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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논문 작성법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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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연구자라는 이름을 내세우기도 민망한 사람들에게 눈물 나게 다정한 책이다.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내가 가진 어려움은 내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처음이라서를 알게 해준다. 우리 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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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 지성사로 보는 민주주의 혐오의 역사
김민철 지음 / 창비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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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야흐로 민주주의의 시대이다. 모두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얘기하는 시대가 왔다. 다양성을 포용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신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과, 시장의 흐름에 맡기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신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공존하는 시대이다. 


민주주의를 정확히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기는 힘들어도, 작금의 시대에서 민주주의는 ‘도덕적 이상향’을 넘어서 ‘도덕적 완성’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위에 어떤 대척점을 두고 사는 남한 사람들이라 그런 것인지, 우리는 민주주의가 옳은 것이라는 생각에 별다른 의구심을 품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일단 분명하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언제부터 ‘도덕적 이상향’이 되었을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어서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꽃 피웠을까? 


민주주의는 정말 등장했을 때부터 하나의 교리처럼 무조건적인 사랑받아왔을까?



이 책은 바로 이 질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성사학자인 저자는 “투표, 입헌주의, 법치를 민주주의의 본질로 치부하는 사고방식은 시대 불변의 관념이 아니”라, “기껏해야 200년 전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18세기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는 현실적인 고려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이후에도 민주정은 이야기 꺼내기엔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프랑스혁명 이전까지 수백년 동안 거의 모든 사상가들은 인민의 정치 참여에 대한 불안을 공유했고, 이는 사실 혁명으로 부침대 뒤집듯 바뀌지 않았다. 프랑스혁명 첫 3년간 국회의원을 거친 2,000명 중 민주주의를 공개적이고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람은 10명이 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좋은 예이다.



모두에게 미움받았던 민주주의,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민주주의의 교과서가 될 수 있을까?



저자가 도입부에서 서술하는 이야기들은 다음의 결론은 내린다.


“민주주의는 모두에게 미움받았다.”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마주하고 혼란스럽게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은 학술적 도파민을 가득 자극한다.  루소를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라고 배워온 우리는 1부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번 머리를 꽝 맞는 충격을 맞이할 것이다. 


루소, 아무리 사회와 역사 과목이 싫었던 이들이라도 <사회계약론>이 민주주의의 교과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모를 수 있을까?


그런데 저자는 1부가 끝나기도 전에 루소가 "민주정을 세우고 유지하는 일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을 논증하고자 저자는 아주 철저히 지성사의 입장에서 사료와 당대의 분위기를 읽어낸다. 그러니 우리는 장이 끝날 때쯤이면 루소와 사회계약론을 다시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지성사가인 저자는 아주 성실하게, 우리의 오해를 풀어내며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우리의 과거 지식과 현재의 지식을 끊임없이 충돌시키거나 결탁시키는 혼돈을 만든다. 이 책을 읽는다면 동의할 것인데, 혼돈은 결국 흥미를 만든다. 


저자는 혼돈과 흥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독자를 차근차근 어르고 달래며, 왜 수천 년 동안 민주주의가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는지, 그러한 상황이 18세기 말 유럽에서 어떤 계기를 통해 바뀌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민주주의의 최종적이고 위대한 승리를 찬양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지성사가인 저자답게 이 책은 과거를 과대하게 해석하거나 당대인들을 오늘날의 시선으로 단죄하거나 찬미하지 않고,  당대의 사회적 맥락에 맞춰 당대인의 시선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한다.  


오늘날 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에 맞춰 과거의 민주주의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는 아주 성실하게 각 시대별 '민주주의'를 이야기해준다.


여기까지 읽은 분들이라면, 고대 그리스, 18세기 말 유럽과 프랑스혁명...... 듣기만 해도 막막한 애들 속에서 당대의 민주주의를 추출한다는 것이 벌써 두렵고, 그러나 한편으로 흥미롭게 느껴질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저자는 독자를 차근차근 달래가며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즉 이야기의 강약조절을 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역사학자다. 그러한 친절과 능력의 증거가 바로 '개념잡기' 파트이다. 저자는  무작정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다. 


저자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들어가기 전에, 기본적인 개념을 잡아주며 글을 연다. 

이것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① 국민은 국가의 존재를 전제한 뒤에 사용할 수 있기에 주권을 이야기할 때와 같은 상황에서는 인민이 더 정확하다는 것 

② 민주정은 인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의미이며, 민치정은 인민이 통치함을 뜻한다는 것이다.(다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 글에서는 민주정으로 대체되어 서술된다) 


우리는 이 두 개념을 충분히 인지하면 친절하게 각 장을 나눈 저자에 따라 한 챕터씩 이야기를 전진해나갈 수 있다.


