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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bliners (Paperback) - Penguin Twentieth-Century Classics
Penguin Classics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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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블린의 거미줄에 걸린 인물

 

이 작품에서 가장 존재감이 강한 인물은 Mrs Mooney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소설 첫 문장의 주어 자리부터 Mrs Mooney가 차지하고 있고, 서술 분량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46쪽의 2/3 정도에서 그녀가 하숙집을 차리게 된 배경이 나오며, 47쪽부터 48쪽 중간까지는 그녀가 자신의 딸 Polly가 누군가와 관계가 진전되어 잠자리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부분이다, 48쪽부터 49쪽 중간까지는 Mrs Mooney가 도란과 만나면 어떻게 공방을 벌일지 생각하는 부분이다. 6쪽 반짜리 소설에서 Mrs Mooney만을 서술하는 데 3쪽 넘게 소모된 것이다. 폴리가 등장하는 부분이 2(47, 48, 50, 51, 52의 일부), 도란을 다루는 부분이 2쪽 반 정도임을 감안하면 그녀의 존재가 더욱 도드라진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Mrs Mooney가 보이는 특성에 있다. 소설 전반부에서 Mrs Mooney“She governed her house cunningly and firmly, knew when to give credit, when to be stern and when to let things pass.”라는 말로 표현된다. 즉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맞게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이러한 솜씨를 이용하여 Mrs Mooney는 자신의 ‘intention’에 맞게 Doran이 움직이도록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한다. 먼저 폴리를 타이피스트로 보냈다가 하숙집 일을 돕게 한다. 이는 “the intention was to give her the run of the young men”에서 알 수 있듯, 딸이 괜찮은 신랑감을 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다 딸이 건실한 남자와 잘될 기미가 보이자 결혼을 요구해도 될 때까지 기다렸다 개입한다. 사실상 소설 전체에 Mrs Mooney의 손길이 뻗어 있는 셈이다.

이때 내용이 제시되는 순서는 Mrs Mooney가 보이는 조작자(manipulator)의 면모를 더욱 강화한다. Mrs MooneyDoran과 담판을 짓기 전 머릿속으로 자신의 패를 점검하고 승리를 확신한다. Doran의 생각은 그 다음에야 제시되는데, 이는 Mrs Mooney가 예상했던 것과 들어맞는다. 예를 들어, 그녀는 “he had been employed for thirteen years in a great Catholic wine-merchant’s office and publicity would mean for him.”라며, 가톨릭계 포도주 상점에 다니는 사람이 결혼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여긴다. 이에 DoranMrs Mooney가 예상한 대로 “The affair would be sure to be talked of and his employer would be certain to hear of it.”라며 폴리와 저지른 그 일(the affair)’이 직장 생활에 불러올 파장을 생각한다. 이처럼 Mrs MooneyDoran 순으로 내용을 배치하면 그 반대 순서일 때보다 Mrs Mooney가 예측한 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는 점이 부각된다. DoranMrs Mooney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The Boarding House”에서 “The Prophet’s Hair”와 달리 조작자가 등장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The Boarding House”의 인물들이 고정된 체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가톨릭 교리는 하숙집 사람들의 가치체계를 지배한다. 예를 들어 Doran그 일에 대해 고해를 한 후 신부의 반응을 기초로 죄의 무게를 가늠한다. Mrs Mooney도 남편에게서 위협을 받자 신부한테 가서이혼이 아닌 별거 허락을받아낸다. 즉 가톨릭을 대변하는 ‘priest’에 기대어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 후 적절한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다. 동시에, 가톨릭적인 가치관은 인물이 타인의 시선 아래에 놓이면서 더욱 강화된다. “Dublin is such a small city: everyone knows everyone else’s business.”에서 알 수 있듯, 하숙집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인물은 더블린, 더 좁게는 하숙집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생활하며 타인에게 감시당한다. 그리고 주변인의 가치체계에 따라, 즉 가톨릭의 기준에 근거하여 평가받으며 자신의 행동을 제약한다.

