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푸코와 주체의 해석학

구내서점에 들렀다가 뜻밖에 발견한 책은 미셸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이다.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란 제목의 리뷰를 어제 옮겨왔었는데, 마침 바로 그 주제에 관한 책이 출간된 것(알라딘에는 아직 입고되지 않은 듯하다).

책 이미지

1981-1982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의 강의를 펴낸 것인데, 불어본은 지난 2001년에, 그리고 영역본은 지난 2005년에 출간되었다. 푸코의 강의록으로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비정상인들>에 이어서 세번째로 소개되는 책이다. 이 강의록 시리즈의 책임 편집자는 프랑수아 에왈드와 알레상드로 폰타나이며, 이 책의 편집자는 <푸코와 광기>(동문선, 2005)의 저자이자 <미셀 푸코, 진실의 용기>(길, 2006)의 공저자인 프레데렉 그로이다. 책에는 이 강의의 특징과 출판과정에 대한 편집자의 자세한 해설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다.  

 

 

 

 

역자는 오래전에 저명한 푸코 연구서인 존 라이크만의 <미셸 푸꼬, 철학의 자유>(인간사랑, 1990)을 소개한 바 있고 미셸 푸코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 취득 후에 귀국하여 프랑수아 샤틀레의 <이성의 역사>(동문선, 2004)를 역간하기도 한 심세광 박사이다. 모처럼 무게 있는 저작이 최적의 역자를 만나 출간되었기에 안도감이 든다. 20쪽에 이르는 해제성 역자서문도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하고.

1982년 1월 6일부터 3월 24일까지 행해진 강의에서 푸코가 주로 다루고 있는 텍스트는 플라톤의 <알키비아데스> 등이다. 역자가 잘 정리해놓은 바에 따르면,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에서 고대의 자기 기술둘, 특히 스토아주의와 에피쿠로스주의의 자기 기술들을 연구하면서 고대인들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결코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해낸다."

"고대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가해야 할 노력이 있었다면 그것은 발견해야 할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해야 할 행동의 문제였다. 고대에 자기와 자기를 분리시키는 것은 '인식'의 거리가 아니라 '현재의 자기'와 '생이라는 작품'의 거리였다는 점을 푸코는 강조한다. 고대 주체의 문제는 자기를 인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작품의 재료로 간주하는 데 있었다.'"(25쪽) 푸코는 이를 일컬어 '실존의 미학'이라 명명한다.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자기의 테크놀로지>(동문선, 1997)도 참고해야 하는 필독서이다.

책에는 시리즈의 공동편집자가 작성한 일러두기가 서두에 실려 있는데, 푸코의 독자라면 다들 알 만한 내용이지만 생소한 독자들도 있을 것 같아 옮겨보면, "미셸 푸코는 안식년이었던 1977년만 제외하고는 1971년 1월부터 1984년 6월 그가 사망하던 때까지 줄곧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했다. 그의 강좌명은 '사유체계의 역사'였다. 이 강좌는 쥘르 뵈유맹의 제안에 따라 콜르주 드 프랑스 교수협의회에 의해 1969년 11월 30일에 개설되었는데, 장 이폴리트가 죽을 때까지 맡고 있던 '철학적 사유의 역사'를 대체한 것이다."(31쪽)

그러니까 스승이었던 이폴리트의 후임으로 새로운 강좌를 맡게 된 것인데, "교수협의회는 1970년 4월 12일 미셸 푸코를 새 강좌의 교수로 선출했다. 그때 그는 43세였다. 미셸 푸코는 1970년 12월 2일 교수 취임 기념강의를 했다." 푸코와 교수직에 나란히 지원했다가 고배를 마신 이가 바로 폴 리쾨르였다. 그리고 푸코의 첫 취임강의는 이듬해 5월 <담론의 질서>로 출간되었다.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 강의를 듣는 데에는 어떠한 자격요건도 필요하지 않았고 교수들은 지도학생을 가진 것이 아니라 청강생들만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어반 청강생'들을 위한 교본으로 생각하면 책값이 그렇게 부담스럽지만은 않을 듯하다.

국역본이 나온 김에 나는 도서관에서 이전에 너무 두꺼운 탓에 엄두가 나질 않아 대출하지 못했던 영역본을 대출했다(영역본은 556족으로 588쪽의 국역본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건 국역본의 페이지당 행수가 30행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역본은 35행이다). 그리고는 아예 영역본은 아마존에 주문했다. 배송료를 포함해도 국역본보다 훨씬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고, 그 정도면 책을 복사하는 것보다 경제적이어서이다. 영역본으로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강의가 네댓 권 정도 번역돼 있는 듯하다.

