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 크로스로드 SF컬렉션 4
이영수(듀나) 외 지음 / 사이언티카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APCTP)에서 운영하는 웹진 <크로스로드>에 2년간 실린 단편들을 모은 앤솔로지. <얼터너티브 드림>(2007), <앱솔루트 바디>(2008), <죽은 자들에게 고하라>(2009)에 이은 네 번째 단편집으로, 여러 작가들의 다양한 작풍과 세계관을 한 권의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전작들의 장정이 다소 복잡하고 어두침침한 느낌을 준 데 비해 이번에는 핑크를 기본으로 하여 산뜻하면서도 익살맞게 표지를 꾸며서 훨씬 밝은 인상을 준다. 표제작은 UFO를 언급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통일된 주제가 있는 것은 아니며 모든 작품이 UFO나 외계인을 다루고 있지도 않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벌써 4번째 앤솔로지인 만큼 작품들도 독자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명료함과 안정감을 갖추고 있다. 다만 천기누설로 가득한 박상준님의 편집위원 해설이 앞쪽에 실린 것은 실수가 아닐까 싶다. (독자 여러분은 되도록이면 작품들을 다 읽으신 뒤에 서문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우주와 그녀와 나 / 김린(SeeReal) - 2009년 7월, 크로스로드 5권 7호 수록
연상의 여인을 동경하는 평범한 대학생이 그 여인과의 뜻하지 않은 인연과 희생의 드라마로 인해 지구의 운명을 손에 쥔 중요한 인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 혹세무민과 신과학의 발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기(氣)수련이라는 소재를 외계인과의 의사소통 개념과 연결시켜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다. 스토리 자체는 다소 비약이 심하지만 추상적인 대의(大義)로서가 아닌 극히 개인적인 애정에 기반하여 지구에 대한 사랑에 눈 뜬다는 결말이 설득력 있다.

*시공간-항(港) / 백상준(라퓨탄) - 2009년 11월, 크로스로드 5권 11호 수록
파충류 외계인의 침략으로 멸망 위기에 빠진 인류는 타임머신을 만들어 과거의 인간들에게 경고하고자 특공대를 파견한다. 하지만 시간의 저편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시간여행의 남발로 인해 생기는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관리국의 공무원들. 고전 시간여행물에서 사용하던 단선적 시간관을 폐기하고 다세계 해석을 도입하여 '시간여행으로 인해 평행우주가 파생되고 여행자는 자기 우주의 과거가 아닌 엉뚱한 우주의 과거로 가서 혼란을 일으킨다'는 설정을 전면에 내세웠다. 인류의 파멸이라는 대사건도 평행우주 전체의 안전 앞에서는 한낱 사소한 문제로 축소되어 버리는 비정한 논리가 독자의 가슴을 후벼판다.

*수련의 아이들 / 듀나 - 2010년 5월, 크로스로드 6권 5호 수록
팍팍한 일상을 보내며 언젠가 예쁜 아이를 낳았으면 하고 꿈꾸던 미화원 아줌마가 작업 중에 의문의 외계물질과 접촉한 뒤 이상한 사건에 휘말린다.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법한 신생명체 탄생과 생존의 드라마. 지구인의 입장에서는 끔찍한 생화학적 오염으로 해석 가능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시점을 전혀 달리함으로써 예상치 못한 연민과 감동을 자아낸다. 걸핏하면 세계가 멸망하고 생태계가 괴이하게 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한 듀나 SF의 성격에 비춰보면 굉장히 얌전(?)한 이야기.

*물구나무서기 / 김현중 - 2010년 4월, 크로스로드 6권 4호 수록
주인공은 투시력(클레이보이언스)을 지닌 초능력자이지만 그 힘을 제대로 통제할 수도 없고 별로 써먹을 만한 구석도 없어 무기력한 인생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그를 연구했던 외국 모 기관의 과학자가 지구를 구해달라는 별난 제안을 들고 그를 찾아온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 물구나무서기를 잘 못해서 고민했다는 설정과 '남들이 볼 수 없는 세상을 보는' 투시력이라는 힘을 연관지어 자기의 진정한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을 잔잔하게 묘사한 작품.

*백중(百中) / 김창규 - 2010년 6월, 크로스로드 6권 6호 수록
형사인 주인공은 별 생각 없이 응시한 테스트 때문에 난데없이 신개발 인공지능을 수사 파트너로 배정받아 그를 교육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강철도시>(인간-기계의 합동수사)와 <맥스 헤드룸>(육체를 갖지 않은 개성파 AI), <공각기동대>(사이버네틱 기술로 인간의 뇌까지 좌우하는 세계관)를 합친 듯한 설정과 주인공의 하드보일드한 수사과정이 어우러져 기묘한 상승효과를 일으키는 작품. 인공지능이 보편화된 사회에서 그들의 존재를 겉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생리적 위화감을 떨쳐버리지 못하여 '귀신' 취급하는 인간들의 모순을 보여주는 동시에, '인공지능을 살해하는 것은 과연 살인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라는 철학적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같은 주인공을 기용한 시리즈로 만들어도 괜찮을 듯.

