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6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서은혜 옮김 / 민음사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라쇼몽(나생문)>은 인간 생존의 본능과 도덕성의 붕괴를 극도로 압축된 형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작품은 천재지변과 기근으로 황폐해진 헤이안 시대의 교토, 붕괴해 가는 '라쇼몽' 밑에서 한 하인이 비를 피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하인은 도둑이 될 것인가, 굶어 죽을 것인가의 기로에서 고민한다. 

하인은 루 위에서 죽은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아 가발을 만들려는 노파를 발견하고 분노한다. 그러나 노파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자, 하인 역시 "나도 살기 위해 네 옷을 빼앗겠다"며 노파의 옷을 강탈해 밤 속으로 사라진다. 


인간의 악한 본성을 폭로하는 방식이 다소 작위적이고 극단적이다. 하인의 심리 변화가 노파의 말 한마디에 의해 순식간에 반전되는 과정은 극적 구성력을 높이지만, 인간 심리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라쇼몽>은 인간의 이기주의와 근대적 실존의 위기를 해부하려 한다. 


노파와 하인의 행동은 '생존'이라는 절대적 명분 앞에 모든 도덕과 규범이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보여준다. 악을 행하면서도 이를 "어쩔 수 없다"고 정당화하는 인간의 위선까지 고발 한다. 


붕괴한 라쇼몽과 시체로 가득한 루 위는 질서가 사라진 사회적 혼란을 상징한다. 이는 작가가 살았던 근대 전환기의 불안감과도 맞닿아 있을 것이다. 


작품은 도덕적 대안이나 구원의 가능성을 전혀 제시하지 않는 철저한 허무주의(Nihilism)에 갇혀 있다. 인간을 오직 생존 본능에만 종속된 존재로 침전시켰다는 점에서 비관주의적 한계가 뚜렷하다. 


원본 소설보다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흑백 영화로 각색되어 공개된 줄거리가 대중들에게는 훨씬 더 잘 알려진 작품이다. 영화는 차라리 소설보다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극적인 심리변화와 그 불가해성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가 더 인정받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화하는 종교 - 화이트헤드의 종교론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지음, 김희헌 옮김 / 대한기독교서회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화이트헤드의 책 <진화하는 종교>는 종교를 고정된 교리나 제도가 아닌, 우주적 진화 과정과 인간 내면의 성숙에 맞물려 변화하는 ‘형성과정’ 의 차원에서 파악한 저술이다. 


화이트헤드에게 종교란 본질적으로 개인이 자신의 고독 속에서 우주와 맺는 관계이다. 그는 종교를 "종교란 개인이 자신의 고독을 가지고 행하는 무엇이다"라고 정의하며, 이는 타인과의 관계 및 윤리적 실천으로 확장해 나간다. 


저서에서 종교의 진화는 의식(Ritual), 감정(Emotion), 믿음(Belief), 합리화(Rationalization)의 4단계를 거친다.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형태에서 시작하여, 점차 우주적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고차원적 사유로 진화해 나간다는 주장이다. 


종교는 진화하면서 그 시대의 철학과 과학적 세계관을 수용하며 합리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인데, 저자는 맹목적인 교리나 독단주의를 배격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유연하고 지성적인 종교관을 제시한다. 


내용 전반에 걸쳐 정적인 실체(Substance)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생성하고 변화하는 과정(Process)의 개념을 종교에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종교를 인간만의 내면적 문제에 한정하지 않고, 우주 진화 및 거시적인 형이상학적 체계 속에서 통합적으로 사유하도록 유도하는 독창적인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문장이 지나치게 함축적이고 유기체 철학 특유의 전문 용어가 빈번하게 등장하여 일반 독자가 해독하기에 매우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종교의 발전 단계를 '합리화'라는 틀로 재단하다 보니, 동양 종교나 신비주의적 종교 전통에 대한 왜곡된 평가가 일부 발견된다. 예컨대 불교를 "형이상학이 만든 종교" 혹은 "도피주의적 종교"로 과도하게 단순화한 것은 충분히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 


핵심은 종교를 정적인 제도가 아닌 '인류 성품과 함께 진화하는 세계의식'으로 바라보게 하는 새로운 철학적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브게니 오네긴·대위의 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3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최선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의 주제는 "명예는 젊어서부터 간직하라"는 것이다. 주인공 그리뇨프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군인으로서의 지조와 인간적 명예를 지키는 인물로 그려잔다.