Интеллектуалы и власть. Избранные политические статьи, выступления и интервью. Часть 2

한편, 러시아어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와 <비정상인들>이 번역돼 있다(이 중 <비정상인들>은 모스크바 체류시에 구입한 책이다). <주체의 해석학>의 경우에는 한국어본이 먼저 나온 셈이다. 러시아어본으로 최근간은 대담집인 <지식인과 권력> 2부(2005)이다. 1부는 지난 2002년에 출간됐었다... 

07. 03. 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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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알튀세르의 <철학에 대하여> 정리

 

 

 

 

 

 

옛날 파일들을 정리하다가 <철학에 대하여>(동문선, 1997)를 (부분)정리해놓은 게 눈에 띄어서 옮겨놓는다. 요컨대 개인적인 작업노트이다. '철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주제로 한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담은 개인적으로 알튀세를 이해하는 데 가장 유익한 대담이라고 생각한다. 1993년인가 <이론>지에 번역/소개되었던 자크 데리다와의 대담(대담자는 마이클 스프린커)과 함께(이상하게도 이 대담은 원문의 절반 정도만이 번역되었다). '묘한' 사제간이었던 데리다와 알튀세르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에도 핵심적인 문헌이다.

 

1부. 철학과 마르크스주의 - 페르난다 나바로와의 대담

1장-마르크스주의를 위한 하나의 철학: 데모크리토스의 노선

 

-“마르크스의 발견의 핵심이 과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수학적 철학이나 물리학적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곤란한 것처럼 마르크스주의적 철학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리고 그는 자기비판을 통해 <인식론적 단절>이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경향적인 것이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마르크스가 헤겔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승인하는 것이다.(19)

 

-당시 나는 프랑스에서 내가 1948년 이래 당원으로 있던 프랑스 공산당에 개입하기를 원했습니다... 당시 내겐 선택가능성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당에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내게 남아 있던 개입의 길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순수한 이론, 즉 철학을 통한 개입이 그것입니다.(27) 나는 <자본> 속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될 만한 것을 탐구하는 데 전념했습니다.(30) 당은 이제는 나를 추방할 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었던 나의 개입이 마르크스에 의거하고 있었고, 나는 하나의 <비판적이고 혁명적인> 마르크스 해석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가 <불가침의 聖父인 사상가>가 되어 당 내부에서 나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데리다가 지적하고 있는, 알튀세르에게서의 당의 문제: "그에게 있어서 할 수 없었던 것이 한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당을 떠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의 투쟁이 당 내부에 있다고 간주했습니다. 반면 저는 당원이 아니었고 그래서 저는 당 밖에 있는 알튀세르를 또한 생각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있었고 저는 아니었습니다. 차이를 아시겠지요? 그것은 무시될 수 없습니다."

 

-내 생각에 <진정한> 유물론, 마르크스주의에 가장 적합한 유물론은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노선에 서 있는 우발적 유물론입니다.(33) 우리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상상적> 철학(레이몽 아롱)을 만들어 냈습니다. 즉, 마르크스의 텍스트들에 문자대로 엄격하게 매달린다면 그의 저작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철학 말입니다.(36) 어떤 것이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의 철학, 철학사에 속하는 하나의 철학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이용했던 개념적 발견들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하나의 철학일 것입니다.(37) 그가 탐구한 것은 <비철학>, 그 이론적 헤게모니 기능이 철학의 새로운 존재 형태들에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소멸할 <비철학>입니다.(38) 이처럼, <자본>이라는 과학적-비판적-정치적 저작을 씀으로써 그는 자신이 결코 쓰지 않은 철학을 실천한 것입니다... 현재 과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하나의 철학을 가공해 내는 것입니다.(39)

 

-이 유물론[우발적 유물론]은 주체(신이든 프롤레타리아트이든)의 유물론이 아니라, 지정할 수 있는 목적이 업이 자기발전의 질서를 지배하는 (주체없는) 과정의 유물론입니다.(40) 의 철학, 의 철학은 기원 등등에 대한 모든 고전적인 질문들을 척결합니다. 이 철학은 우리가 그 속에 <던져져> 있는 세계의, 그리고 세계의 의미의, 일종의 선험적 우연성을 복원하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집니다... 이렇게 세계는 우리에게 하나의 <증여>입니다.(42)

