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단편집 <퀴르발 남작의 성>으로 소재를 가리지 않는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소설기법 자체를 떡주무르듯 주무르는 재주로 화제를 모았던 저자의 신작 장편. 원래는 계간 <자음과모음>에 2009년 겨울호부터 2010년 가을호까지 게재된 4편의 연작 중편을 한데 묶은 것으로, 각각의 에피소드가 독립된 이야기로서의 특성을 유지하되 나중에 하나로 모아놓고 보면 감춰진 연관성이 드러나도록 기획된 '픽스업' 방식의 작품이다. 따라서 형식상으로는 중단편집에 가까우나 분류상으로는 엄연히 장편소설이다. '살인'과 '복수'를 주된 소재로 채택하고 미스터리와 호러, 판타지를 아우르는 장르의 공식을 재현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화자나 상황에 따라 무한히 달라질 수 있는 '서사'의 유희를 보여줌으로써 소설이라는 표현형식 그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만드는 일종의 실험소설이다. 스마트폰 이용자는 책에 인쇄된 QR코드를 통하여 각 에피소드의 분위기에 맞춰 선곡한 이미지 사운드트랙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있다.

*여섯번째 꿈 - 계간 <자음과모음> 2009년 겨울호(통권 6호, 2009년 11월 30일)에 발표. 역사상의 잔혹한 연쇄살인마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인터넷 동호회의 멤버 여섯 명이 정체 모를 운영자의 초대를 받아 산장에 모인다. 하지만 약속시간이 되어도 운영자는 나타나지 않고, 불안에 떨던 멤버들은 차례차례 누군가의 손에 살해당한다. 때아닌 눈보라로 탈출도 불가능하고 식량도 없는 상황에서 생존자들은 서로를 의심하며 점점 감춰진 인간성의 밑바닥을 드러낸다.

*복수의 공식 - 계간 <자음과모음> 2010년 봄호(통권 7호, 2010년 2월 26일)에 발표. 살인의 순간에 음악을 들려주는 킬러, 한 순간의 재난으로 모든 걸 날려버린 고시생, 죽은 동생의 그림자를 평생 짊어지고 사는 콜걸, 남편의 외도를 포착하고 새 삶을 시작하려는 주부, 도무지 뭘 해도 운이 따라주지 않는 PC방 주인. 이들의 사연은 과연 무엇이며 어떤 지점에서 서로 연결되는 것일까?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인물들이 마치 릴레이 경주하듯 각자의 사연을 들려주는 가운데 서서히 드러나는 복수의 연쇄작용.

*π(파이) - 계간 <자음과모음> 2010년 여름호(통권 8호, 2010년 5월 15일)에 발표. 번역으로 근근이 먹고 사는 삼류 작가 M은 어느 날 서커스단에서 우연히 만난 여인과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낮에는 생계를 위해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밤에는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바쁜 나날을 보내던 M은 눈에 띄게 수척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사람을 잡아끄는 신기한 힘이 있었기에 그 다음을 듣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가 없다. 그 이야기 속에서는 한 남자가 폐쇄된 미로에 갇힌 채 영원히 떠돌고 있다. 탈출했는가 싶으면 또 미로 속이고, 다시 빠져나왔는가 싶으면 여전히 갇혀 있는...

*일곱 개의 고양이 눈 - 계간 <자음과모음> 2010년 가을호(통권 9호, 2010년 8월 20일)에 발표. 동네 구립도서관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작가 '나'는 우연히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이라는 책을 뽑아들고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몰입한다. 그 책에 흥미를 느낀 '나'는 집에 빌려가서 계속 읽으려 하지만 전에 다른 책을 반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출을 금지당한다. 게다가 얼마 후 안과 수술을 받는 바람에 다시 읽으러 가지도 못한다. 결국 '나'는 휴양기간 동안 심심풀이 삼아 책의 나머지 내용을 나름대로 상상해보기로 한다. 폭우가 세차게 내리던 어느 날 밤, 젊은 여배우가 운전 도중에 수상쩍은 남자를 태워준다. 처음에는 그냥 평범한 시골 노인인 척 하던 남자는 서서히 그녀에 대한 집착과 광기를 드러내는데...

각각의 에피소드는 전부 동일 세계관 내에서 벌어지는 것은 아니며, 자체적으로 독립된 틀 안에서 완결성을 띠고 있다. 하지만 때때로 설정이 겹치거나 느낌이 비슷한 인물들이 교차 등장하며, '쌍둥이 남매', '연쇄살인', '복수극', '우연으로 인한 파국', '의도적인 오역', '간질 발작' 등 공통적인 아이템이 사방에 흩어져 있고, 한 작품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다른 작품 속에서 소설 속 이야기로 인용되기도 한다. 같은 에피소드 내에서도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액자식으로 펼쳐지고, 한 이야기가 다른 인물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연쇄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소설이라는 매체 속에서 가능한 모든 구조적 기교가 서커스하듯 펼쳐지는 경이의 한마당이라 할 만하다.

평범한 미스터리를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다소 버거울 수도 있지만, '소설이란, 혹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소설을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면 꽤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 구조 자체는 실험적이지만 제시되는 인물들의 사연이나 세상에 대한 그들의 시선은 매우 생생하고 입체적이며, 그들이 생각도 못한 지점에서 서로 얼키고 설키는 전개의 마술도 눈여겨볼만 하다. 서로 독립적인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각종 장치를 통해 때로는 느슨하게, 또 때로는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네 작품이 한데 모여 형성하는 '무한의 폐쇄미로'를 떠올리며 두 번 세 번 읽어가는 재미도 각별하다. 단순한 보통 이야기에 식상하여 뭔가 색다른 작품을 보고 싶다면 단연코 추천하고 싶다. 다만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답게 잔인무도한 묘사도 가끔 있고 각 에피소드들 사이에도 다소 퀄리티의 편차가 있으므로 그점은 감안하고 읽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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