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3
잉에보르크 바흐만 지음, 남정애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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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말리나


바슐라르는 그의 책 공기와 꿈에서 문학 이미지는 독자가 자신의 경험과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상상력을 더욱 활성화시키며 독서 경험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한다고 말한다. 또한, 문학은 현실을 반영하는 단계를 넘어, 우리들을 다른 세계로 이끄는 역할을 하며, 문학이 제공하는 상상적 여정이 우리들의 정신적 성장을 돕는다고 얘기한다.



스토리텔링 위주의 소설적 플롯에 익숙하던 내게 요즘은 읽는 책들이 대부분 의식의 흐름적 기법에 입각한 책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마르셀 프루스트부터 제임스 조이스, 토니 모리슨, 윌리엄 포크너, 버지니아 울프, 사무엘 베케트,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그리고 잉에보르크 바흐만의 이 소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심리소설과 의식의 흐름적 형식이 혼재된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본다. 나는 이 소설을 매우 고도의 정신 심리적 소설로 여성의 내면세계와 혼돈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일종의 연구 보고서로 읽혔다.



과연 이 어마어마한 철학과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적 요소들을 담아 놓은 지하벙커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진 독자들이 얼마나 될까가 궁금해졌다. 나는 이 책을 지난달에 이어 두 번을 읽고서야 간신히 바흐만의 의도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바흐만의 문체는 서정적이면서도 강렬하며, 깊은 감정의 바닥을 자극하며,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시도하고, 의식 흐름을 통해 내면의 세계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 과정에서 바흐만은 여성의 정체성과 사회적 억압과 폭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 정신 분석학자인 칼 융의 ‘아니무스’개념을 도입시키면서 반전적 매력과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 책 '말리나'는 단순한 스토리텔링을 넘어 인간 상호 간의 복잡한 감정과 내면의 고통을 깊이 사유하며 철학적·심리학적 문제들을 정교하게 짜인 구조적 장치 속에 녹여낸 문학적으로 매우 완성도 높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런 문학적 실험과 혁신을 통해 문학이 어떻게 개인의 심리적 경험과 내면적 성찰을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의식의 흐름적 기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더불어 ‘타자‘에 대한 이해와 사랑의 존재적 가능성을 고민한 매우 독특하면서도 너무나 멋진 작품이었다. 조금 난해하기는 하지만 저자가 설정해 놓은 복선을 캐치해 내면 매우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으며 바흐만의 독창적인 문체와 서사 기법이 참으로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등장인물 분석과 스토리 해석 ​



소설은 주인공인 여성 '나'와 그녀의 연인 말리나, 그리고 이반이라는 또 다른 남성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통해 이야기는 전개되는데 '말리나'는 단순한 삼각관계를 넘어 인간 존재의 불안과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며, 주인공의 심리적 혼란을 일종의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읽기가 매우 난해하고 해석하는데 높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우선, 주인공 ‘나’는 비엔나에 사는 여성 작가로 매우 가부장적이고 고전적 여인상에 입각한 연애관을 가지고 있으며 이반이라는 두 자녀를 둔 돌싱남 이반을 사랑한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일에 대한 고뇌, 창작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으며 자신의 정체성과 여성으로서의 존재성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으로 늘 두통에 시달린다.

비록 이반이 나를 위해 창조된 것이 틀림없다 하더라도, 나 혼자서만 그를 독차지하겠다고 요구할 수는 없다.

36p

그와 함께 있으면 나는 조용해진다. 그를 상대로 말할 때면 응, 곧, 그렇게, 그리고, 그러나, 그럼, 아! 같은 별것 아닌 말들이 어떤 재미있는 소설이나 우화보다도 백배나 더 많은 의미를 지닌 채 내 마음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라면 내가 겉으로만 그런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말싸움, 몸짓이나 변덕, 남들 눈에 띄어 보려는 유별난 행동 같은 것들보다 이 별것 아닌 말 한마디가 천 배나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반에게 일부러 꾸미거나 그런 척하는 행동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 그가 먹고 마실 것을 준비할 때나 가끔씩 몰래 그의 신발을 닦아 놓을 때, 얼룩 제거제로 그의 윗도리를 손질할 때면 나는 오히려 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46p

