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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 현암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사회성은 이 모든 것에 대해 타인에게 능동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_리처드 세넷, <투게더> 중
믿는다는 건 판단이 아니고 일종의 의지다.
사랑이나 헌신처럼 우선 그냥 건네주는 것이다.
예수의 손에 난 못자국을 만져보고야 믿는 행위는 지극히 인간적이지만
굳이 거대한 종교적 결단이 아니어도 우리는 선뜻 먼저 타인을 믿을 수 있다. 아니, '믿어줄' 수 있다.
그것은 타인이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기본적인 전제,
세상의 따뜻함을 피부로 느끼는 듯한 감각에서 나온다.
거리에 나서면 사정없이 뒤통수를 맞고 눈 뜨고 코 베일 위험을 단단히 대비한 채 시도때도 없이 자기방어를 해야 하는 세상과
쉽게 마음을 내려놓고 커피하우스에서 낯선 사람들과 캐주얼하고 솔직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세상은 분명 다를 것이다.
'신뢰의 도약Leap of Faith'이라든가 '불신의 자발적 유예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라는 표현은 내가 좋아하는 표현이다.
증거를 다 수집하지 않고도 믿어줄 수 있는 마음,
내부집단이 아닌 낯선 사람에게 기꺼이 다정할 수 있고 열려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기술이 이 책에 들어 있다.
그런 기술 중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무조건적인 '공감'이 아니라 나와 다른 타인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나와 다른 상황에 처한 타인의 상태는 어떨지 상상해보는 '감정이입'이 더 친절한 방식일 수 있다는 언급이었다.
공감은 고통스러워하는 당신 때문에 '내가 마음이 아프다'에 초점을 맞추지만
"아, 당신은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군요."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점이 나랑 다르군요."라고 말함으로써 나는 먼저 견고한 나(ego)를 벗어나 그쪽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할 수 있다.
함께여야만 한다고 무조건 끌어들이는 연대는 폭력적일 수 있는데,
일단은 상대방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원하고 있을지 먼저 상상해야 한다. (당연한 거지만 실천하긴 어렵다.)
그래서 호기심과 상상력은 중요하다. (그러니까 예술을 일상적으로 누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음악을 듣고, 소설을 읽고, 춤을 추고, 아무런 쓸데없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면서 살아야 우린 서로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모두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사회과학서지만 뭐랄까 굉장히 아름다운 책이었다. 마음속에 번쩍번쩍 섬광이 꽂히는 느낌.
복잡한 사회는 상이한 민족성, 인종, 종교를 담아내며, 다양한 방식의 성적인 결합 혹은 가족 유형을 만들어낸다. 이 모든 복잡성을 하나의 단일한 거푸집에 밀어넣는다면 정치적인 억압이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게 만든다. `자아`란 좀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감정, 소속감, 행동의 복합물이다. 부족적 통일성을 요구하는 행동은 모든 경우에 이 개인적 복합성을 축소시킬 것이다. _24
현대사회는 새로운 성격 유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차이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불안감을 줄이려는 성향을 가진 인물형이다. 정치적이든, 인종적이든, 혹은 종교적이든 민족적이든 심지어 에로틱한 것에 이르기까지 어떤 분야에서의 불안감도 모두 해당된다. 이런 새로운 인물 유형의 목표는 흥분을 피하고, 심각한 차이가 도발하는 자극을 최대한 느끼지 않는 것이다. 퍼트넘이 말하는 움츠러들기(withdrawal)는 이런 도발을 줄이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하지만 취향의 획일화도 그러한 방법 중 하나다. 문화적 획일화는 현대의 건축, 의상, 패스트푸드, 대중음악, 호텔 등 세계화된 것들의 끝없는 목록에서 뚜렷이 보인다. "누구나 기본적으로는 똑같다"는 말은 중립성을 추구하는 세계관의 표현이다. 차이를 중화하고, 그것을 길들이려는 욕망은 차이에 대한 불안감에서 솟아난다. 그런 불안감이 전 세계적인 소비자 문화의 경제학을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고집스럽게 타자로 남아 있는 사람들과 협력하려는 욕망의 약화 현상으로 나타난다. _31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알게 된다면 삶이라는 게 참을 수 없이 빡빡해지지 않을까. 세심하게 들여다볼 떄도 그렇지만, 무심한 대화가 의미 있는 만남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기술이 필요하다. 단언하는 태도를 삼가는 것은 서로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규칙이다. _54