따라서 “The Boarding House”에서는 주어진 상황에서 인물이 어떻게 행동할지 가늠할 수 있다. 사회 전체에 깔린 고정된 규범과 사회 구성원들의 시선이 인물에게 압력을 가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때 누군가를 규범에 어긋나게 행동하도록 유도하면 금기 위반을 빌미로 그를 구속할 수 있다. Mrs Mooney가 도란을 둘러싼 규율을 파악하고 그가 폴리와 그 일을 저지를 때까지 기다린 후, 결혼 외의 출구를 봉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부분에서 “The Prophet’s Hair”“The Boarding House”와 큰 차이를 보인다. 전자에서는 하나의 지배적인 가치체계가 공간 전체를 속박하지도, 이로 인해 인물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이 특정 범위로 한정되지도 않는다. 우선 “The Prophet’s Hair”에서는 가치관이 여럿 등장한다. 돈을 좇아 불법적인 행위를 하는 인물도, 채무자까지도 예의바르게 대우하는 인물도, 그리고 철저히 이슬람 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인물도 있다. 이때 가치관이 다른 인물끼리 충돌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Hashim이 유물을 손에 넣은 후 끔찍하게 이슬람 교리를 따르며 가정의 평화를 위협하자, Huma는 아버지에게 “she would wear no cloth over her face”라며 공공연히 대든다. 비록 집에서 쫓겨나기는 하지만, Huma의 대응 방식은 Doran이 더블린의 사회 규범에 순응하는 모습과는 분명히 다르다.

“The Boarding House”의 등장인물은 시종 가톨릭의 기준을 고수하며 언행을 평가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hair’의 영향으로 특정 인물의 가치관이 바뀌기도 한다. 그 예로 Hashim은 처음에는 종교적(‘religious’)이라기보다는 세속적(‘secular’)인 영역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는 스스로를 “not a godly man”, “a man of the world, of this world” 등으로 칭한다. 그리고 우연히 유물을 주웠을 때 ‘hair’보다는 그것을 담은 ‘the silver vial’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유물을 얻고 나서 종교적 근본주의자로 탈바꿈하여 쿠란에 극도로 집착하게 된다.

이때 ‘hair’는 그것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데, ‘hair’가 상황을 어떻게 바꿔놓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인물이 그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 어떤 행동을 보일지도 예상할 수 없다. 예를 들어 ‘hair’는 고작 몇 분 동안 Sheikh Sin의 집에 있었는데, 다리가 멀쩡하지 않았던 Sin의 아들들은 ‘hair’덕에 비장애인이 되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뛸 듯이 기뻐하는 게 맞지만, 그들은 ‘hair’가 가져다준 기적(‘miracle’)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구걸하여 얻는 수입이 현저하게 줄었기 때문이었다. 예상 가능한 상황에서 예상 가능한 결과가 도출되어야 조작자가 있을 수 있는데, “The Prophet’s Hair”에서는 상황도 대응도 변칙적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Mrs Mooney처럼 특정한 규범을 내세워 타인을 옥죄지 못하고, 조작자는 등장할 수 없다.

정해진 가치체계에 따라 돌아가는 하숙집에서 인물은 크게 두 가지 행동양식을 보인다. 하나는 각종 규범에 그저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규범을 파악하고 상황을 변화시켜 제 목적을 달성하는 것, 즉 조작자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이때 Doran는 전자의, Mrs Mooney는 후자의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작중에서 인물이 제시되는 부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술자는 인물을 설명할 때 주로 그들의 행동이나 외부의 평판을 끌어온다. 먼저 DoranMrs Mooney의 눈에 [A]와 같이 비치는데, 이는 Doran이 보인 행동이나 생각([B])과 상당히 맞아떨어진다.

[A] “the man who had seen something of the world”

“a serious young man, not rakish or loud-voiced like the others”

“he had a good screw for one thing and () a bit of stuff put by.”

[B] “he attended to his religious duties and for nine-tenths of the year lived a regular life.”

“he had money enough to settle down on.”

“When he was dressed he went over to her to comfort her.”

Mrs Mooney도 그녀에 대한 서술([C])과 그녀의 행동([D])이 부합한다.

[C] “She was a woman who was quite able to keep things to herself: a determined woman.”

[D] “She governed the house cunningly and firmly, knew when to give credit, when to be stern and when to let things pass.”

“She watched the pair and kept her own counsel.”

“still, Mrs Mooney did not intervene. () At last, when she judged it to be the right moment, Mrs Mooney intervened.”

