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상실은 우리를 피해 가지 않고 혼자 남은 밤은 길다. 내 슬픔을 그대가 알아주기를 바라다가 제풀에 지치고, 그걸 말 안 하면 모르나 하고 서러워하다가, 말해도 모르는데 말 안 하면 더 모른다는 깨우침을 얻고서, 남이 알아주길 바라지 말고 내 마음 나부터 알아주자는 데 이른 어른스러운 해결책이 내겐 글쓰기다.
글쓰기는 이런 일을 한다. 지나간 시간을 되돌리고 나를 둘러싼 사람을 오래 들여다보도록 북돋운다.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을 만든다.
자신의 게시글에 달리는 여러 댓글에 기운을 얻어서, 피곤한데도 밤마다 글을 쓸 수 있었다고 말했어요. 그때 받은 칭찬이 너무 좋았다고 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또 한 번 느꼈죠. 우선은 내가 글을 써야 독자가 생기겠지만, 읽어주는 사람, 즉 독자가 있으면 글을 쓰게 된다는 사실을요. 이렇게 남은 나를 쓰게 합니다.
잘 쓴 글을 보고 기죽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이다.그러니 기죽는다는 사실엔 기죽지 말고,내가 기죽었다는 사실을 글로 써보자.그게 글 쓰는 사람의 임무다.
글쓰기에 대해 말하는 자리에서 꼭 강조하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공적 글쓰기를 하세요"입니다. 공적 글쓰기는 독자를 염주에 둔 글쓰기라는 뜻이죠. 나를 전혀 모르는 생판 남이 읽어도 이해가 가능한 글, 불특정 다수가 무리 없이 이해하는 글이요.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쓸거리가 계속 생겨나는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써야 할지, 남들이 읽고 싶어 하는 글을 써야 할지가 과연 선택의 문제일까요? 글쓰기란 내가 쓰고 싶은 글을 남이 읽고 싶게 쓰는 것, 이 두 가지를 조합시키는 부단한 노동이라고 생각해요.
퇴고를 안 하는 건, 그림을 그리면서 밑그림만 그리고 채색을 안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얼마 전에 농인은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수어를 제1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배웠어요. 어떤 존재를 결핍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나은 정의라고 여겼습니다.
글을 쓰지 않는 사람에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변신하고 싶다면 이미 하던 활동에서 무언가를 빼야 해요. 그리고 글쓰기를 1순위에 놓는 거죠. 즉, 시간 안배부터 다시 합니다.
정라 하자면, 글쓰기 전과 후 가장 달라진 점은 크게 두 가지네요. 저 나은 내가 되려고 노력하게 됐다는 것, 타인을 존중하게 되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