말리나는 주인공과 함께 사는 남성으로 이성적이고 안정적인 인물이다. 그는 주인공의 일상적인 삶의 일부이며 그녀의 내면세계와 늘 연결된 존재로 그려지는 등 매우 이상적인 남성상을 보여준다.​



보편적 남성성을 대표하는 이반은 주인공이 사랑에 빠진 인물로 열정적이고 감정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연인에 대한 사랑이나 이해보다는 피상적 만남을 선호하는 듯하며 자신의 내면을 연인에게 절대 내어 보이려 하지 않고 가부장적 체계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반에게 물어본다. 사랑에 대해서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전에는 어떻게 생각했고,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담배를 피우던 이반은 재를 그냥 바닥에 털고는 아무 말도 없이 자기 신발을 찾는다. 두 짝을 다 찾아낸 후 나를 돌아다본다.

뭐라고 말하기 힘든 모양이다.



"그게 사람들의 깊이 생각해야 하는 거야? 도대체 내가 사랑에 관해 무슨 생각을 해야 하지? 그걸 표현할 말이 너한테 필요해? 날 함정에 빠뜨리려는 거지. 아가씨?"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만약 네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면……. 그럼 넌 아무것도 못 느껴? 경멸이나 혐오 같은 것도? 만약 나도 아무 느낌이 없다면?"

나는 애가 타서 묻는다. 이반의 목에 매달리고 싶다. 그렇게 해서 그가 나한테서 그렇게 멀리, 단 1미터도 떨어지지 않도록. 겨우 처음 꺼내 물어본 이 말 때문에 그가 내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183p



빈에 살고 있는 작가인 '나'는 헝가리 출신의 자녀 둘을 가진 돌싱남 이반을 사랑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에게 이 사랑은 삶의 모든 것이지만, 이반은 이 사랑을 한낱 즐거움으로 간주하고 '나'에게도 그냥 ‘유희’에 머물기를 유구한다. 그런 이반을 더 깊고 낭만적인 연인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자신의 감정을 포장한 체 그가 원하는 대로 따른다. 이반에게 더 다가갈수록 그는 그만큼 멀어지고 결코 타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절망을 깨닫는다.



다른 남자들과 달리 이반은 내가 전화 한 통화에 목을 매거나, 그를 위해 시간을 내거나, 그의 여가 시간에 맞춰 짬을 내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몰래 그런 일들을 하고, 그

에게 나를 맞추고, 그의 가르침들을 생각한다. 그가 가르쳐 주는 것들 중에는 내가 생전 처음 듣는 것들이 많다.

48p

이반은 나에 대한 경고를 받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와 사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보고 있는 현상들이 허상일 수 있다는 것도 모른다. 이반을 헷갈리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이중적인 존재라는 사실, 그러니까 내가 말리나의 피조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그는 결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



134p



그러면서 그녀가 왜 그토록 평범한 가정을 꿈꾸었는지를 폭력적이고 가부장적 아버지에 대한 과거와 망상을 조우하면서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악몽에 시달린다. 그리고 악몽의 끝자락에 이르러 '제3의 남자'인 아버지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그보다도 더 크고 원형적 존재로서 종교적·구조적 억압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나는 "이번에는 장소가 빈이 아냐"라고 말해준다. 이 장소는 어디에나 다 있는 곳이면서 동시에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이다. 시간도 오늘이 아니다. 시간이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제였을 수도 있고, 그보다 더 오래되었을 수도 있으며, 다시 반복될 수도 있고, 항상 그럴 수도 있으며, 어쩌면 아예 없었던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로 뒤섞여 있는 시간들에 대한 척도는 존재하지 않으며, 시간 속에 존재한 적이 없는 일이 벌어지는 비시간(時間)에 대한 척도도 존재하지

231p

핸들 위에 머리를 박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머리채를 잡아당긴다. 아버지다. 어떤 여자가 나를 차 밖으로 끌어내서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데, 그 얼굴에서 천이 그만 흘러내린다. 그녀의 얼굴을 봤다. 내가 그녀를 알아보고 울부짖자 그녀는 황급히 천으로 다시 얼굴을 가린다. 저 둘이서 나를 죽일 것이다.