“She counted all her cards again”

이처럼 Doran은 종교 행사에 꾸준히 참여하고 돈도 꽤나 있는, 건실한 신랑감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Mrs Mooney는 상황을 파악하는 데 능하고, 무언가를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목표를 이루는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Polly는 이 둘과 다르다. 앞의 두 사람은 비교적 정체성이 하나로 모여 있으나, Polly는 양면적인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Polly47쪽에서 “perverse madonna”, 48쪽에서 “her wise innocence”를 지닌 존재로 표현된다. 순결하기도 하고 조금 엇나가기도 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Polly에게는 정반대의 성질이 동시에 부여되기 때문에 일견 “The Boarding House” 속의 규범에서 자유로워 보인다. DoranMrs Mooney는 하나의 성격을 고수하며 규범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지만, Polly는 양 극단을 넘나들며 행동반경을 넓히고, 이로써 더블린 사회가 요구하는 통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한 인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Polly는 사회의 구속에서 벗어난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머니인 Mrs Mooney처럼 규범을 인정하고 활용하는 존재에 더 가깝다. 이는 Polly가 두 가지 특성 중 어디에 무게를 둘지를 상황에 맞게 선택한다는 점에서 유추할 수 있다. Polly는 어머니인 Mrs Mooney의 암묵적인 지지 하에 신랑감을 물색한다. 하지만 멀리서 힐끔거리기만 해서는 적합한 남자를 발견하거나, 이 사람이 신랑감으로 걸맞은지 정확히 판단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Polly는 하숙집에서 발랄하고 살짝 문란하며, “perverse”한 인물로 행동한다.

그렇게 그녀는 Doran을 만나고부터 조금씩 태도를 바꾼다. 이는 “Polly began to grow a little strange in her manner”에서 유추할 수 있다. 태도가 이상해졌다는 말은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ollyDoran과 친밀해지고 나서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보였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Polly가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녀는 은근히 유혹적이면서도 정숙한 여인, “perverse madonna”가 되어야 한다. 아무한테나 추파를 던지는 상대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순조롭게 결혼으로 골인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이상적인 여인상인, 순결하고 정숙하며 아름다운 여성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PollyDoran을 유혹하여 잠자리를 함께 해야 한다. 당시 혼전 관계(fornication)는 가톨릭에서 죄로 간주하는 행위였다. Doran은 가톨릭이 제시한 규범을 어기는 순간 모든 생활이 어그러지는 상황에 놓여 있다. 따라서 혼전 관계를 하면 Doran에게 결혼을 요구할 수 있는 결정적인 명분이 생긴다.

혼전 관계를 완료한 시점부터, Polly는 겉으로 순수한 피해자로서의 면모를 부각해야 한다. 그래야 치떨리는 일을 당한 어머니의 논거에 힘이 실리기 때문이다. 미숙하고 세상 물정에도 서툰 PollyDoran에게 이용당한 것이었고, Doran은 감히 소중한 딸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므로 보상을 해야 했다. 바로 결혼으로 말이다. PollyDoran의 목을 끌어안고 이제 어쩌면 좋으냐며 울다가, 눈물을 닦고 자신을 진정시킨다. 이윽고 그녀는 걱정 대신 미래의 희망과 환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이는 자신과 Doran이 결혼하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확신이 없다면, 결혼하지 못할 경우 자기의 처지에 대한 우려가 앞서야 한다. 명예가 실추되고 혼삿길까지 막힌 여자를 누가 데려갈지 걱정하면서. 하지만 앞서 Mrs Mooney와 면담하면서 했던 생각에서 나오듯, Polly순진하면서도 알 건 다 아는자신이 어머니의 의도를 간파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지 않아 한다. 이를 고려하면, Polly는 어머니가 자신을 부르기 전에, “wise innocence”를 십분 활용하여 Doran은 자신과 결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PollyHashim처럼 우연한 계기로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정체성이 전환된 것이 아니다. Polly는 상반된 면모를 함께 지니고 있으며,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변할 수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녀가 양면성을 보이는 것은 하숙집에 작용하는 규율이 Polly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Polly가 어머니의 의도를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과 소설이 결혼으로 마무리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Polly의 의도는 “give her the run of the young men”이 된다. 그런데 Polly는 종교색이 짙은, 고정된 가치체계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야 한다. 목적이 세속적이라도,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규범의 구속력을 빌려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Polly“perverse madonna”가 되어야 한다.

