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일한 슬픔은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일본군의 총칼을 두려워 하지 않고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구국 열사 .유관순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 병천에서 3남 2녀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로 인해
유관순의 집안은 일찌감치 개신교 집안이었다.
1916년, 유관순은 지역 교회에 드나들던 감리교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주최하는 조국 독립 기원 기도회와 각종 토론회, 강연회에
참여하여 독립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서거한 후 유관순을 비롯한 이화학당 학생들은 스스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돌입.
그리고 3월 1일, 유관순은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바로 풀려났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전국에 있는 학교에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마을 사람들에게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을 알리며 병천에서도 만세운동을 하고자 계획을 세웠다.
1919년 4월 1일,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는 수천 명의 마을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즉시 출동한 일본 헌병이 쏜 총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유관순의 부모님도 피살 당하고 말았다.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몰려 체포된 유관순은 재판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탑골공원에서 일어난 3·1운동이 딱 1년을 맞이하는 날, 감옥 안에서 수감자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는데
수천여 명에 달하는 수감자들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자,
커다란 함성 소리에 형무소 인근까지 인파가 몰려 전차 운영과 통행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가 모진 고문을 겪었다.
1920년 4월 28일에는 영친와 이은이 일본 왕족 마사코와 결혼식을 올리며 내린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줄어들었다.
하지만 계속된 고문으로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 결국은 같은 해 9월 28일에 형기가 만료되기도 전,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유관순은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을 지방으로 확산시키며, 태극기를 만들어 배부하는 사람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총칼과 재판관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유관순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아끼지않고 태극기 하나로 일본에 맞선 유관순 열사의 애국심은 지금도 독립만세운동을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