그래서 인간사의 정답은 무엇인데요?

민주주의가 어째서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었고, 어떤 계기로 인정받기 시작했는지를 이 책을 통해 알아가고자 하는 이들은 책을 읽으면서도 끊임없이 인간사의 정답에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물론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과도한 정보를 전달하고 싶지는 않다. 혼돈과 흥미의 늪은 스스로 빠져봐야 진정한 도파민의 폭발을 느낄 것이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인간사의 정답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노라 하는 역사학자들조차 과거를 토대로 미래를 검증하는 것을 실패했다.


과거 엘리트들은 인민의 통치를 끊임없이 우려했고, 엘리트의 통치도 인류사를 무수한 학살과 전쟁으로 빠트린,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 인간사의 결론은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불완전의 끝에 우리는 모순적이게도 하나의 온전함을 느낀다. "인류의 과거사는 우리에게 엘리트의 통치도 인민의 통치만큼이나 불완전했으며 어떤 지식도 영원불멸의 진리로 입증된 적이 없다"는 점이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완벽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해도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것이다. 





*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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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독립운동 열전 1~2 - 전2권 독립운동 열전
임경석 지음 / 푸른역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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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와 대중을 선 그어 놓은 기존의 역사서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책. 역사를 향유하는 것은 학자만의 특권이 아님을 일깨워주고 우리가 관성적으로 쓰는 ˝잊혀진 역사˝라는 단어 대해 실질적인 답안을 제시해준다. 단락마다 읽어도 되는 구성은 우리를 부담스럽지 않게 역사의 세계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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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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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표지에 새겨진 눈송이를 눈을 감고 어루만진다. 제목을 곱씹어본다. 작별하지 않는다. 작별. 대충 그것의 한자를 추측해본다. 지을 작, 나눌 별. 감았던 눈을 뜨고 핸드폰을 찾아 작별을 검색해본다. 지을 작, 나눌 별. 추측한 것이 맞았음에도 석연치 않았다. 조금 더 문학적으로 그 뜻을 생각해본다. 이별을 만들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작별은 이별보다 더 깊은 의미라고 느껴진다. 조금 더 먼, 영영 만날 수 없는, 그런 사이에나 붙일 수 있는 말 같다고 느껴진다. 그러다가 다시 눈썹을 찡그린다. 그런데 이별을, 만들 수 있나? 그렇다면 이별을 당하는사람은 영영 작별을, 그러니까 이별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다시 고민한다.

내가 인지하는 가장 최초의 작별은 외할아버지의 관한 것이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몇 없다. 그런데 그중 가장 생생한 것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엄마와 나눈 대화라는 게 아이러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쪼그려 앉아 신발을 신다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외할아버지는 어디 가신거야? 엄마는 대답했다. 외할아버지는, 아주 멀리 여행을 가셨어. 엄마는 내 신발끈을 고쳐 묶어주셨다. 나는 다시 물었다. 엄마, 그럼 할아버지한테 올 때 선물을 사달라고 하면 안 돼? 그 뒤로 엄마가 대답을 했는지, 대답을 안 했는지, 혹은 어떤 행동을 하셨는지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가장 최초의 작별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할아버지의 마지막이나 장례식장 모습 따위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의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이리도 덤덤한 것에 비해, 나는 군인들이 사람들을 세워놓고 죽였다는, 그들을 그렇게 절멸시켰다는 페이지를 쉬이 넘기지 못했다. 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주 오랫동안 그 페이지를 펼쳐 쥐었다. 마침내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 할 때 종이의 가장자리에 남은 엄지손가락 자국을 또 몇 분 멍하니 보았다. 나는 이런 경험을 이전에도 한 적이 있었다. 일본이 간도의 한인마을을 절멸시킨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제암리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상세히 기술된 기록을 읽었을 때 그때도 그저 가만히 손을 떼지도 못한 채 계속 그 페이지를 읽었었다.

다음 페이지로 넘기며 나는 책을 잡고 있던 손가락을 움직여 표지의 눈송이를 다시 만졌다. 총소리가 들려서 총알이 들어올까 이불을 뒤집어썼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친할머니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의 친할머니는 어렸을 적 내가 잠을 자지 않으면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다. 때론 일본놈들은 아주 나쁘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때론 하늘에서 떨어지는 폭탄과 그 소리에 아주 두꺼운 솜이불을 뒤집어 쓰셨다고 하셨다. 솜이불을 쓰셨던 때가 일제강점기일지, 6·25일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할머니는 제주도에 사신 적이 없으니 그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불을 쓴 누군가에게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엎드려 둥글게 몸을 만 어린 할머니가 생각났다. 그러자 손끝과 발끝이 조금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이불을 쓴 그와 솜이불 아래에서 웅크려 있던 할머니는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앞장에 있던,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에도 뒤를 돌아보아서 돌이 되었다는 여인의 이야기가 다시 생각났다. 그가 한 걸인이 한 이야기를 유심히 듣지 않았다면 산으로 뛰어 갔을 리도 없으니, 그 여인이 뒤돌아본 이유는 사랑 때문일 것이다. 남겨둔 사랑이 있어서 귀 뒤로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불을 쓴 누군가가 자신의 아이를 계속해서 생각한 것처럼.