“The Boarding House”의 등장인물은 “The Prophet’s Hair”에 비해 훨씬 경직된 행보를 보인다. “The Prophet’s Hair”에서 Sheikh Sin“It would be necessary, he whispered, for him to vanish for a while.”에서 알 수 있듯 잠시 은신처에 숨어 있으려고 한다. 비록 얼마 안 있어 잡혀 죽긴 했지만, Sin은 자신이 사는 곳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인물이다. 이에 비해 Doran은 머릿속으로는 지붕을 뚫고 다른 나라로 날아가고 싶어 하지만, 현실은 결혼으로 끌려가는 처지다. 여기에는 인물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숙집, 더 넓게는 더블린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Mrs MooneyPolly도 나름대로 굳어진 사회 규범을 적절히 활용하지만, 결국 더블린의 하숙집 안에서만 살길을 찾는다. 이 둘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더블린에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매여 있다는 점에서는 Doran과 다를 게 없다. 인물은 이로써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교리와 규범에 얽매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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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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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는 조해진 작가가 썼으며, 201310월에 문학과지성사가 이달의 소설로 선정한 작품이다. 글은 A4 9쪽 정도로 상당히 짧다. 하지만 작가가 글을 정교하게 구성한 덕에 다 읽고 나면 소설책 한 권을 완독한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이야기는 공항에 도착한 가 유리창 밖에서 눈이 내리는 걸 보며 권은을 떠올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기자인 는 분쟁지역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사진작가 권은과 인터뷰를 한다. 권은은 인터뷰 말미에 게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지고, 그 말을 계기로 는 그녀에게 두 번째 만남을 청한 후 여러 이야기를 듣는다. 이후 권은은 시리아 난민캠프에 방문했다가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는 병원에서 권은을 만난 후 뉴욕의 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참석한다. 권은이 언급했던 <사람, 사람들>를 본 가 극장을 나서며 권은과의 기억을 더듬는 모습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작가는 권은과의 인터뷰, ‘의 기억과 같은 과거의 것들을 다큐멘터리를 보러 맨해튼으로 떠난 현재의 상황과 번갈아 배치한다. 이러한 구성 덕분에 궁금증이 생겼다가 풀리고, 다시 생겼다가 풀리기를 반복하면서 작품 읽기는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작가의 묘사도 탁월한데, 특히 가 다큐멘터리를 보는 장면에서 돋보인다. 독자는 의 눈으로 권은이 두 번째 만남에서 언급했던, 헬게 한센의 <사람, 사람들>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바라보게 된다. 글을 따라가다 보면 머릿속에 카메라의 초점, 카메라가 담는 사람들의 모습, 인터뷰 대상자의 말과 표정 등이 실감나게 그려진다. 마치 미국의 어느 극장에서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다만 고마우면서도 아쉬웠던 것은 작가가 어떤 부분이 나중에 복선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직접 알려준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 일종의 힌트들이기도 했다. () 하지만 그날 그녀가 내게 건네고 싶었던 것이 () 열쇠와도 같은 것이었음을, 그때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권은과의 두번째 만남이 없었다면, 그래서 ()에 대해 듣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평생 그녀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힌트들은 좀더 시간이 흐른 뒤에야 () 내게로 왔다.

작가는 위와 같은 서술을 통해 지금 인물이 한 행동이 미래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짚어준다. 그리하여 독자는 이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상상하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글을 읽어나간다. 이러한 서술은 독자가 뒤에 나올 내용에 집중하게 하고 글을 잘 이해하게 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복선을 알려주기보다는, 독자 스스로가 복선을 알아챌 수 있도록 넌지시 말해줄 수는 없었던 걸까. 글을 여러 번 읽으면서 인물의 말과 행동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도 나름의 재미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조금 아쉬웠다.

작품에서는 주로 장-알마, ‘’-권은이라는 두 관계가 두드러진다. 장은 유대인인 알마를 지하 창고에 숨겨 주었을 때 악보를 음식 바구니에 넣어주었다.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알마는 그 악보를 소리 없이 연주하며 힘겨운 은신 생활을 견뎌냈다. ‘는 허름한 집에 혼자 있는 권은을 매번 찾아가며, 나중에는 카메라를 선물하여 권은이 사진 촬영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작가는 두 관계를 다큐멘터리의 출연자와 시청자라는 고리로 연결하여 공통점을 부각한다. 바로 타인을 향한 관심이 누군가에겐 큰 의미가 있을 수 있고, 심지어 누군가를 절망의 늪에서 꺼내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폐쇄적인 SNS가 유행하고,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이 작품을 권하고 싶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나는 믿어요.”라는 노먼의 말이 그들의 가슴에 와 닿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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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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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피부 속에 안경을 품고 산다

<영혼 없는 작가> 서평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지만 실상 당연하지 않은 것에는 뭐가 있을까? 머리를 쥐어짜도 막상 떠오르는 것은 얼마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당연하다는 말은 너무나 익숙해져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못한다는 뜻이니까. 마치 피부 위의 옷감, 책 속 글자의 배열 방식, 더 나아가 24시간과 365일이라는 시간 체계처럼 말이다. 우리는 대체 왜, 언제부터 피부 위에 날실과 씨실의 집합체를 올려놓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어절씩 글을 읽으며, 60진법의 틀 안에서 숨쉬어온 것일까?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 투성이지만, 우리는 원래 그런 것이라는 이유로 애써 물음을 회피한다.

