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험인간 - 불신과 불공정, 불평등이 낳은 슬픈 자화상
김기헌.장근영 지음 / 생각정원 / 2020년 3월
평점 :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시험이야말로 부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평등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입에서 수시보다 정시를 선호하는 것도 그런 영향이다. <시험인간>은 '시험공화국'이 되어 버린 한국 사회의 모습, 시험이 한없이 공정한 시스템이라는 명제에 대한 반박, 그리고 탈시험사회를 향한 전망을 다루고 있다. 뒷표지의 추천사에서 말하듯 지금의 한국은 시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라고 봐도 무방하다. 원어민 교사가 영어로 수업을 하는 영어유치원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어떤 영어유치원들이 레벨 테스트를 통해 원생들을 걸러낸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지금은 유치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도 시험을 거쳐야만 하는 시대인 것이다. 2020년 3월 현재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토익 시험이 연달아 취소되고 있다. 취업준비생들이 대학 졸업, 공인시험 응시, 사기업 입사 등 토익 점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점수를 제때 제출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시험 하나가 취소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은 그만큼 그 시험의 위상이 높다는 것을 증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국 시험의 문제점은 단지 그 횟수가 많은 것뿐이 아니라고 한다. 유네스코는 시험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며 진학이나 채용과 같이 중요한 일에 활용되는 비중이 높은 시험을 고부담 시험이라고 정의했다. 즉 시험을 자주 본다 하더라도 그 시험들이 그저 학생의 학습량을 파악하기 위한 시험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의 시험들은 대다수가 고부담 시험이다. 학교에서 보는 작은 쪽지시험 하나도 성적에 반영되고, 그 성적이 곧 대입에 활용되기 때문에 작은 시험 하나도 허투루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고부담 시험은 학습자들을 금방 피로하게 만든다. 시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나 압박감 때문에 학습에 집중할 수 없는 학습자들도 많다. 위에서 언급한 토익 역시 표면적으로는 영어 듣기 능력과 읽기 능력을 진단하는 시험이지만 본인의 영어 듣기와 읽기 실력이 궁금해서 토익을 치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토익 시험을 치는 사람들의 목표는 어떻게든 점수를 잘 따는 것이다. 실제로 유명한 토익 학원에서는 문제를 잘 찍는 법까지 강의하기도 할 정도이다.
한국인의 생애에서 고부담 시험에 맞닥뜨리는 횟수가 많다 하더라도, 정말 모든 시험이 공정하고 객관적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면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시험은 정말 공정하고 객관적일까?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1990년대 미국 교육부가 시행한 초기 아동 장기 종단연구에 따르면, 부모가 아이에게 매일 책을 읽어주는 것보다 집에 책이 많은 것이 아이의 성적에 훨씬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는 변인이라고 한다. 같은 연구에서 부모의 교육 수준과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것, 첫아이를 출산한 시점에서 엄마의 나이가 30세 이상인 것이 아이의 성적에 유효한 변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즉 부모가 아이에게 어떠한 행동(책을 읽어 주는 것)을 하는지가 아니라 부모가 어떤 사람(교육 수준과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으며, 그러므로 집에 책이 많은 사람)인지가 아이의 성적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부모 밑에서, 어느 지역에서 태어나는지에 따라서 다른 출발선에 서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시험이 모든 이들의 능력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허상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시험의 존재를 다른 무언가가 대체할 수 있을까? <시험인간>은 시험의 대안에 대해 상상해 본다. 북유럽이나 뉴질랜드, 일본의 예를 들며, 한국 사회가 교육과 채용 분야에서 시험이 아닌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저자는 시험의 효과와 장점에 대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 만능주의로 돌아가는 사회에 대해 비판한다. 이 책이 시험 만능주의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런 일이 당장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가 정말 우리의 삶을 시험 결과에 맡겨 두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갖가지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