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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세계
톰 스웨터리치 지음, 장호연 옮김 / 허블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사라진 세계>에는 온갖 매력적인 소재가 등장한다. 시간 여행, 세계 종말, 멋진 여성 수사관, 그리고 낯선 행성까지. 그리 드물거나 아주 특별한 소재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 흔하다면 흔할 소재들을 엮어서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이 작가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나가듯 언뜻 나왔던 장면이 이후에 전개될 내용에 딱 들어맞을 때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주는 재미에 감동을 받으며 연신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내용을 크게 누설하지 않는 한도에서 간단하게 내용을 설명하자면, 작중에서 인류는 먼 미래로 예정되어 있었던 인류의 종말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는 사실과 맞닥뜨린다. 시간 여행을 떠났다가 그 종말을 목격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그 중 어떤 이들은 잔혹한 범죄를 저지른다. 주인공인 섀넌 모스는 그렇게 시간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이들이 관련된 사건들을 조사하는 특별수사관이다. 어느 날 섀넌은 어떤 일가족이 살해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떠난다. 용의자는 가족 중 남편이자 아버지로, 미래로 떠났던 전함 <리브라> 호에 탑승한 적이 있었지만 섀넌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현재는 그 리브라 호의 행방 자체를 알 수 없는 상태이다. 섀넌은 일가족 중 유일하게 사체가 발견되지 않고 실종된 소녀, 매리언 머설트의 행방과 사건의 뒤에 숨겨진 비밀들을 찾기 위해 시간 여행을 떠난다.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섀넌은 점점 근미래로 다가오는 인류의 종말이 이 살인 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종말이라는 압도적인 절망에 맞서 싸우게 된다.
시간 여행을 다룬 이야기들 중 어떤 것들은 독자를 잘 이해시키지 못한다. 설정이 치밀하지 않고 구멍이 있을 경우에 흔히 그렇다. 게다가 시간 여행은 현실에서 (아직까지는)불가능하기 때문에 작가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생기는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해결해야 한다.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지만 <사라진 세계>의 시간 여행에는 철저한 규칙들, 그리고 우선 순위가 있다. 거기에 혼란은 존재하지만 그 혼란이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누설하지 않는 한도에서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이 세계에서는 미래로 시간 여행을 떠나 복권의 당첨 번호를 보고 과거로 돌아오는 행동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복권 번호는 공개되어 실체를 드러나기 전까지는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인공인 섀넌이 미래로 떠나는 동안 섀넌이 출발한 현재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 여행자는 미래로 여러 번 떠났다 돌아오면서 서류상의 나이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게 된다. 그렇게 치밀하게 짜인 설정들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이 소설의 재미를 더한다.
소설의 맨 앞장에 있는 추천사들을 보면 '섀넌 모스는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강력한 수사관이지만 동시에 쉽게 상처 받는 공감능력이 뛰어난 여성'이라는 말이 있다. 확실히 섀넌은 강하면서도 다정하고, 타인에게 공감하고 타인을 동정할 줄 알지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판단하는 법 역시 안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에는 상처를 간직하고 있어 한없이 흔들리기도 한다.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인간적인 주인공이면서도 믿고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든든하다. 섀넌은 나를 포함해 일반적인 소설 독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초인이지만, 섀넌이 맞서 싸워야만 하는 사건은 때로 초인조차 무력해 보이도록 만들고 절망하게 하는 거대한 존재다. 그럼에도 그 절망을 막으려고 분투하는 개인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섀넌의 다른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재미있을 것 같지만, 섀넌이 시간 여행에 계속 시달리는 것보다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라진 세계>는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두꺼운 책인데도 정신 없이 빠져들어 읽게 된다. 특히나 SF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