<영혼 없는 작가>를 읽다 보면 모국어도 그 당연한 것들 중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언어를 구사할 때, 우리는 문장 안의 단어가 내뿜는 이미지에 묶인다. 누군가를 백인, 황인, 흑인 중 하나로 칭하는 순간 단어의 이미지가 시각을 대체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여러 언어의 울타리를 넘나들며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려 한다. 이는 다와다 요코가 여러 언어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다와다는 일본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에 재학하며 러시아문학을 전공했다. 이후 시베리아 기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기도 했으며, 나중에는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일본어나 독일어로 글을 써냈다. 이렇게 그녀는 일본어, 러시아어, 독일어라는 세 가지 언어를 공부하며, 어릴 적부터 다져온 글쓰기 실력을 연마하며 언어에 대한 성찰의 깊이를 더했고, 이를 바탕으로 언어들을 익숙하고 독특하게 비평한다.

책에 다양한 사례가 나오지만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다. 작가는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일본어 아타시, 와타시, 보쿠, 오레보다 독일어 이히ich를 더 아낀다. ‘이히는 앞의 넷처럼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어떤 속성에 종속되게 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반대로 이미지가 없다고 여겨지는 단어에 특성을 부여해보기도 한다. 비인칭 주어 ‘es’가 여러 문장에서 무슨 역할을 담당하는지 떠올려보는 것처럼 말이다. 또 작가는 단어가 품은 뜻과 철자, 발음 등의 형식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도 지적한다. 예를 들어 독일어의 나스라는 단어는 일본어로 가지라는 뜻을 지닌 나슈로도 들릴 수 있다. 독일어를 모르는 가야코는 음이 비슷한 한자를 이용해 독일어 문장을 발음할 수 있다. 또 작가는 편지에 쓰인 프랑스어 du를 보면서 독일어 du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오만가지 물건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서술을 통해서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 즉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눈을 선물한다. 그 눈은 제일 먼저 언어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이 맺는 관계부터 담아낸다.

 

눈앞에 길쭉한 무언가가 보인다. 몸체는 단단하며 한쪽 끝은 뭉툭하고 다른 쪽 끝부분은 꽤나 뾰족하게 생겼다. , 원래는 같은 모양이었지만 칼 따위로 깎아내서 한쪽만 뾰족하게 되었구나 싶다. 뾰족한 쪽 끄트머리의, 색깔이 조금 다른 부분을 손가락으로 지분거리고 나니 검은색 가루가 옅게 묻어나며 손끝에 그림을 그린다. 소용돌이무늬다.

 

짐작했겠지만 무언가는 바로 연필이다. 한국인 화자라면 연필이라는 말을 듣고 곧바로 위에 장황하게 서술한 무언가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엠피쓰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이들에게 위의 3음절 단어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치엔비’, ‘까란다슈는 어떤가? 이 세 단어는 모두 연필과 같은 뜻이다. 하지만 단어만 놓고 봐서는 단어가 지니는 의미를 이끌어 내기 어렵다.

자음과 모음의 낯선 결합체를 혀로 굴려 발음하면서 우리는 언어는 자의적이며 공허하다는 것을 몸소 깨닫게 된다. 언어는 자신의 생각을 타인의 머릿속에 박아 넣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는 말이 나타내는 대상과 아무 관련도 없으며, 이 때문에 어떤 말이나 글자가 와도 문제 될 것이 없다. ‘사과라는 글자를 이루는 아홉 개의 선분, 앞의 두 글자를 읽을 때 나타나는 혀와 입술의 움직임, 그로 인한 공기의 마찰, 이 모든 것들이 빨갛고 달콤한 열매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는 작중에서 다와다 요코가 그러나 이제 연필을 일본어 엠피쓰가 아니라 독일어 블라이슈티프트라고 부른다. ‘블라이슈티프트라는 단어는 내가 완전히 새로운 물건을 다룬다는 느낌을 주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단어는 내 감정과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았다.”라고 한 것과 연결된다.