*목격담, UFO는 어디서 오는가 / 조나단 - 2010년 1월, 크로스로드 6권 1호 수록
우연히 UFO를 목격하고 그 실체를 잡아내기 위해 카메라를 구입한 21세기의 한 남자, 그리고 국제선 비행기를 놓쳐 발을 동동 구르다가 의문의 세일즈맨과 접촉하는 22세기의 한 여자. 전혀 관계없어 보이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UFO의 기기묘묘한 운행과 함께 은근슬쩍 하나의 현상에 관한 두 가지 관측으로 연결된다. 미확인 비행물체의 정체에 대한 가설 자체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연결고리로 삼아 시대도 직업도 성별도 다른 두 사람의 인생이 아주 잠깐이나마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는 전개가 왠지 모를 아련함과 유쾌함을 자아낸다.

*사랑 그 어리석은 / 정보라 - 2010년 2월, 크로스로드 6권 2호 수록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스토커의 관점에서 스토킹 과정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이야기. 여자의 사소한 친절을 오해하여 제멋대로 그녀에 대한 짝사랑을 불태우던 한 남자가 자기 자신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점점 무시무시한 범죄자로 변해간다. 주변 상황을 완전히 자기 좋을대로 해석하여 합리화해버리는 남자의 심리가 무섭도록 솔직하게 드러나 있어 오싹한 느낌을 준다. (남자인 내가 읽어도 이 정도니 여자분이 읽는다면 완벽한 호러소설로 비칠 듯) 가장 무서운 것은 이러한 인간형이 소설 속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의 현실에도 엄연히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며, 확실한 결말을 보여주지 않고 최후의 범죄를 준비하는 데서 이야기를 끊은 것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자극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외부세계에서 박해받은 사람들이 타인과의 대면접촉을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망명하는 계획도시'라는 SF적 장치를 빼면 남녀간의 오해와 남성의 아집을 묘사하는 일반소설로 읽어도 좋을 정도.

*달에게는 의지가 없다 / 나병우 - 2009년 10월, 크로스로드 5권 10호 수록
새로운 안식을 찾기 위해 달로 이주하지만 건강악화와 늘어나는 빚에 시달리며 노역을 계속해야 하는 월면노동자들. 그런 이들 중 한 명인 주인공은 고장난 기계 의수를 고치기 위해 지구로 잠깐 돌아왔다가 일이 꼬이는 바람에 점점 더 비참한 지경에 빠진다. 정부의 언론통제, 의료계의 폭리, 경찰의 조작수사 등 각종 사회모순에 직면하여 무기력하게 휘둘리는 주인공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의 상황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노동SF. 어찌보면 이 이야기의 가장 큰 교훈은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일지도...

*전화 살인 / 설인효 - 2009년 6월, 크로스로드 5권 6호 수록
전혀 동기를 알 수 없는 희한한 연속 살해사건. 가해자는 범행 직전 정체 모를 전화를 받고 곧바로 주변에 있던 친지를 죽인 뒤 자기도 자살한다. 각 사건마다 가해자가 이미 죽어버렸고 가해자들끼리 아는 사이도 아니니 범인은 오리무중. 경찰인 삼촌에게 빌붙어(?) 이 사건을 추적하던 대학원생 주인공은 빼어난 추리력을 살려 문제의 근원에 다가가지만 사실 그의 추리에는 심각한 빈틈이 있었다. SF단편이라는 점도 있고 제목에서도 보란 듯이 단서를 주고 있기 때문에 트릭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미스터리라기보다는 미스터리 형식을 빌어 외모에 대한 인간들의 위선적인 태도를 꼬집기 위한 일종의 교훈담. 다만 캐릭터들의 성격이 눈에 띄게 평면적이고 이야기에 굴곡이 없어서 작품으로서의 재미는 약간 떨어진다.

*관광지에서 / 박성환 - 2009년 12월, 크로스로드 5권 12호 수록
시간관광이 일반화된 미래의 어느 시대. 주인공은 독실한 불교 신자인 어머니를 모시고 기원전 480년경으로 날아가 입적하기 직전의 부처를 만나게 된다. 시간여행으로 인해 생기게 되는 논리적 모순에 대해서 잠깐 거론하긴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깊게 들어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의 핵심은 '과거로 돌아가 종교의 시작점이 된 사건이나 인물을 직접 눈으로 목격했을 때 이전과 같은 신앙심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차라리 환상은 환상대로 그냥 남겨두는 게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주인공의 실존적 고민에 있다. 인간 속에 잠재된 신성과 인간 사이의 따스한 교감을 통해 '죽은 종교'에 대한 맹신을 넘어서는 가슴 훈훈한 구도소설.


※의문점 하나 - 서문에서 수록 작품이 '모두 11편'이라고 한 것은 단순한 오타일까, 아니면 원래 11편으로 기획되었으나 무슨 사정 때문에 한 분이 빠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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