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엔딩 (양장)
김려령 외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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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겨진 것

나는 자주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남겨진 것들에 속해지다보면, 떠나는 존재를 부러워하게 된다. 구질구질하게 남겨진다는 건 자주 이전의 기억들을 곱씹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자주 우아한 거짓말을 곱씹었다. 김려령 작가님의 완득이나 천지를 자주 생각했다. 특히 실뭉치에 편지를 남기고 간 천지를 자주 떠올렸다. 그리고는 천지의 엄마가 한 말을 중얼거린다.

“말로 하는 사과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힙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사과 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일방적으로 하는 사과, 그거 저 숨을 구멍 슬쩍 파놓고 장난치는 거예요. 나는 사과했어, 그 여자가 안 받았지. 너무 비열하지 않나요?”

이 대사는 이 책을 읽었던 중학교 때에도, 그 이후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심지어 대학생이 된 지금도 자주 중얼거린다.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천지가 그렇게 안타까웠고, 또 나 같았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천지의 말이 아니라 저 말이었다. 책을 덮고도 나는 자주 숨을 구멍을 파놓고 내게 사과하는 이들을 보았다. 나는 이따금 천지였지만 이따금 직접 사과를 받기도 했다. 숨을 구멍이 있는 사과.

먼지가 쌓인 기억이라 당연히 저 말을 그대로 뱉지는 않았다. 숨을 구멍은 숨구멍으로 바뀌기도 했고, 말투의 어미는 중얼거릴 때마다 바뀌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그 페이지를 펼치고 울었던 날을 생각한다. 그 순간 이 대사는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버렸다.

우아한 거짓말에서 떠난 이는 천지였다. 그래, 천지는 떠났다. 그래서 남겨진 것은 엄마였고, 만지였고, 화연이었고, 또 많은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남겨졌다고 모두가 천지를 곱씹지는 않는다. 그렇게 <두 번째 엔딩>에서 “천지는 벌써 청소년 자살률 통계로만 남았다.”.

하지만 엄마, 만지는 여전히 남겨진 이들이었다. 천지는 그들을 벌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들도 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무너진다. 남겨진 이들의 숙명은 지난 기억에 무너지는 것이니까. 천지가 보낸 신호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이들은 남겨져야 했다. 그래서 결국 조잡한 말이 뭉쳐져 죽인 천지를 곱씹게 되었다.

그래도 흘러가는 것

<두 번째 엔딩>에 나온 <우아한 거짓말>의 뒷이야기는 <언니의 무게>이다. 천지의 언니 만지는 남겨졌기 때문이다. 이야기 초반에 엄마의 시점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축은 만지이다. 만지가 <우아한 거짓말>에서 차마 해내지 못한 것들을 <언니의 무게>에서는 해낸다. 만지는 엄마와 함께 옷장을 정리하며 애써 외면해온 천지의 교복을 버린다. 그리고 만지는 천지에 대한 죄책감을 화연에게 돌린 아이를 말린다. 그리고 그렇게 만지도, 엄마도 흘러가게 된다.

나는 가끔씩 화연이 잘 살았을까를 궁금해했다. 사실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을 믿지는 않는다. 그들이 나에게 한 잘못으로 벌을 받는지, 아니면 어쩌다 운수가 안 좋은 것인지 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화연이 어떻게 살지가 궁금했다. 여전히 뻔뻔할까. 잊고 평소 같을까.

<언니의 무게>에서 화연은 천지가 되었다. 주변 아이들은 여전했다. 화연을 욕하며 수많은 아이들은 자신의 죄를 잊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줄 몰랐다. 재미로 그랬고 아이들도 함께 웃어더랬다. 그런데 즐길 때는 친구였던 아이들이 어느새 단순 관람객들로 태도를 바꿨다.”

아이들은 오직 화연만이 잘못한 것처럼, 자신은 단 한 순간도 천지에게 말을 던지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그 모든 말들이 하나하나 뭉쳐져 천지를 죽인 것을 잊었다. <우아한 거짓말>에서처럼 아이들은 누군가를 욕하며 자신을 그렇지 않다는 안심을 얻고, 그보다 선한 자신은 그를 평가할 수 있다는 거짓된 우월감 속에서 행복해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천지가 된 것처럼 너도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 없어.”

화연의 말처럼 또 다른 천지는 계속 생길 것이다. 화연은 그저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그렇게 살아갈 화연의 삶은 어쩌면 흐르는 듯 보여도 멈춘 것일 테다. 흐른다는 건 변화를 겪는 이들을 위한 선물이니까.




<언니의 무게>는 아주 짧은 단편이다. 이금이 작가님의 <소희의 방>처럼 긴 외전은 아니다. 하지만 학창시절에 좋아하던 소설의 뒷이야기를 읽어서 좋았다. 화연이 천지를 자신의 성장 발판으로 삼지 않고 그대로여서 좋았다. 천지의 삶은 통계로만 남아 슬펐지만, 동시에 결국 잊히지 않고 흐르기 위해서는 살아야 함을 깨달았다. 천지야, 위로해줘서 고마웠어. 그리고 나의 <우아한 거짓말> 속 모든 이들이 그래도 살아가서, 그렇게 흘러가고 있어서 고마워.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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