 

-여기서 내 의도는 철학사에서 인정받지 못한 유물론적 전통 하나가 존재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데모크리토스-에피쿠로스-마키아벨리-홉스-루소-마르크스-하이데거의 전통입니다... 그것은 통상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의 것으로 돌려지던 유물론, 즉 합리주의 전통의 모든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 즉 합리주의 전통의 모든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필연성과 목적론의 유물론, 다시 말해 관념론의 위장된 형태인 저 유물론을 포함하여 유물론으로 인정받던 유물론들에까지 대립하는 마주침의 유물론, 우성의 유물론, 요컨대 우발성의 유물론입니다.(43) 모든 형태에 대해 무가 우선하며, 현존에 대해 부재가 우선합니다.(44)

 

*데리다가 대담에서 지적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중요성: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알튀세르에게 있어서 하이데거는 금세기의 회피할 수 없는 유일한(the) 위대한 사상가입니다. 유일한 위대한 적수이자 또한 동시에 일종의 매우 중요한 동맹자 또는 잠재적인 후원자로서 말입니다(알튀세르의 전저작은 이러한 징후에 따라 읽혀져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그것을 <세계는 일어나는 것 전체이다>(<세계는 우리에게 떨어져내리는 것 전체이다>)라고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이 훌륭한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세계에는 예고 없이 <우리에게 떨어져 내리는> 사례들․상황들․사물들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례들, 즉 서로 전적으로 구별되는 개별적 개체들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테제가 바로 명목론의 기본 테제입니다... 나는 명목론이 유물론의 대기실이었을 뿐 아니라 유물론 그 자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49)

 

 

 

 

 

 

 

 

-세계는 전적으로 개별적이고 유일고유한 사물들고 구성되어 있고, 사물들은 제각기 고유한 명칭고 속성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여기> 있는 것, 이것은 단지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을 뿐이지 명명할 수는 없습니다. 말은 이미 추상이기 때문입니다. 말에 대한 몸짓의 우위, 기호에 대한 물질적 흔적의 우위가 뜻하는 바를 말을 사용하지 앟고서 말해야, 즉 가리켜야 합니다.(50) 마르크스도 엥겔스도 유일고유하고 우발적이며 예견 불가능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의미의 역사의 이론에도, 정치적 실천의 이론에도 접근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역사의 이론, 현재 속의 정치적 실천의 이론에 대해 유일하게 사고한 사람은 마키아벨리입니다.(51)


2장-철학-이데올로기-정치

-내 생각에 철학이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으로서 성립한 것은 수학이라는 최초의 과학이 성립한 시기입니다... 철학은 과학에서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어떤 것, 즉 철학에 불가결한 합리적 추상화의 모델을 끌어왔습니다... 요컨대 순수한 합리적 담론, 그 모델이 과학들 속에 있는 합리적 담론이 미리 존재하지 않고서는 철학이 등장할 수 없었습니다.(54)

 

-모든 철학은 자신의 대립물이라는 유령을 안고 있습니다. 관념론은 유물론이라는 유령을, 유물론은 관념론이라는 유령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의 목적 중의 하나는 이론적 전투를 개시하는 것입니다... 

 

05. 11. 21.

 

P.S. 데리다의 대담에 대한 정리, 그리고 데리다의 알튀세르 비판의 요점 등은 따로 자리를 마련할 필요가 있겠다. 물론 그 자리는 공간이지만 시간의 좌표를 갖고 있다. 기약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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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아방가르드와 일상의 심미화(진행중)

원래는 주말에 해놓으려고 했던 정리인데 다소 지체된 일을 해치우려고 한다. 볼프강 벨슈의 <미학의 경계를 넘어>(향연, 2005)에서 아방가르드와 일상의 심미화를 대비시키고 있는 대목을 간단히 정리해두는 게 일차적인 목표이지만 곁다리 얘기들도 포함될 듯하다(이브 미쇼의 책들이 함께 다루어질 만하다). 다른 일들에 발목뿐만이 아니라 허벅지까지 붙들린 상태이지만 <일상생활의 혁명>에 관한 리뷰를 옮겨오면서 다시금 등떠밀리며 떠올리게 된 일부터 처리하는 수밖에.

