸다. 마음을 솔직히 드러내 여기 있음을 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살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솔직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의무와 체면, 상황 때문에 나를 누르고, 정제된 모습의 나로 살아야 하는 것은 타인도 마찬가지다. 목울대를 누르는 책임감의 무게 앞에서 때론 벗어나고 싶은 본심을 그대로 뱉고 행동으로 옮긴다면, 오히려 만족감 이상으로 당혹감도 클 것이다. 타인도 하고 싶은 대로 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쌍방의 자유는 부딪힌다. 결국 나와 타자는 같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어떤 무게를 피하고 싶을 때는 반은 견디고 반은 호소한다는 기준이다. 그러다 보면 타인 또한 힘들어도 애쓰는구나라는 동지의식으로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함께 할 수 있으리라.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며 내 자유를 누리는 최선의 방식이 아닐까 한다.

 

저자가 생각하는 무르익는 세계란 끝엔 늘 몇 줄의 문장이 남겨진상황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숱한 새벽의 응답을 다시는 의심하지 않는다 라며 기도한다. 이렇게 저자는 타자와의 관계를 돌아보고 작가의 소명으로 끊임없이 문장을 엮겠다고 선언한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을 마주할 때가 있다. 환경이 변하고 시간이 흘러도 벗어 날 수 없는 일이다. 생을 연명하는 일과, 내 안의 목소리를 듣는 일, 이 두 가지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자는 한때 쓰는 삶이 세상에서는 청승이 되어버릴지 모른다라는 아버지의 충고에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쓰는 일이 '낭만'이라는 이유에서다. '낭만'을 사전에서 찾아 보았다.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라고 한다. 살기위해서는 필수인 경제적 뒷받침, '어쩔 수 없음'인 글쓰기는 불안정한 삶이라고 여긴다. 그런 연유로 딸이 안고 살지도 모를 경제적 곤궁까지 염려한 아버지 사랑의 표현 방식이었을 터이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걱정의 한 부분이다.

 

나는 늘 누군가 나를 발견할까 봐 두려웠고 막상 아무도 나를 발견해 주지 않으면 서러웠다.” 이 문장은 커티스 시튼펠트의 책에 나온다. 저자에게 영혼의 문장으로 다가와 영원의 문장이 되었다고 한다. 침잠한채 책을 좋아하고 쓰는 일로 희열을 느끼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모습임을 직감했다. 숨어있으면서도 발견되길 바라는 숨바꼭질의 기억, 아슬아슬한 술래처럼 영원을 견디는 심정이었을까. 깊은숨이 몰아치는 화살같은 문장이다.

 

그러면서 더 이상 가면 놀이는 하지 않겠다며 끊임없이 나다움을 찾아간다. 쓰는 기쁨, 그 이상의 즐거움을 찾지 못했다는 저자다. 천상 작가로서의 숙명이 유리창에 비친다. 내면 밑에서 문장으로 건져 올리는 고백에 저자는 점점 더 무르익은 과일나무가 되어간다.

그러다가 돌이켜 보면 언제나 모든 건 기적이었고 축복이었다.”라고 회상한다. 힘든 일도 시간이 지나면 아쉬움이 된다. 저자 또한 일상이 기적임을 자각한다. 나 또한 사랑하는 이를 만나 지금의 내가 있고,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오늘이 기적이다. 일상은 무수한 기적의 순간이 모여 평면으로 보일뿐이다.

 

쓴다는 건 읽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다. 저자는 기다리면서 어찌 쓰지 않겠냐 반문한다. 문장을 읽어줄 단 한사람의 독자를 기다리는 일은 쓰는 시간만이 가능하다. 저자는 이렇게 벗어날 수 없는 쓰는자의 허밍을 키보드에 싣는다. 밤으로 초대한 투명한 활자들이 유리창에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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