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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증오의 도착들 ㅣ 슬로베니아 학파 총서 1
레나타 살레클 지음, 이성민 옮김 / 비(도서출판b)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서구 이론가들의 이념적 저작들은 항상 새로운 글쓰기의 모험을 감행한다. 그들은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독특한 형식과 내용속에 구체화시키고, 현실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적 갈등에 대한 모색을 이루려고 한다. 이러한 그들의 책들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것이다. 즉 <낯선 것에 매혹당하기>로 규정할 수 있는 이러한 책읽기는 실제 우리 현실을 서수 이론으로 고공 비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지젝을 비롯한 슬로베니아 학파의 이론적 구성물을 낯선 언어와 표현의 가능성에만 몰두한 나머지, 우리 현실의 부정성을 보지 못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라깡의 대표적인 저서가 번역되지 못한 상황에서, 슬로베니아 학파의 저서가 번역이 일관되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들의 이론적 구성은 라깡을 통한 이론적 재번역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프로이트 전집이 번역된 상황이어서, 우리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졌지만, 좀 더 1차 원서에 대한 번역 작업은 고루한 편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증오의 도착들> 역시 이론의 재구성을 중심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우리 실정에 맞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나누어 살펴보는 책 읽기를 필요로 한다. 예컨대, 4장과 6장은 각각 구 공산주의권 국가의 몰락을 중심으로 독재자라는 큰 타자의 문제와 사회적으로 "위험한 타자(198면)"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충분히 현존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다. 즉 4장은 남과 북의 독재와 그 영향에 대한 문제, 6장은 이른바 레드 컴플렉스(빨갱이 담론)의 문제와 결부해서 살펴보면 이론의 맥락을 확대시킬 수 있는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서구 이론의 수용 이전에 우리 현실에서는 왜 이런 이론적 구성이 성립되지 못하는 가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이 제기되어야 하고, 우리 현실에 적합한 이론적 실천에 대한 담론을 거친 후에는 새로운 글쓰기 전통을 수립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원론적으로 이론적 모색을 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고, 구체적인 것을 선점할 수 있는 글쓰기를 수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과 증오의 도착들>은 매혹적인 책이지만, 상처를 동반한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글쓰기의 지형을 보여주는 다성성이 매혹적이지만, 라깡의 기본 저서가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분명히 독자가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다. 라깡에 대한 무수한 논문이 있지만, 그의 1차 원서에 대한 번역은 전무한 편이다. 지젝을 포함한 슬로베니아학파에 대한 논문은 없지만, 그들의 1차원서에 대한 번역은 많은 편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모험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실재 우리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적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큰 타자의 역설은, 실존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루마니아 이야기의 비극은 , 차우셰스쿠가 큰 타자는 한낱 상징적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며, 동시에 사람들은 이 허구가 그들이 상상한 것보다 더 큰 힘을 그들에게 발휘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162면)" - 한때 남과 북의 독재자들의 이름을 차우셰스쿠 자리에 대입하면,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풍경이 보이지 않을까?
증오 표현의 문제는 우리 시대의 첨예한 언어적 폭력과 인권 문제를 발생시키는 레드 컴플렉스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빨갱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관계는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를 무력화시킨다. " 언어는 통제될 수 있는 동시에 통제될 수 없다. 언어를 통제한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종국에 주체 그 자신이 자신의 말의 향유에 대해 윤리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218면)"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윤리성에 책임을 부여한 의의로 볼 수 있다.
이론은 현실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그러한 이론으로서의 실천은 부정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