269P

이번에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언제가 아버지고, 언제가 어머니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점점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둘 중 누구도 아닌 제심자라는 의심이 든다.

309p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나는 이제 모든 것을 다 이해했다.

....(중략)....

나: 그건 내 아버지가 아냐 나의 살인자야. 말리나는 대답이 없다.

309P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나’는 내 안의 남성으로서 존재하는 또 다른 ‘나’인 ‘아니무스‘인 말리나와 많은 대화를 통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그러면서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의 일부분, '내 모든 불만을 내던지고, 저 먼 축복의 땅을 꿈꾸네........ 오, 동화 시절의 옛 향기!'를 들으며 내면의 벽 속으로 숨어버린다. ’나‘는 이반을 내 안에서 죽이지 못하지만 나의 또 다른 자아인 말리나를 통해서 이반을 죽이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결국, 이 소설은 주인공 ’나’와 이반과의 관계에 대한 내적 독백과 심리적 갈등을 ‘나’와 내면에 잠재된 남성적 ‘나’인 말리나와의 고백을 통한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내 안에서 말리나가 속삭인다. “그들을 죽여, 그들을 죽여."

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속삭임이 내 안에서 울린다. 이반과 그 애들은 절대로 안 돼. 그들은 서로 함께 하나를 이루고 있어. 난 그들을 죽일 수 없다고." 정해진 운명대로라면,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이반은 더 이상 이반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게 하지 않았다.

416p

말리나가 자기 주변을 찬찬히 둘러본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보이지만, 그의 귀에는 이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녹색 테두리가 둘러진 그의 작은 찻잔만이 그대로 놓여 있다. 그 찻잔 하나만이. 그가 혼자라는 증거다.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말리나는 망설이다가 전화기 쪽으로 간다. 이반이라는 것을 그도 안다. 말리나가 말한다.

"여보세요?" 그러고는 다시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않는다.

뭐라고요?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제가 제대로 말하지 않았나 봅니다.

착각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여기 번호는 723144입니다.

네, 웅가르 가 6번지.

아뇨, 없습니다.

여기 여자는 없습니다.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여기 살았던 적이 전혀 없단 말입니다.

저 외엔 여기 아무도 없습니다.

제 번호는 723144입니다.

제 이름이요?

말리나.

발소리. 계속되는 말리나의 발소리. 점점 낮아지다 거의 들리지 않는 발소리. 마침내 정적, 경보도, 사이렌도 울리지 않는다. 아무도 도와주러 오지 않는다. 구급차도, 경찰도 오지 않는다. 이건 아주 오래된, 아주 두꺼운 벽이다. 그 누구도 이 벽 밖으로 빠져나갈 수 없고, 그 누구도 이 벽을 부숴 열 수 없으며, 이 벽으로부터는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소리도 새어 나갈 수 없다.

그건 살인이었다.

444~445p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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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H.에 따른 수난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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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문명에서 여성은 아름다움과 미, 곡선, 포용, 생명 탄생, 항상성 유지, 원죄, 무지, 죽음, 풍요, 대지, 바다, 유혹, 변덕 등으로, 남성은 직선과 이것이 함의하는 대립과 폭력, 발전과 파괴, 이성, 하늘, 바람, 떠남, 회귀 등에 자주 비유되어 왔다. 또한 서구에서의 여성은 풍요와 궁핍, 창조와 파괴, 현묘함과 어리석음의 상징하기도 하다.



특히, 인류의 원죄를 잉태시키고 질투 어린 판도라 상자에서 솟아난 악의 원흉이며 매혹과 유혹으로 남성 파괴적 기원을 가졌다고 상징한다. 그들의 토템과 신화는 이런 여성상을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있다.



구약성경 또한 여성에 대한 이해는 팜므파탈적 파멸이자, 유혹의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한 헤로디아의 딸로 살로메가 그랬고,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 블레셋 사람들의 유혹에 넘어가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어 그를 배신한 삼손의 연인 데릴라, 요셉을 유혹하려고 했으나 거절당하자 그를 모함하여 감옥에 가게 만든 요셉의 주인인 포티발의 아내가 그러했다.



수메르 문명에서 이집트, 그리스, 로마, 중세를 거친 서양 문명은 여성을 선악과와 처녀 잉태, 뱀과 달, 메두사와 팜므 파탈적 치명적 악으로 인식했으며 사회적 신분 또한 노예와 같거나 그보다 미천한 존재로 간주하였다.