언어가 사실 텅 비어있다()는 걸 슬쩍 느끼게 한 것도 모자라, 작가는 독자에게 언어가 없는 상황까지 떠올려보게 한다. 작가의 다른 저작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 등장한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베트남 소녀가 프랑스 영화를 보거나, 유창한 통역사가 말을 못 하게 되고 죽은 사람과 이야기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혼 없는 작가>에서는 언어의 부재를 겪는 인물로 맨 앞 챕터의 샤샤를 등장시킨다. 그녀는 글을 읽지 못하지만 모든 것을 정확하게 관찰하려고 했다.’ 그녀는 글씨를 쓰는 일과 관련된 것 빼고는 뭐든 무리 없이 해낼 수 있다. 비누 포장지의 그림이 내용물과 별 관련이 없어도, 포장지 속의 것이 비누라는 걸 알고 있다.

언어가 없는 상황은 떠올리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언어를 매개로 세상과,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도 소통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 사용은 인간의 특권이자 우월함의 증명으로 여겨진 게 사실이다. 인간만이 언어를 사용하여 더 많고 복잡한 정보를 공유하고 상속할 수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언어는 세상을 탐구하는 망원경만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벗어날 수 없는 족쇄이다. 대상을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화자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닌, 그 언어가 주는 이미지와 그 대상이 혼합된 무언가를 얕게 소비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글을 읽지 못하는 샤샤가 대상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경청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말이라는 도구를 가진 이들보다 더욱 자세히 주변을 뜯어보며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래 인용문에서 작가는 모국어 및 모국에서의 경험이라는 렌즈로 덮인 눈보다, 대상을 직접 느끼고 몸속으로 들여보낼 수 있는 혀로 느끼고 싶어 한다, 여기서 눈을 언어에, 혀를 문맹의 상태에 빗대어도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두 상황의 공통분모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나 유럽을 내 눈이 아니라 내 혀로 감지하고 싶다. 내 혀가 유럽의 맛을 느끼면 그리고 유럽을 말하면 아마도 나는 관찰자와 대상이라는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먹은 것이 위에 들어가고 말한 것이 뇌를 거쳐서 살 속으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작가는 언어와 사고의 관계에서 모국어와 사고의 관계로 범위를 좁히고, 모국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풀어낸다. 흔히 모국어라고 하면 익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떠올리기 쉽다. 그래서 <영혼 없는 작가>에 드러난, 모국어에 대한 일종의 반감은 독특하게 다가온다.

 

엄마말(모국어)에서는 단어들이 사람과 꼭 붙어 있어서 도대체 말에 대한 유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없다. 엄마말에서는 생각이 단어와 너무 꽉 들러붙어 있어서 단어나 생각이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닐 수가 없다.”

 

이처럼 작가는 독자에게 생각이 모국어라는 포승줄에 묶이게 내버려두지 말라며 경각심을 갖게 한다. 굳이 익숙함을 경계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어와 생각이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의미에 대한 성찰은 뒷전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모국어의 단어를 듣자마자 단어에 대응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그 말을 쓸 수 있다. 물론 일상적인 대화를 할 때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논의가 깊이 있게 전개될 때, 생각의 뼈대인 언어가 정교하지 못하면 뒤따르는 생각은 자연히 부실해진다. 작가가 유창하게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보면 구역질이 난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술술 문장을 풀어내고선 그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낄 수 없는 모습은 차라리 가엾다.

그렇다면 말에 접착된 생각, 생각에 구속된 말을 분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는 모국어에서 생각과 말이 너무나 꽉 매여 있다고 한 후,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다른 언어와의 접촉에서 찾는다.

 

외국어에서 사람들은 스테이플러 심 제거기 같은 것을 가진다. 이 제거기는 서로 꼭 붙어 있는 것과 꽉 묶여 있는 것을 모두 제거한다.”

 

스테이플러 심이 종이들을 흩어지지 않게 붙들듯이, 모국어로만 의사소통을 하면 생각과 말이 분리되지 못한다. 하지만 외국어를 배우면 자연히 모국어와 비교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치 아프리카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원주민을 보고 나서야 자신들이 옷을 입었다는 것을 자각한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는 자신의 배우자를 우리 아내 혹은 우리 남편이라고 칭한다. ‘우리라는 말은 전혀 어색하지도 않을뿐더러, ‘우리를 수식어로 취한 덕에 수식받는 대상은 자연스럽게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영어권 화자들이 이를 본다면 굉장히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이들에게 자신의 배우자는 ‘my wife, my spouse, my husband’기 때문이다. ‘my’‘our’이 되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에서 일부다처제 혹은 일처다부제라는 단어가 떠오르게 된다. ‘우리라는 단어 하나에서조차 문화적 차이를 엿볼 수 있는데, 하물며 두 언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글을 지어내는 작가라면 어떠할까. 그녀는 여러 저작에서 자연스러운 표현이라는 말에 감추어진 고정관념을 쪼개고, 그 틈을 비집고 나오며 다른 사람에게도 갇힌 생각에서 빠져 나오라는 듯 손짓한다.