그러니 정심이 계속해서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남겨둔 사랑이 있었다. 정심이 계속해서 뒤돌아 교도소에 항의하고, 기사를 스크랩하고, 동굴의 진흙을 밟은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스크랩을 그만 둔 뒤로도 여전히 꿈속에서 모든 순간들을 뒤돌아본 것도, 그래서 마침내 오랜 시간 잠드는 돌이 되어버린 것도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정심에게 꾹꾹 눌러쓴, 뒤돌아 볼 수밖에 없는 사랑이 있었으니까. 정심이 꾹꾹 눌러 글자를 썼을 때, 그는 글 쓰는 것이 어색해서 힘을 주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이따금 글 쓰는 것이 낯선 이들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다시 생각을 고쳤다. 그는 지극한 사랑을 눌러썼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게 그녀가 돌이 되기 전 버텨낸 기록일 것이다.

툭 튀어나온 표지의 눈송이와 꾹 들어가 있을 정심의 글자. 그 대비 속에서 결국 눈이 쌓여 부러진 나무의 모습이 떠오른다. 솜 같던 눈이 쌓여 가지를 부러뜨렸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눈에게도 무게가 있다는 말이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린 눈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나는 영영 그것을 가늠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 이야기와 작별할 수 있을까? 이 이야기를 영영 보내어 역사책 귀퉁이에 실은 채 적당히 넘길 수 있을까? 작별하지 않는다는 건, 할 수 있는데 하지 않겠다는 거다. 작별 당한이들이 할 수 있는 표현이자 여전히 이별을 만들 생각이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야기를 끝낼 수 없으니까 작별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학교 3학년 <사학개론> 수업을 들었을 때, 교수님은 한 논문을 인용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한 사건을 제대로 논할 수 있을 때는 당사자 세대에서 3세대가 되는 시점, 그러니까, 한 아이의 자식의 자식이 되었을 때라고 하셨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당사자보다 더 맑은 눈으로 사건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언제 제대로 이야기 될 수 있을까? 집 마당 한 가운데에 묻힌 할아버지로부터일까, 외삼촌으로부터일까, 정심으로부터일까, 강보에 싸여 던져진 아기로부터일까.

어쩌면 벌써 그 시기가 왔을지도 모른다. 제주 4·3사건에 대한 박물관이나 여러 논문이 나오고, 마침내 이 책이 나왔다는 점에서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와 감히 작별할 수 있을까? 내가 여전히 군인들이 대살한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일본군이 무참히 학살한 간도 주민들의 이야기를, 제암리 교회에서 불탄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넘기지 못한 것처럼 우리는 아마 이 사건과 작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구해줍서라고 말하는 정심을 영영 구해줄 수는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기꺼이 그의 손을 붙잡아주고자 할 것이다. 우리는 정심을, 그 상처받은 이들을, 아직도 꺼내지지 못한 그들을, 지극히도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뒤를 절대 돌아보지 말라는 말에도 뒤를 돌아보아 돌이 되었다는 한 여인처럼, 계속 뒤를 돌아볼만한 사랑생겨버린 것이다. 비록 작별 당했지만 이별을 만들 생각이 없는, 지극한 사랑을 가진 우리가 생겼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고 어쩌면 앞으로도 꾸준히 이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결코 작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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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엔딩 (양장)
김려령 외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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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겨진 것

나는 자주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남겨진 것들에 속해지다보면, 떠나는 존재를 부러워하게 된다. 구질구질하게 남겨진다는 건 자주 이전의 기억들을 곱씹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나는 자주 우아한 거짓말을 곱씹었다. 김려령 작가님의 완득이나 천지를 자주 생각했다. 특히 실뭉치에 편지를 남기고 간 천지를 자주 떠올렸다. 그리고는 천지의 엄마가 한 말을 중얼거린다.

“말로 하는 사과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힙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사과 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일방적으로 하는 사과, 그거 저 숨을 구멍 슬쩍 파놓고 장난치는 거예요. 나는 사과했어, 그 여자가 안 받았지. 너무 비열하지 않나요?”