푸시킨은 '희대의 반란군 우두머리' 푸가초프를 단순히 악인으로 그리지 않고, 은혜를 잊지 않는 의리와 고뇌를 가진 입체적 인물로 묘사하며 휴머니즘적 시각도 보여준다. 


책은 사실주의적 고증을 바탕으로 18세기 러시아 사회의 모순과 귀족-민중 간의 관계를 생생하게 재현했다.


그리뇨프가 눈보라 속에서 푸가초프를 도와주고 훗날 목숨을 구함받는 '토끼 털외투' 일화처럼, 우연한 선행이 운명을 바꾸는 전개는 사건을 흥미롭게 만드는 친숙한 구조이다. 


화려한 수식어보다는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여 사건 전개가 빠르고 유쾌하게 읽힌다. 이는 당시 러시아 산문 문학의 새로운 흐름의 시작으로 평가받는다.


제목의 주인공인 마리아(대위의 딸)는 수동적인 여인상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이를 구하기 위해 직접 여제를 찾아가 무죄를 호소하는 용기 있는 인물로 묘된다. 


푸시킨은 작품을 통해 강제와 폭력에 의한 혁명보다는 인간적인 도덕성과 점진적인 변화를 옹호하는 보수적 자유주의 사상을 피력했다.


또한 절대 권력자인 예카테리나 2세와 반란군 지도자 푸가초프 모두를 주인공의 조력자로 설정함으로써,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선 통찰까지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역사적 기록물을 예술적 산문으로 승화시킨 명작으로, 오늘날에도 "러시아 문학의 정수"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사자의 서 - 한국인을 위한 영계 가이드북 최준식 교수의 종교.영성 탐구 2
최준식 지음 / 주류성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준식 교수의 <한국 사자의 서>는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적 맥락에 맞춰 사후 세계를 탐구한 독보적인 시도이다. 죽음학의 선구자인 저자가 티베트나 이집트의 사례가 아닌 '한국인을 위한 가이드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존의 죽음 담론이 '티베트 사자의 서'를 비롯한 외래 종교나 서구의 임사체험 연구에 의존했다면, 이 책은 한국인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유교, 샤머니즘, 불교적 요소를 통합하여 한국인에게 익숙한 영계 모델을 제시한다.


사후 세계를 추상적 관념이 아닌, 죽음 직후 겪게 될 구체적인 환경과 대처법으로 서술하여 '실용적인 영계 안내서'로서의 성격이다. 


죽음을 두려움이나 회피의 대상이 아닌, 삶의 완성 단계로서 준비해야 할 과정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국내 죽음학(Thanatology) 연구를 대중화하는 시도이다. 

또한 초심리학, 근사 체험 사례 등을 결합하여 과학과 영성 사이의 접점을 찾고 있다. 


임사체험 등 주관적 경험에 기반한 논의가 많아, 엄격한 과학적 실증주의 관점에서는 형이상학적 추론으로 비칠 여지가 있기는 하나, '사념이 곧 현실이 되는 사후 세계'라는 설정은 저자의 종교적·영적 통찰이 깊게 투영된 것이므로, 독자의 신념 체계에 따라 수용 정도가 크게 갈릴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자의 서>는 죽음을 삶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잘 죽는 법(Well-dying)'을 고민하게 하는 지침서로서, 한국 현대 죽음 담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성취로 보아야 한다. 


결국 윤회나 사후세계를 믿고 안 믿고는 개인 선택의 자유이나, 그것을 믿고 사는 사람은 더욱 풍요롭고 의미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죽기 전에 누구나 한번쯤 읽어야 할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