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합니다, 동네 바보형이라는 말 - 한국에서 10년째 장애 아이 엄마로 살고 있는 류승연이 겪고 나눈 이야기
류승연 지음 / 푸른숲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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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상평과 느낀 점

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 그리고 가족 이야기이다.


 나는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고 직장에서는 책에서 나오는 장애 아이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과 같이 얼굴 보면 산다. 그렇기에 공감 가는 부분도 있고 장애 부모의 삶은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장애인 당사자로서 행복한 삶을 살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과 사회가 장애 특성을 그대로 받아주므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바라는 점에서는 당사자로서, 사회복지현장에서 이 책의 작가로서 느끼는 점은 똑같았다.


 예전에는 장애인이 부모와 함께 사는 것이 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학대당하고 사는 부모 밑에서 사는 것보다 시설이나 그룹홈에 사는 것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장애인이 어디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한지를 따져봐야 한다. 작가에게 말하고 싶다. 장애인 시설이 갈 곳이 없이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 아님을 작가에게 말해주고 싶다. 때리는 활동 보조인이 있듯이 장애인 시설 역시 장애인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사회복지사가 있다는 사실이다. 장애인이 살아가는 장소가 문제가 아닌 기본이 안 된 사람은 어느 곳에나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 다닐 때 복지관 언어치료실에서 2년간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 화장실에서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바지에 오줌을 싸냐"라고 장애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붙들며 울고 있었다. 아이의 표정은 아무 감정이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볼일을 보지 않고 다시 나왔던 기억이 난다. 장애 아이가 어릴 적 여러 치료센터, 학교에 다닌다. 그 시간 동안 엄마는 내 아이가 장애 정도가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 기대한다. 우리 시설에 입소하는 유형이 두 가지이다. 졸업 후 갈 데가 없어서이거나 부모님께서 나이가 드셔서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경우다. 장애인 경우, 성인기에는 이들을 받아주는 곳은 너무나 적다. 대부분 장애 아이를 위해 그동안 쏟은 엄마의 인생과 헌신은 보람은 사라지고 희망은 무너진다. 국가는 장애인을 위한 생애 주기별 시스템은 갖춰놓지 않았다. 그게 욕심이라고 해서 양보를 해도 장애인을 케어하는 몫은 가족에게만 있는 게 현실이다. 코로나로 인해 엄마들은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하고 가정 보육으로 힘들어한다. 코로나로 인해 겪는 고충을 장애 아이 엄마는 일평생 겪는다. 너무 불공평한 현실이다.


 '장애인이라 취업 못 하고, 학교를 못 다닌다’가 아니라 이들을 어떻게 하면 사회에 구성원으로 편입시킬 건지에 대한 기본적인 사고가 변해야 한다고 본다. 그 생각만 바꿔도 홍콩처럼 발달장애인도 사회구성원이 될 수 있다.


나는 개그맨 장**을 싫어한다. 그가 유튜브에서 지체장애인의 어눌한 발음, 몸짓을 따라 하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자신이 재미로 한 소재가 누군가에는 상처가 됨을 모르고 쉽게 하는 행동하였다. 큰 이슈는 되지 않았지만, 비판의 목소리는 나왔다. 이런 것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장애인 당사자가 가족이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의 인식이 변화된다.


 작가의 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는 장애로 인해 제한되는 범위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그 기회를 넓혀주기 위해 나도 작가도 해야 할 일이다.

2. 마음에 남는 글귀

53쪽

한 달 2백만 원 이상은 투자해야 자식이 사람 구실을 한다고 했다.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다. 내가 안 가본 길이니 장담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난 치료 과목 수를 줄이고 더 많이 돌아다니는 걸 택한 지금의 방식을 후회하지 않는다. 적어도 아들이 더 행복해졌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64쪽

2인자, 비장애 형제자매들의 현실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다. 그들이 보기에 부모의 관심은 언제나 장애가 있는 형제자매의 몫이다. 반면 양보는 언제나 자신들의 몫이다. 이 얼마나 부당한 관계란 말인가! 부모의 관심을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매사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양보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니.


