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에로스와 타나토스. 이 둘처럼 한 몸인 것 같은 것들이 또 있을까.  

선하기만 한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 그건 명명백백한 일이다.  

팜파탈의 특징이 있다면 그건 죄책감이 근원적으로 없다는 것이다. 텅 빈 동공을 보라. 결정적인 시점에서, 그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빠르게 순환하는 피의 흐름만이 있을 뿐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 지극히 이타적인 것이다. 당신이 또렷한 발음으로 당신의 욕망을 이야기할 때, 상대방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다.

서슴없이 칼을 들어라. 그리고 가슴을 정확히 겨누길.  

사람들은 망설인다. 섶을 지고 불구덩으로 뛰어드는 건 아닐까,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런 걱정,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중간쯤까지만 가보고 끝까지 밀어부치지 못하는 자들이다. 유디트에게, 그런 나약함과 여림은 필요없다. 사랑은 극한의 욕망이다. 그건 죽음이고, 불꽃놀이이고, 영원에 대한 미련과 기대를 가차없이 버림으로써 비로소 획득한 영원이다.

  

   
 

"그랬구나. 세상은 재밌어. 진실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거짓말은 사람을 흥분시켜. 안 그래?"    

"나는 다 그래. 뭐든 지나간 일은 기억하지 않아. 영화도 나중에는 스토리가 다 뒤섞여버려. 본 비디오를 또 볼 때도 많아. 제목을 기억하지 않으니까."   

"너도 똑같구나. 그런 질문이나 해대고 말야. 넌 이해 못 해. 그리고 앞으로 이딴 거 묻지 마. 난 뭐 물어보는 인간들 질색이야. 질문이 많은 남자들은 숨길 게 많은 놈들이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면 될걸 꼭 남에게 묻는단 말야."   

"사람은 딱 두 종류야.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과 죽일 수 없는 사람. 어느 쪽이 나쁘냐면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나빠. (...) 누군가를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해."  

이제 그녀의 행방이란 알 바 아니라는 생각이 꿈틀거렸다. 어차피 그녀는 그의 삶에 틈입한 곰팡이 같은 존재였다. 건조하게 살았으면 생기지 않았을, 건물의 음습한 곳에서만 서식하는 그런 곰팡이처럼 그녀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 구석구석을 균열시켜놓았다.  <유디트>  

사람들은 누구나 봄을 두려워한다. 겨울에는 우울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봄은 우울을 더이상 감출 수 없게 만든다. 자신만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커지는 것이 당연하다. 겨울에는 누구나가 갇혀 있지만 봄에는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만이 갇혀 있는다. <에비앙>  

"생물이 화려한 색을 가지고 있을 때는 크게 두 가지 경우야. 누군가를 유혹해야 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때."  

"살아오면서 많은 남자들을 만났지. 그들과 자고 때론 함께 살기도 했고.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나를 견디지 못했어. 왜 그랬을까? 그리고 어째서 넌 날 견딜 수 있을까? 그 사람들과 넌 뭐가 다르지?" <미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코 죽고 싶지는 않다. 

나는 죽는 게 두렵다.  

죽음을 처음 고민하고 마치 초연한 것처럼 생각하던 때는 96년의 사춘기였다.  

종종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던 아이. 우울한 음악을 듣고, 존재에 대한 고민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것에 홀려 있던 바로 그 시기.  

청소 시간이면 노을은 언제나 길게 교실로 들어왔다. 그때였던가. 나는 한번 4층인 교실 창 밖 난간으로 폴짝 뛰어내려간 적이 있다. 거기 떨어진 빗자루를 줍기 위해서였다. 빗자루를 창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에게 건네주고, 나는 밑을 한번 보았다. 난간 아래는 바로 운동장이었다. 순간, 아찔함이 엄습했다. 여기서 떨어진다면, 죽게 되겠구나. 다시 교실로 들어가려면 가볍게 점프해야 했는데, 두려웠다. 잘못 점프하면 그대로 밑으로 떨어지겠구나. 그럼 죽겠구나. 죽고 싶지 않다, 결코.  

삶을 붙드는 것은 악착같은 것들이다.  

노년이 되면 그 악착같음이 좀 사라질까 했다. 그렇지만 매해 거듭 나이를 먹어가면서 생각한다. 나는 점점 더 악착같이 변해가는구나. 스스로 생의 끈을 놓을 용기는 절대 갖고 있지 않다. 그게 바로 나라는 것. 그리고 인간이라는 것.  

사람은 경험 덕분에 마음을 놓고 살아갈 수 있다.  

어렸을 땐 새로운 경험이 많고, 설령 경험이 있다 해도 축적된 정도가 덜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되고, 그렇게 하여 앞일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결코 경험해볼 수 없다.  

그건 쌓이는 경험이 아니다.  

단 한 번의 경험, 그리고 무.  

너무 강렬하다.  