그것이 성경을 포함한 문학을 통해서 서구적 상상력에 녹아들게 되었다. 즉, 여자의 실존은 처음부터 악과 무지 그리고 원죄적 존재자에 지나지 않았다.



19세기에 들어 여류 작가들이 등장하면서 이런 팜므파탈적 악으로서 여성상에 저항하기 시작하며 탈-여성상을 추구하는 사조가 문학과 예술작품들을 통해서 출현한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아파트 맨 위층 펜트하우스에 사는 부유한 한 여자가. 그녀는 가정부가 떠난 집에 혼자 있다가 처음으로 가 본 가정부가 쓰던 뒷방 장롱 안에서 나체 벽화와 바퀴벌레를 발견한다. 나체 그림 속 인물은 바로 자신이었고 곧이어 출현한 바퀴벌레, 그녀는 바퀴벌레를 옷장 문짝 사이에 끼워 죽이려 한다. 내장이 튀어나온 바퀴벌레는 죽지 않고 삶과 죽음 사이 경계에 위치한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담배꽁초를 몰래 버렸다.

이 소설의 줄거리다.



사탄을 숭배하는 마녀가 된 여자는 무녀로 빙의하여 양심과 도덕을 말하고 바퀴벌레의 죽음과 내장을 삼키는 토템적 의식을 행하고, 종교와 타자, 사랑, 뱃속에서 죽어간 자신의 태아, 낯선 자신의 이름 G.H, 원죄와 지옥과 우로보로스적 삶과 죽음의 영원회귀와 무의식적 외침 즉, 인류가 여성을 학대한 그 모든 악과 추함에 대한 제의를 행한다. 희생 번제로 바쳐진 바퀴벌레의 내장을 삼키는 의식으로.​​



"그래서 나는 바퀴벌레를 넘어설 더 고약한 무언가를 삼키고 고약한 무엇이 된 다음, 나에게 말을 걸어와도 내가 들을 수 없을 누군가가 듣게 될 무엇인가를 끄적이게 될 것이다. 아니면 나만 듣게 될 말들을."​​



늙은 무녀가 신의 제의 단상에 올라 희생 번재물인 내장을 삼키고 읊조리는 예언처럼 삶과 죽음, 그리고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구원시키는 여성 부족의 구원자처럼 그녀는 인간의 죽음 너머의 언어에 대해 예언자적 묵시를 말한다.

그리고 할 말이 한마디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할 말이 한마디도 없다. 그렇다면 왜 침묵하지 않는 건지? 그러나 내가 억지로라도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면, 침묵이 나를 영원히 덮쳐버릴 것이다. 말과 형식이란 지푸라기에 매달린 채 나는 침묵의 파도 위를 떠돌게 된다.

24p

그런데 그때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힘이 내게 있음을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내면에서 고동치는 위대함이 나를 압도했다. 용기의 위대함이었다. 나를 사로잡고 있던 공포가 결국 내게 용기를 심어준 것이다.

71p

이건 미친 거야, 하고 나는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그러나 한낱 먼지에서 태어났다는 느낌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어서, 내가 정확히 알고 있는 생각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건 미친 게 아니라, 세상에, 미친 것보다 훨씬 더 나쁜, 즉 소름 끼치는 진실이라는 사실을. 그런데 왜 소름 끼치는가? 진실은 말 한마디 없이 이전의 내가 마찬가지로 말 한마디 없이 익숙하게만 여기던 것 모두를 전복해버린다.

78p

아르테미스의 분노로 아가멤논이 예언자인 칼카스가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말했을 때, 아가멤논은 딸을 희생시켜야 하는 아비의 마음과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의 의무 사이에서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다 결국 아가멤논은 공적인 의무감으로 그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 제물로 던지듯이 주인공 G.H는 2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묵시록을 내뱉고서 결국 번제물인 내장을 입안에 넣으므로 죽음을 삼킨다.​​



신은 모든 모순을 포괄하므로, 그 무엇도 신에게 모순되지 않는다.

....(중략)....