사회성은 이 모든 것에 대해 타인에게 능동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함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성은 연대와 대비된다. _76
윈-윈 교환은 협상을 시작할 때 사람들이 예상하는 소득과 손해를 깔끔하게 정리한 목록이라기보다는 결말이 확정되지 않은 과정인 경우가 더 많다. 가령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예측 불가능하게 팽창하는 시장에 의존한다. (...) 이 거래의 많은 부분을 지배한 것은 환상이었다. _136
19세기에 공공 생활은 언어적인 것이에 시각적인 만남으로 이동했다. 1848년에 파리의 거리나 카페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 않는 한 함부로 말을 걸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자신도 방해받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새로운 종류의 방어법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이 곁에 있는 상태에서 혼자 침묵을 지키는 낯선 사람들은 상대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계약을 맺었다. 시선이 목소리의 자리를 차지했다. 도시의 산책자는 주위를 둘러보았고(이 산책자는 주로 남성이었다), 자신이 본 것에서 자극을 받았으며, 이런 인상들을 집으로 가져갔다. 18세기의 여행자가 19세기에는 관광객으로 바뀐 것도 이와 동일한 변화였다. _141
협력에 못지않게 경쟁도 처음 수태되는 과정에서나 본성 측면에서나 상징적이다. 뿐만 아니라 경쟁은 협력에 의해 틀이 짜인다. 참여자들이 처음 경쟁을 시작할 때 규칙에 동의하려면 협력해야 하기 떄문이다. 승자는 경기가 계속되도록 하려면 패자들에게도 생존의 여지를 남겨주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적으로만 군다면 새로운 경기는 열리지 못한다. _148
게오로그 짐멜은 한때 상호 신뢰에는 믿음(faith)의 도약이 필요하다고 서술한 적이 있다. 신뢰란 "지식 이상의 것이기도 하고 이하의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와 상대할 때 무슨 일이 생길지 정확하게 안다면 신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_247
몽테뉴는 허영에 관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쓴다. "우리 자신은 불만으로 가득 찬 물건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비참함과 공허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것은 루터식의 고뇌에 찬 자기 투쟁이 참여하라는 조언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를 낙담시키지 않기 위해 자연은 매우 편리하게도 우리의 시각을 바깥으로 돌려놓았다." 호기심은 우리가 자신을 넘어서 바라보도록 "격려"할 수 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나온 말이지만, 바깥을 내다보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에게 반영된다고 상상하거나, 사회 자체가 거울의 방처럼 만들어졌다고 상상하는 것보다는 더 나은 사회적 연대를 제공한다. 하지만 밖을 내다보는 기술은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몽테뉴는 공감보다는 감정이입이 가장 중요한 사회적 덕성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작은 시골 영지에서의 삶에 대해 기록한 글에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습관과 취향을 이웃이나 노동자들의 그것과 비교한다. 물론 그는 유사성에도 흥미를 가졌지만 특히 그런 습관과 취향의 차이에 주목했다. 함께 어울리기 위해서는 모두 서로 간의 차이와 부조화에 신경을 써야 한다. _439
20세기는 연대의 이름을 내걸고 협력을 왜곡했다. 통합의 이름을 내걸고 발언했던 체제들은 독재체제에만 그치지 않았다. 연대에 대한 욕구, 바로 그것이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명령과 조작을 끌어들였다. 이것이 칼 카우츠키가 정치적 좌파에서 사회적 좌파로 넘어가면서 배운 쓰라린 교훈이었다. 그 이후에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교훈을 배우게 된다. 나와 너의 대립이라는 적대적인 형태를 가진 연대의 사악한 위력은 자유민주주의 시민사회에서도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_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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