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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노동자의 모험 -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
배명은 외 지음 / 구픽 / 2024년 2월
평점 :
무려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이다. 실린 작품은 다섯 작품인데, 기발하고, 아릿하고, 묵직하고, 깊이 생각에 잠기게 된다. 어떤 작품은 그 이야기가 무엇을 모티프로 했는지 모르지 않으니 재밌다고 말해도 되나 싶은데... 그럼에도 정말 재밌는 책이기도 하다. 뭐 하나 뺄 작품이 없다.
각 작품마다 무게감은 조금씩 다르고, 지향하는 방향도 다르지만 그만큼 색깔 또한 분명하게 달라서 읽는 즐거움이 더 있었다. "노조 상근자가 여주 인생 파탄 내는 악녀로 빙의함"처럼 로판의 장르 문법을 잔뜩 움켜쥐고 뭉개버리는 소설도 있고, "슈퍼 로봇 특별 수당"처럼 SF도 있어서 이 단편선의 작품 개성이 명확히 드러난다. 물론 출판사 작품 소개처럼 "살처분"이 미스터리인가, 또 "삼도천 뱃사공 파업 연대기"가 호러인가에 대해선 의문이 좀 있지만, 장르 소설로써 분명한 정체성이 없더라도 그 소설들이 재미 없냐면 절대 아니다. "삼도천 뱃사공 파업 연대기"에서 망자들이 '아침이슬' 부르는 장면에서 도저히 안 뒤집어질 수가 없다.
이 단편선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실린 작품들 중 많은 수가 노동 운동에 무관심했거나, 무지했던 이들이 외부의 어떤 충격을 받고 각성하는 순간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인데 참혹한 노동 현실에서도 노조 조직률이 15%도 안 되는 현실에 대한 기원적 발현인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노조', '파업'하면 나라 망칠 빨갱이짓, 혹은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이기주의자로 치부하는 현실에 대한 거부감 때문인 것 같기도 한데, 이걸 가장 처절하고 낱낱이 밝히는 작품이 "노조 상근자가 여주 인생..."인 것 같고, 가장 마음 아프게 만드는 작품이 "슈퍼 로봇 특별 수당", 가장 유쾌하게 고발하는 작품이 "삼도천 뱃사공 파업 연대기"인 것 같다.
"삼도천 뱃사공 파업 연대기"는 진짜 이 단편선의 시작을 여는 작품으로 잘 배치된 작품. 이 단편선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를 자아내는데 적합한 유머와 위트를 가지고 있다.
"카스테라"는 이 단편선의 흐름에서 정말 중요한데, 환상적인 면모와 함께 정말 예쁜 작품이라 여기서 좀 숨 쉬지 않으면 "노조 상근자가..."에서 숨 참다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바로 이 작품 뒤에 "노조 상근자가..."와 "슈퍼 로봇..."이 쉴새없이 몰아친다. 그렇다고 "카스테라"가 쉬어가는 의미로만 의미 있다는 뜻이거나, 이 작품이 가볍다는 뜻은 아니고 이 작품에서 묘사되는 제빵 기사의 근무 환경이나 현실이 너무 잘 그려진데다 너무 시의적인 것이라 무거울 수밖에 없는데도 은림 작가가 만들어낸 효이 씨 가게에 대한 추억, 그 추억으로 이어가고 있는 주인공의 바람, 결국 다시 만들어낸 추억보다 더 아름다운 공간이 진짜 현실에서 꼭 이런 가게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는 예쁜 것이라 그래도 마음이 놓인다는 뜻이고.
"노조 상근자가..."는 그냥 읽어봐야 한다. 로판 배경의 이면을 비집고 들어가 멱살 잡고 현실로 이끌어낸 대단한 작품.
"슈퍼 로봇 특별 수당"은 민가협 활동가들도 생각나고,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도 생각나서 진짜 울 수밖에 없고. 활동가로 변신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한 유가족 분들이 느낀 감정의 편린이 이 소설의 뒷맛에 남는데, 그 편린만으로도 마음이 너무 막막하다.
"살처분"은 이 단편선에서 좀 이질적인 작품인데, 어떤 각성의 순간을 다루고 있다기보다 농촌의 현실에서 이주 노동자와 경찰 간의 생경한 연대, 그런데 그것이 연결되는 지점이 정말 한국적. 그리고 이 이주 노동자의 현실은 나같은 서울 태생의 도시민으로만 쭉 살아온 한국인들에게는 기사로나 접해볼 만한 것이어서 '부녹란' 씨의 존재는 진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캐릭터였다.
이 단편선이 좋았던 건 작품 흐름이기도. 유쾌하게 시작해서 환상에 가까운 희망을 안겨 주다가도 묵직하고, 처절한 펀치를 때리다가 전혀 다른 두 존재의 연대와 공감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마무리하는 흐름과 배치는 진짜 훌륭했다. 이 책 독서 모임에서 꼭 읽고 싶었는데, 언젠가는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