삶의 본질적인 오류는 바퀴벌레를 보고 역겨워하는 것이다. 나병 환자에게 입 맞추기를 역겨워하는 일, 그것은 내 안의 원초적인 삶을 놓치는 것을 의미한다. 역겨움이란 나 자신에 대한 부정, 내가 만들어진 원료에 대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220~225p

지옥은 살아 있는 피투성이 고기를 물어뜯고 먹는 입이며, 먹히는 자는 즐거운 눈으로 울부짖는다. 지옥은 물질의 환락인 고통이다. (중략) 고통의 잔인한 수용, 자기 연민의 엄숙한 결핍, 자신보다 삶의 의례를 더 많이 사랑하기, 이것이 지옥이었다. 그곳은 타인의 살아 있는 얼굴을 먹는 자가 고통의 환락에 몸부림치는 곳이었다.

160p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논리를 해체시킨 그녀의 무의식적 중얼거림은 계시적 묵시록처럼 어느 문장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지각한 것이 내 세계의 전부라면 그녀는 지각할 수 없는 죽음 이후에 발현될 생명에 대한 우로보로스적 사유를 보여준다.

나는 내게 일어난 사건을 창조해낼 것이다. 삶은 다시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 살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삶을 창조해 내야 하리라. 거짓 없이. 창조해 내기, 맞다.

(중략)

이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유일한 방식이다. 나는 무선 신호를 번역하게 될 것이다. 미지의 신호를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 신호들의 의미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나는 몽유병의 언어로 말하게 될 것이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더 이상 언어가 아니게 될 언어로.

25p

위대한 공포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내면을 향해 주의를 돌리고 자기 자신의 조심스러움을 더듬거리는 눈먼 자가 되어, 나는 처음으로 온전히 오직 본능에 의해 인도되는 느낌을 가졌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열하고 총체적이며 한없이 달콤한 본능의 위대함을 처음으로 알아버린 사람처럼, 나는 쾌감에 전율했다. 마침내, 스스로의 내부에서, 나 자신보다 더욱 위대한 위대함을 발견한 것처럼. 나는 생애 처음으로 샘물처럼 순결한 증오에 흠씬 취했다. 나는 처음으로, 정당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죽이고 싶은 욕구에 흠씬 취했다.

72p

또, 인류의 원죄적 오명을 가진 이브가 삶과 언어, 죽음, 섹스, 관계, 어머니, 이해, 관용, 모성, 도덕, 사회, 윤회적 사고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날것의 벌거벗은 도덕으로 우리 앞에 서서 예언자적 음성으로 중성적 죽음을 얘기한다.

여성이라는 것, 그 또한 내게 부여된 천부적인 자질이다. 나는 천부적 자질의 용이한 면만을 누렸지, 소명의 두려움 따위는 알지 못한다. 그게 두려운 것인가?

38p

나는 내 존재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아님'이야말로 진실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는 최소한 뒷면을 가졌으니까. 나는 최소한 '아닌 것'을 가졌으니까. 나는 최소한 나의 반대를 가졌으니까."

41p

우리는 탈인간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성취이다. 존재는 인간을 초월한다. 인간으로 존재함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억지로 만들어졌다.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이 알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총체이며, 우리가 갈망하는 진실된 인간화 일 것이라고 느낀다. 그러니까 나는, 죽음을 말하고 있는가? 아니다, 나는 삶을 말하고 있다. 삶은 행복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닿음의 상태이다.

238p

그녀는 낮인 동시에 밤이며 삶인 동시에 죽음이며, 여자인 동시에 남성으로, 선인 동시에 악으로, 미인 동시에 추함으로 빙의한다. 모든 무녀들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그러하듯이, 바퀴벌레의 내장을 삼킨 무녀의 입에서 늑대의 침처럼 흘러내리는 언어들, 육식과 살육, 피로 얼룩진 제단 위에서 신의 계시를 받은 육신의 입에서는 인간 삶의 고단했을 문제들 - 타자, 고독, 사랑, 낙태, 존재 등-에 대한 예언적 위로를 건넨다.

고독은, 구하지 않는 것이다. 구하지 않음은 한 인간을 매우 매우 외롭게 만든다. 아, 구함을 통해서 사람은 고립되지 않는다.

