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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 Piece 10
아시하라 히나코 글.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이 만화책을 보다가
이상하게도 기시미 이치로의 <미움받을 용기>가
생각났다.

종종 일본 순정만화를 볼 때면
엇비슷한 결론에 이르는 것을 발견해서
어쩌면 일본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건가?
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를 때가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만큼 진지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리는 하나니까.

결말은 당혹스러웠다. 뭐지... 싶은.
너무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와서
어디서 어떻게 맞춰나가야할지 모르겠는.
막막한 천피스 짜리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쉽지 않은 만화이다.

계속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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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흡연자들이 백해무익한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담배가 안 좋다는 것쯤은 그들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새해가 되면 신년계획 중 하나로 금연이 꼭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결심은 모든 계획들이 그렇듯 얼마 가지 못한다. 그들은 왜 담배를 끊지 못하는 걸까. 물론 담배가 가진 중독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게 전부일까? 그게 아니라 그들은 진정으로 담배를 끊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담배가 유해하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담배를 끊으면 담배를 피우던 시간에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모르는 것은 두렵다. 이미 익숙하다. 조금 몸에 해로워도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좀 건강해지자고 이 익숙함이 주는 달콤함을 버리고 싶지 않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아간다. 이런 삶이 불만스럽고 괴로우면서도 안락하고 익숙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실 변하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고 있다. 그냥 세상이, 사람들이 날 받아들여주고, 상황이 저절로 좋게 변했으면 할 뿐이다.

 

불행은 익숙하고 행복은 오히려 낯설다. 상처받고, 배신당하고, 외로운 것.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들과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 소외된 나. 불행은 익숙하다. 상처받지 않고 사랑받으며, 배신당하지 않고 믿을 수 있으며, 외롭지 않고 충만한 세상은, 부럽지만 내 것이 아니다. 갖고 싶지만 가보지 못한 것이다. 

 

 진리는 단순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아들러 심리학의 요체도 그렇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진정으로 행복해질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이 책을 읽고 오랫동안 잔상처럼 남은 것은 "용기"라는 이 말 하나인 것 같다. 문제는 유년기의 상처도, 과거의 트라우마도, 타고난 성격도 아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지금 이순간부터라도. 불행했던 과거와 상관없이. 용기를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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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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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스님이, 스님이 되기로 마음 먹은 것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서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마음이 답답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한 치 앞도 모르겠어서 어쩌면 나도, 이 책을 읽으면 그 막막함이 풀어질까, 막연히 생각했다. 스님을 스님이 되도록 만든 책이라면 나에게도 뭔가 답을 주지 않을까 싶어서.

 

이 책을 다 읽은 지금, 책을 덮고서 나는, 답은 얻었으나 더욱 막막해졌다. 싯다르타가 말해준 답은, 자신에게는 답이 없다는 답이었다. 스승 고타마를 뒤로 하고, 가족도 친구도 두고, 싯다르타는 홀로 다시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는 삶의 희로애락을 겪으며 세속적인 탐욕과 절망에 허덕이다, 스스로 얻은 깨달음을 통해 마침내 강처럼 고요하고 잔잔한 마음을 얻는다. 책의 말미에서 다시 만난 친구 고빈다가 어떤 사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느냐 묻자 싯다르타는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고빈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그럼에도 고빈다가 이해하지 못하자 싯다르타는 돌멩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얻은 하나의 가르침에 대해 말한다.

 

"사랑이라는 것 말일세, 고빈다, 그 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

 

고빈다는 싯다르타의 이 말이 부처의 말씀과 모순된다고 얘기한다. 세존이 말씀하신 것은 용서와 자비심이지 사랑은 아니라며. 오히려 세속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셨다며.

 

그러나 마지막, 싯다르타와 입맞춤을 통해 그는 싯다르타의 말이 세존 고타마의 것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싯다르타에게 강렬한 사랑과 외경심을 갖게 된다.

 

지혜는 말로써는 전달되지 않는 것. 오직 행동과 경험을 통해 전달될 수 있음을, 불교라는 사상이 말하는 것이 결국 사랑이라는 진리를 향한 것임을. 싯다르타가, 아니, 헤세가 얻은 깨달음이란 결국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공감이 많이 갔다. 불교든 기독교든, 다른 단어로,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표현될 뿐, 결국 같은 것이다. 우리가 성인聖人들의 말씀이 아니라 행동을 좇는다면, 그곳에는 어떤 분별도 없고, 어떤 왜곡도 없이, 하나의 가르침만 있을 것이다. 부처의 삶이나 예수의 삶이나 결국 다를 게 없지 않나. 말로써 가를 뿐.

 

그러나 이해는 가는데, 여전히 막막하다. 이 또한, 하나의 지식, 앎에 지나지 않기에 그런 걸까. 어쩔 수 없이 부딪칠 수밖에 없다. 책에는 답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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