 

 

 

 

먼저, 볼프강 벨슈(벨쉬)는 <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책세상, 2001)로 먼저 소개되었던 독일 철학자이며 현재는 예나대학교에 재직중이라고 한다. 그의 <포스트모던적 모던>은 이미 여러 차례 개정판이 나왔을 정도로 현지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는 듯하고, <미학의 경계를 넘어서>도 그의 책으론 처음 영역(1997)되면서 학문적 성가를 널리 알린 책이다. 역자에 따르면 "현재 독일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미학자 중 한 명"이다.  

Cover Art for Undoing Aesthetics

원저인 독어본이 1996년에 출간됐으니 영역본은 바로 이듬해에 나온 셈이다. 그리고는 또 8년 후에 한국어본이 나온 것이고. 국역본이나 영역본 표제에서도 암시받을 수 있지만, 저자는 "전통 미학의 관점에 안주하기보다는 미학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미학자"이며, "현대 예술, 건축, 음악 및 디지털 전자 매체 세계에 대해서도 미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확장을 통해 미학의 경계를 허물고자 시도"한다. 그러고 보면, 역자인 심혜련 교수의 <사이버스페이스 시대의 미학>(살림, 2006)은 이 책의 문제의식을 자연스레 연장한 것으로도 보인다(역자 자신이 벤야민 전공자이기도 하지만).

전체 3부로 구성된(영역본은 2부로 재구성돼 있다) 책의 제1부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미학의 '새로운 시나리오', 곧 현대의 심미화 과정이 낳은 이러저러한 결과들에 대한 점검이다. 그 중에서도 첫번째 장은 심미화 과정들 일반에 대한 검토와 비판적 전망으로 채워져 있다. 그 '심미화 과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지금 미학의 열기를 체험하고 있다. 이는 개인적인 꾸미기를 넘어서 도시 조형과 경제를 거쳐 이론에까지 이르고 있다. 현실의 많은 요소들이 점점 더 심미적으로 재형성되고 있으며, 현실은 점점 더 심미적인 가설로서 중요시되고 있다."(21-2쪽)

'개인적인 꾸미기'란 자기 스타일의 창조를 말한다(저마다 제멋에 겨워 사는 게 현대인들 아닌가?). '심미적인 가설'이라고 번역된 건 영역본에 따르면 'aesthetic construct'이다. 마지막 문장을 영역본을 토대로 옮기면 "현실의 점점 더 많은 요소들이 심미적으로 치장되고 있고, 현실이란 것 자체가 우리에게 점차 심미적 구조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심미화 경향을 벨슈는 '표면적 심미화(surface aestheticization)'와 '심층적 심미화(deep-seated aestheticization)'으로 구분하고 이에 대해서 상술한다(물론 그의 초점은 '심층적 심미화'에 맞추어진다).

저자가 표면적 심미화로 분류하고 있는 항목은 (1)현실의 심미적 장식, (2)문화의 새로운 모체로서의 쾌락주의, 그리고 (3)경제적 전략으로서의 심미화, 세 가지이다. "표면적인 측면에서의 심미화는 현실을 심미적 요소로 치장하고 심미적인 분위기로 실재를 아주 달콤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확실히 이러한 표면적 심미화는 아름다운 현실과 우리의 감각과 우리가 원하는 형태에 상응하는 현실에 대한 기본적이고 오래된 요구와 연관되어 있다."(23-4쪽)

뒷문장은 영역본에 따르면 "This certainly takes up an old and elemental need for a more beautiful reality corresponding to our senses and feeling for form"(2쪽)이고, 이걸 다시 옮기면 "이것은 형태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느낌에 부합하는 보다 아름다운 현실에 대한 오랜, 그리고 기본적인 요구와 확실히 연관되는 것이다." 정도가 될 것이다.