84쪽

장애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난 “아…… 동환이랑 같은 반 엄마세요? 우리 아이 때문에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내 잘못이었다. 첫 번째 시행착오였다. 엄마인 내가 고개 숙인 죄인으로 지낸 것. 언제나 고개 숙인 죄인이자 저자세로 일관하는 장애 아이 엄마, 심지어 장애인에 대한 편견으로 똘똘 뭉친 한 엄마조차 “너무 그렇게 저자세로 하지 않으셔도 돼요”라고 충고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그런 내 행동이 같은 반 엄마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저자세로 일관했던 내 행동은 우리 아들을 위험인물로 낙인찍는 데 일조를 해버렸다.


85쪽

유일한 학부형으로 소풍을 따라가서 아이들과 하루를 지내보니 더욱 잘 알게 된다. 평상시 우리 아들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말썽꾸러기인 사내아이들이 많다는 걸 말이다.

하지만 말썽꾸러기 사내아이 엄마들은 나처럼 고개 숙인 죄인으로 살지 않았다. 나만 그렇게 살았다. 내 스스로가 내 아들이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너무 매몰돼 필요 이상으로 남을 의식하며 고개를 숙인 채 살았다. 그러다 보니 내 아들이 한 일만 필요 이상으로 확대 해석되었다.


136쪽

“동환아, 그냥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도 괜찮아. 엄마는 동환이를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니까 이제 괜찮아. 그냥 깨어나지 않아도 돼, 이런 세상에서 더는 살지 않아도 돼. 다 괜찮아. 엄마는 이제 괜찮아. 그러니까 깨지 않아도 돼.”

사랑하는 자식이 죽기를 바라고 그런 자식과 함께 나도 죽어 없어지기를 바라는 나날들.


179쪽

많은 경우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발달장애 아이들은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곤 한다. 주변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부모들이 아이를 강제로 제압해 그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다음번에 같은 상황이 오면 또 같은 행동을 한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불편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관람객을 위해 완력을 써서라도 민망한 상황을 모면해야 할까? 부모가 아이를 들쳐 업고 사라지는 것으로? 아니면 무언의 양해를 구하고 아이가 배울 기회를 만들어줘야 할까?(중략)

발달장애 아이들의 '터지는 순간'은 자라면서 점점 줄어들다가 없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그 시간을 1년이라도 단축하려면 이 아이들이 배울 기회의 장이 일상 속에서 자주 제공되어야 한다.


188쪽

특수교육의 목표가 ‘비장애인 중심 사회로의 편입’이기 때문에 비장애 아이들과 같은 내용을 공부해야 한다고 설명하지만, 나는 왜 장에 아이들이 비장애 아이들과 같은 과목을 배우는지 납득이 안 간다. ‘비장애인 중심 사회로 편입’되기 위해서라면 특수교육은 장애 아이들에게 필요한 사회성과 일상생활 기술 습득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 아닐까?


191쪽

비장애인에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면, 장애인에게 행복은 발달순이 아닐 게다.


193쪽

문득 아들이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했던 때가 생각난다. 아들을 바라보는 낯선 시선에 당황하는 내게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동환이가 학교에 적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동환이에게 적응할 시간을 좀 주도록 해봐.”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불쌍한 내 아들이 그들 세계에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그들도 내 아들에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미처 깨닫지 못했다.


208쪽

우리를 바꾸려 하지 말고 그냥 응원하는 눈빛으로 지켜만 봐주세요. 특히 아이를 시설에 보내라는 말은 금기어입니다. 저도 여러분의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라는 말을 하지 않듯 말입니다.


229쪽

‘비장애인 중심 사회로의 편입’이 목표라면 비장애 아이들과 똑같은 교과과정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비장애인들과 어울려 사는 데 무리가 없을 정도의 일상생활 자조 기술을 익히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 학교를 졸업한 뒤 비장애인 중심 사회로 무리 없이 편입될 수 있다.


                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지원받은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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