사실 현 상황에서 외국어를 배우며 이러한 것을 느끼기에는 무리가 있다. 외국어가 그저 좋아서, 혹은 외국어에 호기심이 생겨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공부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순수한 호기심이 아니라 각종 시험을 치르기 위해 외국어를 모국어에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이를테면 끼워 맞추는 공부를 했다. 슬프게도 외국어와 모국어 어휘 간 의미상의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모든 문장을 한국어로 해석해서 머릿속에 쑤셔 넣고, 허겁지겁 낯선 어휘를 집어삼켜온 것이다. 자연히 언어를 성찰하기보다는 암기에만 급급하게 되었고, 생각의 확장보다는 어휘력의 확장에 방점을 두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대일 대응의 관점은 번역에도 적용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한국어 단어와 그에 해당하는 외국어 단어를 짝지어 공부하고, 외국어 문장을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해야 풀 수 있는 문제들에 익숙해져 버렸다. 이는 원본과 번역본이 같고, 한 언어가 다른 언어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사실 완벽한 번역은 있을 수 없다. 각 언어가 만들어진 역사, 문화, 사회적 배경 등이 모두 다른데 어떻게 완벽히 똑같은 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는 외국어를 우리말로 어떻게든 치환해서 우리의 렌즈를 통해 보려고 한다. 그렇게 모국어라는 좁은 대롱으로만 세상을 보다가 조금이라도 착란이 생기면 절망한다. 우리의 렌즈로는 잘 보이지 않는, 그 나라만의 고유한 표현, 단어 간의 뉘앙스, 독특한 문화 등을 접할 때 말이다. 절망한 후에는 보통 흐릿하게 안 보이는 것은 무관심하게 넘어가거나 시험에 나오지도 않는,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독일어를 대하는 태도는 이와 확연히 다르다.

 

내가 처음 함부르크에 왔을 때 그때 이미 독일어 알파벳은 다 알고 있었지만 단어들의 뜻은 몰랐기 때문에 글자들을 매번 한 자 한 자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나는 입 안에서 S자를 반복해 보았고, 그때 내 혀에서 갑자기 아주 낯선 맛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나는 혀가 어떤 맛을 낸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문법성을 단어에 속한 자연스러운 일부분으로 느낀다고 쓰여 있다.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러한 감정을 갖게 되는지를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 예를 들어 만년필을 볼 때 나는 이것이 정말 남자라고 느끼려고 애를 썼다.”

 

작가는 독일에 도착해서 특정 발음을 계속 해보다가 혀의 맛을 처음 느낀다. 새로운 언어를 구사하면서 익숙함을 떨치고 낯섦에 다가가는 것이다. 또한 물건을 보며 물건의 성을 느껴보려고 했다. 일본어에는 독일어의 문법성과 같은 개념이 없기 때문에 작가는 처음 독일어를 공부할 때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물건의 성별을 무작정 외우거나 문법성을 무시하지 않고, 외국어를 외국어 자체로 느끼려고 했다. 이러한 방식은 세계를 보는 대롱 하나를 새로 깎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고되다. 하지만 동시에 외부 세계를 보는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외국어를 모국어로 흡수하려는 발버둥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영혼 없는 작가>는 우리가 익숙함의 틀 안에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동시에 외국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알려준다. 우리는 사실 맨눈으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다. 작중의 살이 안경 속으로 자라 들어간 것처럼 안경은 내 살 안으로 자라 들어갔다.”라는 말처럼, 우리의 눈에는 모국어라는 안경 렌즈가 찰싹 달라붙어 있다. 타국의 언어를 접하면 뒤늦게 이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영어의 ‘our’와 한국어 우리의 용례를 비교하면서 한국의 공동체의식을 엿보듯이 말이다. 렌즈의 존재를 자각한 외국어 학습자는 말과 생각이 그리 단단히 연결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고 차츰 그 매듭을 풀어낸다. 그렇게 언어의 수갑에서 해방된 후에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자유롭게 생각을 펼칠 수 있게 된 사람은, 두개골 안에 가둔 영혼을 꺼내어 영혼 자신의 삶을 영위하도록 놓아주는 경지에 이르고, 비로소 영혼 없는 작가로 거듭난다.

