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 <엄마가 늘 여기 있을께> 저자 권경인 교수님의 집단상담에 참가하면서, 내 안에 아직도 엄마에게 인정 받지 못했다는 상처가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엄마를 사랑했고, 엄마에게 인정 받고 싶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어린 내가 선택한 방법은 공부였다. 학창 시절 치열하게 공부했지만 내 공부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엄마의 인정이었다. 중학교 때 중간고사를 생각보다 잘 보지 못했을 때 나는 목놓아 울었다. 친구들이 너 왜 우냐고 물어봤을 때 "우리 엄마가 너무 실망할 것 같아. 미치겠어." 엄마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미칠 것 같았던 그 때의 내가 너무 안타깝다. 집단상담 내내 나는 내 상처에 부르짖었고 참 많이 울었다.
집단상담이 끝나고 중학생 큰 아들을 데리러 갔다. 평소와 다르게 아들의 모습 속에서 엄마를 실망시킬 까봐 전전긍긍하며 공부했던 내 모습이 겹쳐졌다. 그리고 아들에게 묻는 건지, 어린 시절 나에게 묻는 건지 모를 질문을 했다. "~야, 너 공부하느라 진짜 많이 힘들지?". 어느 하나 특별한 것도 없는 이 질문을 하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영문 모르는 아들은 "네. 정말 힘들어요...근데 엄마 왜 울어요?" 라고 되묻는다. "엄마도 중고등학교 때 공부하느라 참 힘들었는데...그 때 힘들었던 게 생각났어. 그런데 그 힘든 걸 네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네."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아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은 달랐다. 아들은 엄마의 공감을 받고 "엄마, 저 게임 아이템 하나 사도 되요?"라고 묻는다. 아직도 천진난만한 우리 아들이 참 좋다. 평소의 나 같으면 바로 허락하지 않았겠지만, 그 때 나는 흔쾌히 게임 아이템 지름을 허락했다.
아직은 글로 잘 표현하고 전달하기가 어렵지만, 그 때 내가 아들에게 건넨 '공감'은 찐 공감이었다. 상담을 배우며 공감이 참 어렵다고 느꼈는데, 내가 나의 고통에 공감하고 난 후에야 아들에게 진짜 공감을 건넬 수 있었다. 공감에 성공했던 몇 안되는 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공감에 실패하고 만다. 나는 공감에 실패하는 엄마들, 상담자들에게 나의 진심 어린 공감을 건넬 수 있다. 그럼에도 다시 공감을 복구하려고 노력하는 나와 같은 엄마들, 상담자들의 노력에 다시 한번 공감한다. 공감의 실패를 인정하고, 공감의 능력을 복구하기. 이 주제가 내 개인적 경험을 통해 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공적 영역으로 치환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믿는다.
메리 파이퍼 덕분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풀어내어 독자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나도 그녀처럼 내 목소리를 찾고 싶다. 나다운 글쓰기를 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우선 써야 하고, 읽어야 한다. 읽고 쓰는 삶은 지속되어야 한다. 나는 날마다 변화하고 싶고, 세상의 변화에 1mm라고 기여하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