225p

그리하여 나는, 산다는 것은 -어떤 형태든지 간에- 타인에게 선한 행위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사는 것 자체가 위대한 자비이다. 누구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완전하게 살아내는 것이 곧 타인을 위하는 길이다. 자기 자신의 위대함을 산다면, 그 삶이 타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독방에서 홀로 이루어질지라도, 그는 제물을 봉헌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봉헌이다. 개인이 살아낸 모든 삶은 수천수만의 사람들을 위한 선행이다.

234p

이 소설은 너무나 매혹적이고 유혹적이다. 책을 펼치고 중간에 책장을 덮을 수가 없었다. 사우나탕에 앉아서 2시간 동안 넋을 놓고 읽었다. 뜨거운 물에 표피가 익어서 장딴지 살이 아팠다.



문학에 대한 이해를 망치로 깨부순 책이었다. 문학을 안다는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이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한결같이 모르겠다는 답변과 어렵다는 얘기만 했다. 어느 나이 많으신 시인분께서 답해주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의식의 흐름으로 쓴 작가라고.



왜 좋으신가요? 느낌이 음악적이고 시적이고 운율이 있잖아. 그런 멋진 상상력이 그냥 좋아. 달무리는 왜 좋은데? 전 어떤 미친년의 묵시적 언어가 마치 고행자가 제 몸을 부수어 샘솟는 동맥혈관 속 피가 심장 박동에 맞추어 뿜어져 나오는 듯하였습니다. 이게 소설인가요?

나도 모르지. 그건 자네가 더 잘 분석하잖아. 분석하고 내게도 알려주게나. ​



카프카의 변신은 인간존재의 실존에 대한 무한한 불안과 권태를 이야기했다. 또 변신에서 바퀴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를 통해서 물질 추구적 인간에 대한 실존을 비판했다. 리스펙토르는 물질 추구적 세상뿐만 아니라 현대에 내재하는 토템과 신화적 여성상을 해체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즉, 미친놈들로 가득 찬 세상에 미친년으로 매우 멋지게 응대해 준다. 이게 그녀의 통쾌한 실존적 삶이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강은 분만과 동시에 죽은 언니의 '흰 ' 죽음을 여성의 숙명으로 인식하였다.

리스펙토르는 뱃속 태아의 죽음을 숙명으로부터 환원시켜 생명으로 탈바꿈 시켰다. 죽음이 곧 삶이고 삶이 곧 죽음이라는, 여성은 결단코 원죄를 자행한 적이 없으며 지옥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그녀는 지옥을 예찬한다. 왜냐하면, 현실이 지옥이기에.



저주받은 무녀로서 여성과 남성들에게 외친다. 그 종교적 제의의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제단을 내려와 너의 삶을 죽어가라고. 현존의 지옥에서 벗어나 서구적 이데올로기가 빗어낸 그 지옥(천국)으로 가라고.



그녀의 묵시록에서 따뜻한 지성적 휴머니즘이 흘러나온다.

아, 내 사랑, 당신은 궁핍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의 더 위대한 운명이므로. 사랑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다. 사랑은 사랑의 궁핍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고유한 속성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지속적인 욕망의 쇄신이 보장된다. 사랑은 이미 있다. 사랑은 변함없이 늘 있어왔다. 필요한 것은 은총의 일격뿐이다. 그것은 수난이라고 불린다.

236p


그녀의 이 책이 오랜만에 망치가 되어 주었다. 번역된 그녀의 책들을 모두 소장하고 싶어서 주문했다.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번역하신 작가님도 이 책이 어려워서 당최 뭔 말 하는지 모르지만 좋았다고만 하셨다.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

#클라리시리스펙토르
#GH에_따른_수난_서평
#인생소설
#소장하고_싶은_소설
#서구적_여성상을_해체하다
#우로보로스적_여성성을_끊어버리다
#탈_팜므파탈
#바퀴벌레내장을삼키다
#지옥이란
#무녀의_묵시록적_휴머니즘
#에포케적_소설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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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덜 힘든 하루 - 일에 지치고 사람에 치일 때마다 버텨낼 힘을 준 문장들
김주절 지음 / 리듬앤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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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는 일, 너라는 사람●

네가 하는 일이 네가 아니다.
넌 그냥 너라는 사람이야..