이 대사는 이 책을 읽었던 중학교 때에도, 그 이후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심지어 대학생이 된 지금도 자주 중얼거린다.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천지가 그렇게 안타까웠고, 또 나 같았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천지의 말이 아니라 저 말이었다. 책을 덮고도 나는 자주 숨을 구멍을 파놓고 내게 사과하는 이들을 보았다. 나는 이따금 천지였지만 이따금 직접 사과를 받기도 했다. 숨을 구멍이 있는 사과.

먼지가 쌓인 기억이라 당연히 저 말을 그대로 뱉지는 않았다. 숨을 구멍은 숨구멍으로 바뀌기도 했고, 말투의 어미는 중얼거릴 때마다 바뀌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그 페이지를 펼치고 울었던 날을 생각한다. 그 순간 이 대사는 내 마음 깊은 곳에 남아버렸다.

우아한 거짓말에서 떠난 이는 천지였다. 그래, 천지는 떠났다. 그래서 남겨진 것은 엄마였고, 만지였고, 화연이었고, 또 많은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남겨졌다고 모두가 천지를 곱씹지는 않는다. 그렇게 <두 번째 엔딩>에서 “천지는 벌써 청소년 자살률 통계로만 남았다.”.

하지만 엄마, 만지는 여전히 남겨진 이들이었다. 천지는 그들을 벌하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들도 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어쩌다 무너진다. 남겨진 이들의 숙명은 지난 기억에 무너지는 것이니까. 천지가 보낸 신호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이들은 남겨져야 했다. 그래서 결국 조잡한 말이 뭉쳐져 죽인 천지를 곱씹게 되었다.

그래도 흘러가는 것

<두 번째 엔딩>에 나온 <우아한 거짓말>의 뒷이야기는 <언니의 무게>이다. 천지의 언니 만지는 남겨졌기 때문이다. 이야기 초반에 엄마의 시점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 이야기의 주축은 만지이다. 만지가 <우아한 거짓말>에서 차마 해내지 못한 것들을 <언니의 무게>에서는 해낸다. 만지는 엄마와 함께 옷장을 정리하며 애써 외면해온 천지의 교복을 버린다. 그리고 만지는 천지에 대한 죄책감을 화연에게 돌린 아이를 말린다. 그리고 그렇게 만지도, 엄마도 흘러가게 된다.

나는 가끔씩 화연이 잘 살았을까를 궁금해했다. 사실 권선징악이나 사필귀정을 믿지는 않는다. 그들이 나에게 한 잘못으로 벌을 받는지, 아니면 어쩌다 운수가 안 좋은 것인지 내가 어찌 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화연이 어떻게 살지가 궁금했다. 여전히 뻔뻔할까. 잊고 평소 같을까.

<언니의 무게>에서 화연은 천지가 되었다. 주변 아이들은 여전했다. 화연을 욕하며 수많은 아이들은 자신의 죄를 잊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을 줄 몰랐다. 재미로 그랬고 아이들도 함께 웃어더랬다. 그런데 즐길 때는 친구였던 아이들이 어느새 단순 관람객들로 태도를 바꿨다.”

아이들은 오직 화연만이 잘못한 것처럼, 자신은 단 한 순간도 천지에게 말을 던지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아이들은 그렇게 그 모든 말들이 하나하나 뭉쳐져 천지를 죽인 것을 잊었다. <우아한 거짓말>에서처럼 아이들은 누군가를 욕하며 자신을 그렇지 않다는 안심을 얻고, 그보다 선한 자신은 그를 평가할 수 있다는 거짓된 우월감 속에서 행복해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천지가 된 것처럼 너도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 없어.”

화연의 말처럼 또 다른 천지는 계속 생길 것이다. 화연은 그저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그렇게 살아갈 화연의 삶은 어쩌면 흐르는 듯 보여도 멈춘 것일 테다. 흐른다는 건 변화를 겪는 이들을 위한 선물이니까.




<언니의 무게>는 아주 짧은 단편이다. 이금이 작가님의 <소희의 방>처럼 긴 외전은 아니다. 하지만 학창시절에 좋아하던 소설의 뒷이야기를 읽어서 좋았다. 화연이 천지를 자신의 성장 발판으로 삼지 않고 그대로여서 좋았다. 천지의 삶은 통계로만 남아 슬펐지만, 동시에 결국 잊히지 않고 흐르기 위해서는 살아야 함을 깨달았다. 천지야, 위로해줘서 고마웠어. 그리고 나의 <우아한 거짓말> 속 모든 이들이 그래도 살아가서, 그렇게 흘러가고 있어서 고마워.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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