 

 

 

 

벨슈도 인용하고 있는 책이지만 이러한 심미화 경향의 짝을 이루는 것은 '심미적 인간'이다(뤽 페리의 이 책은 <미학적 인간>(고려원, 1994)으로 번역/소개돼 있다). "심미적 인간은 예민하고 쾌락적이며 교양 있는 인간이다. 그리고 특히 뛰어난 취향을 가진 인간이며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고 이에 대해 논쟁하지 않는다."(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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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장-뤽 낭시의 '뮤즈들'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에 관한 자료를 옮겨놓는다.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공동작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낭시는 흔히 '데리다 사단'으로 분류되는 철학자인데, 데리다 스스로가 이 '제자'에게 상대한 두께의 저작을 헌정했을 정도로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국내에서 출간된 책 가운데는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마주한 공동체>(문학과지성사, 2005)에 낭시의 공동체론이 들어가 있고, <숭고에 대하여>(문학과지성사, 2005)는 낭시 등이 편집한 책이다(참고로, 그의 저서가 일본어로는 10권 이상이 번역돼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간지에 연재된 글들을 모은 <세계 지식인 지도>(산처럼, 2002)에서 대략적인 소개를 읽어볼 수 있다.

 

 

 

 

난데없는 낭시 타령인가 싶지만, 러시아 학자와 낭시와의 대담 하나를 번역하게 될지 몰라서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영역본으로는 가장 최신간인 <다양한 예술: 뮤즈들2(Multiple Arts: The Muses II)>(스탠포드대학출판부, 2006)를 대출했다. <뮤즈들>에 이어서 자투리글들을 모은 낭시의 예술론집인데(불어 원서가 있는 건 아니고 영역본의 편자가 낭시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표지의 사진이 인상적이어서(게레로의 작품이라고만 나온다) 검색해봤지만 찾지 못했다. 어쨌든 이 두 책을 소개한다는 명분으로 이 페이퍼는 '세계의 책'으로 분류된다. 아직 주저들이 번역/소개되지 않은 철학자이지만(나는 네댓 권의 영역본과 연구서를 갖고 있다) 불시에 또 소개될지 누가 알겠는가.

달랑 이런 내용만 띄워놓기는 멋쩍으니까 참고자료도 하나 덧붙여둔다. 앞서 언급한 블랑쇼의 책을 번역한 박준상씨가 2003년 6월 동국대학교 대학원신문에 게재한 소개의 글이다.

장-뤽 낭시와 공유·소통에 대한 물음

박준상 (연세대 철학과 강사)

1. 공유 내의 존재 etre-en-commun
여기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장-뤽 낭시Jean-Luc Nancy(1940- )에 대해 무엇을 먼저 말해야 하는가? 그의 사상의 특성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을 밝혀봄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낭시의 사유의 핵심에 정치적인 것이 놓여 있으며, 그의 사상은 시종일관 정치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일반적인 관점으로만 이해되어져서는 안 된다.




많은 다른 정치사상가들의 경우에 그러하듯, 낭시는 물론 정치적 사건들(동구권의 해체, 걸프전), 정치적 변화들(세계화, 서양중심주의의 한계), 정체政體들·이데올로기들(민주주의, 공산주의, 나치주의)에 대해 구체적 분석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그러한 분석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일 뿐이고 구체적인 정치적 판단으로 이어질 뿐이며, 모든 경제·문화·사회현상들을 총체적으로 설명 가능하게 하는 어떤 초월적 원리를 배경에 깔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낭시의 정치철학은 이른바 '형이상학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매우 급진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정치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 또는 조건으로서의 정치적인 것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치적인 것이란 이미 공동존재(함께 있음, etre-avec)에, 인간들 사이의 소통에 기입되어 있으며, 어떤 '우리'의 존재의 수행(실현, 표현)이다. '우리'의 존재, 다시 말해 '나'의 존재도 타자의 존재도 아닌, 모든 단일성, 동일성(정체성), 내재성 바깥의 존재, 고정된 개체의 속성에 따라 규정되는 존재가 아닌, '나'와 타인 사이의 보이지 않는 관계 내의 존재, 관계에만 정초될 수 있는 존재.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으로 귀결되는 자기의식의 반대편에 놓이는 존재, 또한 어떤 주제theme에 고정되어 동일화된, '내'가 구성한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존재. 정치적인 것으로써 '우리'의 존재의 수행이란 '우리'의 서로에게로 향함·나타남, 관계 내의 서로를 향한 실존들의 만남, 접촉touche이다. ('접촉'은 낭시의 용어이지만, 그 중요성을 부각시킨 사람은 그의 동료,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이다. 데리다의 낭시에 바쳐진 저서, <접촉, 장-뤽 낭시> 참조, J. Derrida, Le Toucher, Jean-Luc Nancy, Galilee, 2000.)