두려워한다. 죽음을.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공포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아주 평범하게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겠지. 개별적인 인간에게는 그토록 거대한 일인데, 그러나 모두가 겪듯이 무심하고 평범하게 말이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당신이 나한테 이런 모욕을 주고 싶어한 걸까? 왜 모든 걸 흔들어놓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끔찍했어? 놀라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야. 어서 이 상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잘 안 돼. 내가, 한 번도 당신을 의심해본 적이 없는 내가, 당신한테 뭘 물어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내가, 이제 당신 말은 한마디도 더 믿을 수 없게 됐어. 나는 당신이 다시 진실해질 수 있을 거라고 절대 믿을 수가 없어."(125)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값싸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수모를 겪는 걸 지켜보는 거라고. 거짓말은 아주 흔하지만, 당하는 쪽이 되어보면, 그건 정말 경악스러운 거야. 당신 같은 거짓말쟁이들에게 배신을 당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은 수모를 겪게 돼. 그러다보면 마침내 당신도 그 사람들을 전보다 하찮게 여길 수밖에 없어, 안 그래?"(127)  

많은 사람들이 그와는 달리 손자들을 둘러싼 대화를 온전하게 구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손자들의 존재에서 자신의 존재의 충분한 근거를 찾았다. 우연히 그들과 어울리게 되면 그는 이따금씩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느껴지는 외로움을 경험하곤 했다.(134) 

그는 늘 안정에 의해 힘을 얻었다. 그것은 정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은 정체였다. 이제 모든 형태의 위로는 사라졌고, 위안이라는 항목 밑에는 황폐만이 있었으며,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이질감이 그를 사로잡았다.(135) 

이틀 전 밤에 나한테 그러더군요. '너무 피곤해.' 그이는 살고 싶어했지만, 누가 무슨 일을 해도 그이를 더 살아 있게 할 수는 없었어요. 노년은 전투예요. 이런 게 아니라도, 또다른 걸로 말이에요. 가차 없는 전투죠. 하필이면 가장 약하고, 예전처럼 투지를 불태우는 게 가장 어려울 때 말이에요."(149)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충만함을 버리고 그 무한한 무(無)를 선택할 수 있을까? 나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냥 차분하게 누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을까? 나에게 밀리선트 크레이머처럼 모든 것을 없애버릴 힘이 있을까? 그녀는 그와 같은 나이였다. 안 될 게 뭐야? 그런 곤경에서라면 몇 년 더 살고 덜 사는 게 무슨 대수겠어? 누가 감히 그 여자한테 경솔하게 생명을 버렸다고 다그치겠어? 나도 그래야 돼, 나도 그래야 돼. 그는 생각했다.(170)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강렬한 일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정말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단 삶을 맛보고 나면 죽음은 전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삶이 끝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해왔지요. 내심 그렇게 확신했습니다. "아니, 댁이 틀렸소." 남자는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단호하게 말했다. "저 여자는 늘 저랬소. 오십 년 동안이나 저랬단 말이오." 그는 절대 용서 못 할 것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저 여자는 자기가 이제 열여덟 살이 아니기 때문에 저러는 거요."(175)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1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붓다의 치명적 농담 + 허접한 꽃들의 축제 - 전2권
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마음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는 연약한 우리를 위한 서바이벌키트! 강추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붓다의 치명적 농담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別記
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서바이벌 키트 같은 것. 단숨에 읽어내려갔습니다 _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무도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고 있죠? 알면서 그러는 거죠.  

내가 말을 안 한다면 그건 못 하는 거잖아요. 말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것.  

하지만 당신이 침묵한다면 그건 안 하는 거잖아요. 알면서 안 하는 것.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내 마음은 비로소 편안해진다. 시간의 여백을 어떻게 채울지 몰라 늘 허둥대는 나에게 그럴싸한 핑계라도 생기는 것이다. 그 여백, 꼭 채우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그대로 있으면 되는데, 어리석게도.  

기삿거리를 찾아야 한다.  

뭔가 써야 한다.  

그러나 '얘기 되는' 것들을 찾아야 하는, 그런 것들만 써야 하는 기사의 이면에 우리 생의 진실이 있다. 대부분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드러내야 하고, 기삿거리도 못 될만한 소소한 일상의 아픔은 가차없이 잘라내버려야 하는 것은 기자의 아픔이다. 뻔한 얘기지만, 기자도 사람이다. 생이 기사처럼 기승전결로 구성되거나 꼭 센세이셔널하지만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쓰이는 것 이면에 더 많은 이야기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좀 말하지 않을 수 없을까.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것에 대해 좀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야, 장기매매 같은 건 기사 쓰지 마. 내가 다 갚을게. 넌 쓴 기사보다 안 쓴 기사가 더 좋다. 그게 더 진실돼. 안 그래?  

-야, 길게 쓰지 마. 지방판 2단이야. (...) 그리구 너두 쉬어. 거기서 쉬라구. 

(...) 서북경찰서 야간 당직사건 중에는 기삿거리가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