-토니모리슨-


●다 같이 기쁨 쪽으로 한 발 내딛기●

네가 모두를
기쁘게 할 수는 없어.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

-마크제이콥스-


●욕을 먹지 않는 것이 목표는 아니야●

일을 해내려면
때로는 나쁜 년도
되어야죠.

-마돈나, 마돈나 영감Madonna: Inspirations』 (Andrews McMeel Publishing, 2005)-


●그냥 좀 불편한 거야●

목이 부러졌거나
먹을 게 하나도 없거나
집에 불이 났으면
그러면 문제가 생긴 거야.
그 밖에는 다 불편이야.

-로버트 풀검, 「내 인생에 숨어 있는 감탄사 찾기 [안지민 옮김, 김영사, 1993)-

●힘듦을 얹지 않는다●

세상은 그 자체로
상처를 주는 곳이죠.
우리가 굳이 상처를
보탤 필요가 없어요.

-프린스-


●모두가 중심이라서 모두가 중심이 아니다.●

어느 순간 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자기가 특별하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졌다.
작은 불편도 참지 못하고,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불행이
겹칠 때 자기만 생각한다.

-정유정-


●사랑할 시간도 없다●

저는 늘 3초 후에
죽는다고 생각해요.
3초 후에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남을 미워하겠어요.

'세상끝의 집 - 카르루시오 봉쇄수도원 3부작'


●사람이 변하면 관계도 변한다●

최악의 적이
최고의 친구가 될 수 있지.
최고의 친구가
최악의 적이 될 수 있듯이.

-밥 말리의 노래 <Who the Cap Fit>-


●조언은 아침 인사가 아니야●

누군가 조언해 달라고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저는 절대 조언하지 않아요.
제가 배운 것이자
드릴 수 있는 한 가지 교훈은
내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청하지도 않은 조언을 하는 사람은
되지 말자는 것이거든요.

-테일러 스위프트-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나아지지 않는다●

사람은 나이가 든다 해서
반드시 더 나아지지만은 않는다.


-가쿠타 미쓰요, 「무심하게 산다」 (김현화 옮김, 북라이프, 2017]-


●삶은 거창하지 않아서●

나는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했다.
삶은 지식도 기술도 아니라는 것을,
인생은 어느 날부터 짠 하고
시작되는 게 아니라
지금 숨 쉬고 있는 하루하루가
그 전부라는 것을,
일상의 의식주 안에
내가 찾는 형이상학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김서령, 「참외는 참 외롭다」 (나남출판, 2014)-



●무변화라는 최악의 절망●

미래는 지금과는 다를 거야.
우린 그걸 알면서도
혹시나 지금과 똑같으면
어쩌나 두려워하는 건지도 몰라.
변화를 즐겨야 해.
누군가 말했듯이
결국 다 잘될 테니까.


-영화 <베스트 엑조틱 메리골드 호텔> (2012)-

♡♡-------------------------------♡♡
출반사에서 보내준 책인데 너무 성의가 없다. 조금만 신경썼어도 나름 괜찮을 텐데. 좋은글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비판,성찰이 추가 되었으면 생각꺼리가 있기에 나름 유익하지만 일방적인 글 베끼기에 급급한 면은 너무 아쉬웠다. 책에서 발췌한 글은 작가의 취향을 자랑하는 것만 보여준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여지는건 비단 나만의 생각만은 아닐것이다. 창의적이고 비판적 사고를 얻을 수 있는, 주제가 있는 글쓰기를 통한 책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개인적 소감이다. 내 돈내고 내가 낸 책이 기에 뭐라고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좀 내용이라도 있어야 할것 아닌가. 공짜로 보내준 책이어서 읽었지만 안타깝다.

#조금덜힘든하루
#서평
#비판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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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취임 연설문 고전의 세계 리커버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서정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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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소중한 자료를 알게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이런 고전들의 번역이 대한민국의 국격을 넓히는 가늠자가 되는 길임을, 또한 문화강국의 척도가 됨을 알기에 진정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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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미학과 예술론
서정혁 지음 / 소명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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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을 읽고 그의 예술론에 대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책이 출판된다고 하니 너무나 고맙습니다~~^^
번역본이 아니라 서종혁 교수님의 연구서로서 더더욱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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