책을 덮은 순간부터, 차츰 각막이 근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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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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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닳아빠진 신발의 아름다움

 

많은 작품에서 자연은 찬미의 대상이다. 자연은 제 살을 내어주면서까지 인간을 보듬고, 풍요와 절경까지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드>에서는 딴 세상 얘기다. 태양은 실종되었고, 모든 것은 검게 그을렸으며, 말은 지시대상을, 따라서 그 실체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저 재만이 만물이 존재했었다는 마지막 근거가 되어 끊임없이 공중에 흩날릴 뿐이다. 책의 중심인물인 남자소년은 춥고 황폐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남쪽으로, 바다로 향한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통조림과 기름을 긁어모으고, 매일 밤 방수포를 덮어 추위를 달랜다.

생산능력을 상실한 세계에서 삶은 곧 치열한 경쟁이다. 당장 자기가 살아남기도 급한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안위까지 챙기겠는가? 이러한 각박한 태도는 작가의 묘사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불에 휩쓸린 시체와 말라비틀어진 주검은 길가의 돌멩이처럼 무미건조하게 그려지며, 대부분의 경우 놀랄 일도 못 된다. 이러한 극한 상황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반갑기보다 경계할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 뺏거나 뺏기거나, 둘 중의 하나로 귀결될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착은 미친 짓이다. 살인, 강간, 식인이 생존의 미덕인 이곳에서 자칫 눈에 띄었다간 목숨까지 탈탈 털릴 것이기 때문이다. 병에 걸린 아버지와 나약한 아들은 살아남기 위해 숨고, 숨기고, 뺏긴 것을 도로 뺏으며 힘겹게 떠돈다.

그래서일까, 이 무채의 세계에서 남자와 소년의 관계가 유독 빛을 발하는 것은. 나무들이 뿌리를 얽어 땅 위에 바로 서듯,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붙들며 발걸음을 내딛는다. 먼저 남자는 병에 걸렸지만 안간힘을 쓰며 소년을 보호한다. 또한 매번 소년이 죽음의 유혹을 느낄 때마다 살아야 한다고 말하며, 결국 그를 잡아끌어 걷게 만든다. 그는 마치 주문처럼 시종일관 가야 돼를 외치며 결과적으로 생존자들의 무리로 소년을 데려다 놓는다. 그렇다면 소년은 남자에게 무슨 도움을 주었을까? 단순하게 보면 아들은 징징거리기 바쁘고 식량만 축내는 인물이다. 하지만 소년이 없었다면 이 여정은 결코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소년은 그의 아버지가 살아가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소년은 남자와 죽음 사이의 모든 것으로 그려지며, 어린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죽음을 억누르고 걸음을 옮긴다. 또한 소년은 금수가 수두룩한 세상에서 둘 모두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동을 거는 역할을 담당한다. 작중에서 소년은 길 위의 사람들을 걱정하고 우연히 만난 노인에게 음식을 나누어 준다. 인간의 존엄을 수호하고 좋은 사람이자 불을 운반하는 사람으로 남으려는 모습은 그 자체로 특별하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부자가 서로에게 의지하는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이들은 왜 죽음을 택하지 않았을까? 남자의 아내이자 소년의 어머니인 여자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음을 택했다. 남자의 회상 속에서 그녀는 생존자공포영화에 나오는 좀비라고 칭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사실 매캐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고통 받으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남자도 이를 모르진 않았다. 그가 귀중한 총알 두 개를 자살을 위해 남겨두었고, 도살장과도 같은 집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순간 소년을 죽일지 말지부터 떠올리는 모습을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남자와 소년은 죽음을 애인삼거나 있지도 않았던 세계나 오지도 않을 세계의 꿈에 취하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 앞에 무력하게 주저앉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혹한 현실과 싸웠고, 마침내 남자의 심장과도 같은 소년은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아버지는 전사했지만 아들은 그와 대화할 것이다. 또한 소년 안에 존재하는 을 운반하여 다른 좋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들과 함께 생존할 것이다.

남자소년이라는 보통명사는 독자 자신까지도 품을 수 있다. 너덜거리는 지도를 안고 각자의 로드를 따라 걷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용기를 얻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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