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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코 죽고 싶지는 않다.
나는 죽는 게 두렵다.
죽음을 처음 고민하고 마치 초연한 것처럼 생각하던 때는 96년의 사춘기였다.
종종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던 아이. 우울한 음악을 듣고, 존재에 대한 고민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 홀려 있던 바로 그 시기.
청소 시간이면 노을은 언제나 길게 교실로 들어왔다. 그때였던가. 나는 한번 4층인 교실 창 밖 난간으로 폴짝 뛰어내려간 적이 있다. 거기 떨어진 빗자루를 줍기 위해서였다. 빗자루를 창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에게 건네주고, 나는 밑을 한번 보았다. 난간 아래는 바로 운동장이었다. 순간, 아찔함이 엄습했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죽게 되겠구나. 다시 교실로 들어가려면 가볍게 점프해야 했는데, 두려웠다. 잘못 점프하면 그대로 밑으로 떨어지겠구나. 그럼 죽겠구나. 죽고 싶지 않다, 결코.
삶을 붙드는 것은 악착같은 것들이다.
노년이 되면 그 악착같음이 좀 사라질까 했다. 그렇지만 매해 거듭 나이를 먹어가면서 생각한다. 나는 점점 더 악착같이 변해가는구나. 스스로 생의 끈을 놓을 용기는 절대 갖고 있지 않다. 그게 바로 나라는 것.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
사람은 경험 덕분에 마음을 놓고 살아갈 수 있다.
어렸을 땐 새로운 경험이 많고, 설령 경험이 있다 해도 축적된 정도가 덜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되고, 그렇게 하여 앞일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경험해볼 수 없다.
그건 쌓이는 경험이 아니다.
단 한 번의 경험, 그리고 무.
너무 강렬하다.
두려워한다. 죽음을.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공포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아주 평범하게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겠지. 개별적인 인간에게는 그토록 거대한 일인데, 그러나 모두가 겪듯이 무심하고 평범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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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당신이 나한테 이런 모욕을 주고 싶어한 걸까? 왜 모든 걸 흔들어놓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끔찍했어? 놀라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야. 어서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잘 안 돼. 내가, 한 번도 당신을 의심해본 적이 없는 내가, 당신한테 뭘 물어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이제 당신 말은 한마디도 더 믿을 수 없게 됐어. 나는 당신이 다시 진실해질 수 있을 거라고 절대 믿을 수가 없어."(125)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값싸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수모를 겪는 걸 지켜보는 거라고. 거짓말은 아주 흔하지만, 당하는 쪽이 되어보면, 그건 정말 경악스러운 거야. 당신 같은 거짓말쟁이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은 수모를 겪게 돼. 그러다보면 마침내 당신도 그 사람들을 전보다 하찮게 여길 수밖에 없어, 안 그래?"(127)
많은 사람들이 그와는 달리 손자들을 둘러싼 대화를 온전하게 구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손자들의 존재에서 자신의 존재의 충분한 근거를 찾았다. 우연히 그들과 어울리게 되면 그는 이따금씩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느껴지는 외로움을 경험하곤 했다.(134)
그는 늘 안정에 의해 힘을 얻었다. 그것은 정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정체였다. 이제 모든 형태의 위로는 사라졌고, 위안이라는 항목 밑에는 황폐만이 있었으며,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이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135)
이틀 전 밤에 나한테 그러더군요. '너무 피곤해.' 그이는 살고 싶어했지만, 누가 무슨 일을 해도 그이를 더 살아 있게 할 수는 없었어요. 노년은 전투예요. 이런 게 아니라도, 또다른 걸로 말이에요. 가차 없는 전투죠. 하필이면 가장 약하고, 예전처럼 투지를 불태우는 게 가장 어려울 때 말이에요."(149)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충만함을 버리고 그 무한한 무(無)를 선택할 수 있을까? 나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냥 차분하게 누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까? 나에게 밀리선트 크레이머처럼 모든 것을 없애버릴 힘이 있을까? 그녀는 그와 같은 나이였다. 안 될 게 뭐야? 그런 곤경에서라면 몇 년 더 살고 덜 사는 게 무슨 대수겠어? 누가 감히 그 여자한테 경솔하게 생명을 버렸다고 다그치겠어? 나도 그래야 돼, 나도 그래야 돼. 그는 생각했다.(170)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강렬한 일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정말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삶이 끝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해왔지요. 내심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아니, 댁이 틀렸소." 남자는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저 여자는 늘 저랬소. 오십 년 동안이나 저랬단 말이오." 그는 절대 용서 못 할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저 여자는 자기가 이제 열여덟 살이 아니기 때문에 저러는 거요."(175)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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