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대혼돈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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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내가 읽은 책들 중에 가장 어려웠던 것 같다. 확실히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단은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보곤 했다. 하지만 그만큼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의 만족감은 상당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문제들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견해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철학 세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말이 많은 걸로 안다. 어떤 사람들은 지젝을 두고 있어 보이는 말만 할 뿐 내실이 없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젝이 스타, 이슈메이커로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새롭고 강렬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는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일단 많은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나면 공론장이 커진다. 공론장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열리게 되면 더 새롭고 의미 있는 담론들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하여튼 지젝은 이 책에서도 온갖 주제를 망라하며 스스로의 견해를 펼쳐 낸다. 읽다 보면 비교적 상식적인 이야기도 있고, 이건 너무 급진적이지 않나 싶은 이야기도 있지만 확실한 건 일단 이 책은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어려우면서도 재미있는 책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을 전부 소개할 수는 없으니, 읽는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기 쉬운 글 한 가지만 짧게 소개해 볼까 한다. 섹스 봇(섹스 로봇)에 대한 이야기다. 인공지능 관련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섹스 로봇에 대한 논쟁 역시 뜨거워지고 있다. 다양한 논점들 중 대표적인 예시를 들어 보자면, 다른 로봇과 마찬가지로 '섹스 로봇에게도 인권이 있는가?' 그리고 거기에서 연결되는 '섹스 로봇을 학대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가?'와 같은 이야기가 있겠다. 지젝 역시 섹스 로봇 이슈를 언급한다. 이 이야기는 한 행사에서 섹스로봇이 학대당하고 심하게 망가진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인공지능을 지닌 섹스봇의 위상을 둘러싼 논쟁에 걸려드는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섹스 로봇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합당한 근거는, 섹스 로봇이 인간과 같은 자율성과 존엄성을 가지고 거기에서 오는 특별한 권리를 부여받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섹스 로봇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로봇이 실제로 고통을 겪고 슬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들이 경계하는 건 '우리 인간의 문제적인 공격적 욕망, 환상, 쾌락'이다. 최근 온라인 상에서는 다른 사람이 만든 눈사람을 부수는 행위에 대한 갑론을박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 눈사람을 부수는 게 뭐가 문제가 되냐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눈사람을 부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후자의 사람들이 눈사람이 아플까 봐 걱정되어 눈사람을 부수는 행위를 경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저항할 수 없는 대상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섹스 로봇 이슈도 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책의 후반부를 보면, 지난 2020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19의 창궐이라는 거대한 사건 때문에 전 지구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여러 담론들이 거기에 자리를 내 주었다는 언급이 있다. 지젝은 그 이야기를 하며 환경운동가인 그레타 툰베리와 정치가 버니 샌더스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크나큰 바이러스 위기 시국에 맞춰 그들의 활동을 전개할 정도로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한 번에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내용이었지만, 지젝은 이렇게 말한다. "감염증은 우리가 자연환경과 맺고 있는 불균형한 관계의 일부로 폭발한 것으로서 단순히 건강 문제에 불과한 게 아니다." , "따라서 현재 우리가 대처하고 있는 위기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동력학의 계기들로 분출한 것이다." 확실한 건 바이러스 시국에 와서 더 불거질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당장 한국에서도 자가 격리가 강하게 권고되는 와중에 지낼 곳이 없는 사람들이나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취약계층에 대한 조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감염증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에 더 크게 타격을 받는 것 역시 사회적 약자들이다.

위에서 소개한 글 외에도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담론들이 소개된다. 기후 변화, 우파 포퓰리즘, 종교 비판,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 마르크스주의 등 정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보았거나 생각해 볼 만한 주제들이다. <천하대혼돈>은 책 제목처럼 '천하대혼돈'이라 할 만한 요즘 시대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읽어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고두고 여러 번 읽어도 의미가 깊은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독서 토론이나 독서 모임에 활용하기에도 적절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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