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 그린 - 버지니아 울프 단편집
버지니아 울프 지음, 민지현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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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블루와 그린

색채의 강렬함과 시선의 전환이 돋보이는 글들이 많았다. 단편집의 시작은 제목인 그린과 블루라는 글이었다.

[그린] 

뾰족한 유리 손가락으로 시작한다.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린 초록이 야자나무의 칼날 같은 잎을 향했다가 다시 사막의 모래, 그리고 대리석 그리고 대리석 사이의 골풀로 옮겨진다. 그 위는 잡초로 덮이고 다시 개구리가 뛰넘고, 해 질 녘 밤의 그림자가 초록을 쓸어간다. 해변의 수면처럼이라는 표현과 밤의 끝에서 파랑이 초록을 사라지게 하는 마법적인 글이었다.

[과수원에서]

미란다는 과수원 사과나무 아래에 긴 의자에 잠들어있다. 그녀가 읽던 책이 잔디 위에 떨어졌고 읽던 문장이 독자의 시선에 다시 읽힌다. 햇살이 사과나무 사이로 옮겨갔다가 다시 그녀가 낀 오팔 반지의 초록빛이 반짝이고 다시 장밋빛, 오렌지빛으로 변하고 미풍에 원피스가 팔랑거린다. 함께 흔들리던 풀들이 고개 숙이고 다시 그녀의 머리 위 사과에 시점이 돌아간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글의 초점이 빙글빙글이란 단어를 연상케 했는데 어지럽진 않았다. 자연스럽게 글의 시점이 변화하는 게 신기했다. 오색 빛처럼 반짝이다 다시 다른 것을 바라보는 게 영상미까지 느껴지게 했다. 자고 있는 미란다의 머리 위에서 종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불어오고 미란다의 상상이 더해져 시끌시끌한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미란다가 잠에서 깨어나며 글이 잠깐 멈추지만 과수원 담장 아래 함께 있었던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마력을 느끼게 하는 글이었다.

[불가사의한 v양 사건] 

v양이라는 이름 하나로 그녀와 그녀의 동생 두 사람을 동시에 지칭하는 효과를 발휘한다고 했는데, 그 말은 v양은 누구든 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v양은 특정하지 않아서 누군가의 의식 속에 쉽게 사라지는 인물이기도 하고, 유령 같은 존재이기도 해서, 유령 같은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존재 주장을 해야 하기도 한다고 했다. 

사라진 v양이 사라지고 도통 마주치질 않자 일상에서 왠지 허전한 느낌을 갖게 되고 한 사람의 부재는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부족한 느낌을 들게 했다.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나 사라진 v양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서고 그녀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리고 그녀의 부재의 결과를 듣고 글을 끝이 난다. 

v양은 시대의 여성들을 뜻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나 일상에서 쉽게 마주친 인물들, 하지만 그들이 없으면 허전하고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존재를 피력해야 한다는 주장이 버지니아의 생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글이었다.

[라핀과 라피노바]

남녀가 결혼식을 올린다. 주인공의 남편 어니스트는 절대 토끼를 닮지 않았지만 부인 로절린드는 자신의 남편의 식사 중 모습이 토끼가 풀을 먹는 모습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라핀이라는 애칭을 지어주고 자신은 암토끼를 지칭하는 라피노바라는 별명을 함께 갖게 된다. 수년의 결혼 생활이 지루하다면 지루할 수 있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라피노바의 세계관을 라핀이 맞춰주며 둘의 세계관은 계속되고 있었고, 마지막 극단적 감정변화와 함께 그 세계관이 끝나며 둘의 관계가 죽는 모습이 굉장히 처연하게 느껴졌다.

결혼 생활의 환상을 한편의 이야기로 잘 정리해 주는 느낌이었고, 환상 속에 살던 사람들이 환상이 깨지면 이렇게 파격적이게 표현될 수도 있구나 느꼈던 장면이라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버지니아의 글은 조금 어렵지만 읽고 나면 그녀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본 느낌이라 독서 시간 동안 작가와 함께한 느낌을 강하게 받곤 한다. 그래서 굉장히 소중했고, 재미있었던 경험이었다. 흐름이 길지 않은 단편 소설들이라 기분에 따라, 날짜에 따라 독서 목표를 가지고 읽는다면 어렵지 않게 읽힐 단편집이라 버지니아 울프 팬이라면 꼭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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