낭시는 보이지 않는 관계('나'와 타인은 보이지만 그 관계는 보이지 않는다)의 존재, 공유 내의 존재를 조명하며, 거기에 그의 사유, 정치적 사유의 핵심이 있다. 그러나 '나'와 타인―또는 타인들―의 관계를 정치에까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이거나 과장이 아닌가? 분명 '나'와 타인 사이의 관계의 존재, 공유 내의 존재 그 자체는 정치가 아니다. 그러나 공유 내의 존재는 '나'와 타인 사이의 모든 종류의 만남의 근거에 있는 나눔partage, 어떤 '무엇'을 나눔이 아닌, '우리'의 실존('우리'의 있음 자체)의 나눔의 양태, 나눔의 전근원적 양태를 지정한다. 공유 내의 존재는 인간들 사이의 모든 종류의 소통과 공동체 구성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나아가 현실의 정치적 결정·행동에 있어 결코 간과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공유 내의 존재는 '정치적'이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정치의 근원이다.

아마 낭시는 공유 내의 존재가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사유된 적이 없이 망각 가운데 묻혀버렸다고 말할 것이다. 이제까지 나눔과 공동체라는 정치적 문제에 있어, '무엇'을 나눔과 '무엇'에 기초한, '무엇'을 위한 공동체만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20세기에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세계 전역에 걸쳐 진행된 마르크스주의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하나의 '무엇', 즉 재산의 공유共有였다.

나치는 열광적인 정치공동체를 이루었지만, 그것은 공동의 이념적 '무엇'(반유대주의와 게르만 민족의 우월주의)의 기초를 바탕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공동체가 가시적 '무엇'(재산, 국적, 인종, 종교, 이데올로기)의 공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을 때, 그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왜곡, 말하자면 보이는, 쥘 수 있는―전유專有할 수 있는―동일성의 지배, 공유 내의 존재의 망각. 그 '무엇'에 따라 전개될 수 없는, 그 '무엇'이 목적일 수 없는, 실존의 나눔의 망각, 함께 있음 자체의 망각.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자에 대한 이해와 소유라는 관심에 사로잡혀 존재망각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낭시는 우리가 보이는 '무엇'에 대한 공유 바깥의 나눔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관계에 기입되는 공유 내의 존재를 망각했다고 말할 것이다.

거기에 결국 낭시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정치적 물음이 있다. '우리'가 함께 있는,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이 아니며, '무엇'을 나누기 위해서도 아니다(우리는 재산을 공유하기 위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이 말은 재산을 나눈다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있는 이유와 목적은 다만 함께 있다는 데에 있다. 함께 있음의 이유와 목적은 함께 있음 그 자체이다. 다만 함께 있기 위해 함께 있음, 즉 공유 내의 존재를 위한 함께 있음, '무엇'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음 자체를 나눔, 다시 말해 '나'와 타인의 실존 자체가 서로에게 부름과 응답이 됨,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



2. 유한성의 경험
공유 내의 존재,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시적 어떤 것의 공유가 아니라, 타인이 '나'를 향해 다가옴, '내'가 그 다가옴에 응답함, 즉 '내'가 타인을 향해 건너감, 타인을 향한 외존外存ex-position, 관계 내에 존재함, 어떠한 경우라도 비가시적, 동사적 움직임들의 부딪힘, 접촉이다. 유한有限한 자들의 만남. 낭시는 현대철학에서 많이 언급되고, 그 중요성이 강조된 '유한성finitude'이라는 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사상가이다.

인간의, 인간들의, '우리'의 유한성, 여기서 유한성은 첫째로 완전한 내재성內在性의 불가능성이다. 완벽히 자기 자신에게 갇혀 있을 수 있는, 그 스스로에 정초된―그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결정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율성을 가진 개인이란 없다. 인간은 항상 자기 아닌 자에게 열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에게로 향함, 그에게 노출되어 있음, 그를 향한 외존, 관계 내에 존재함, 그것이 '나'의 존재의 조건이다. 인간은 자유의 존재가 아니라, 그가 향해 있는 타인에 의해 제약된 존재, 하지만 그 제약으로 인해 비로소 의미sens에 이를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이다. 유한성 가운데에서의 존재란 먼저 외존 가운데에서, 관계 내에서의 존재, 폐쇄성과 내재성 바깥의 존재를 의미한다.

두 번째로 유한성은 만남의 유한성을 가리킨다.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지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접촉은 불규칙적, 단속적 시간에, 즉 시간성 내에서 전개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식을 통해 확인하고, 표상할 수 있는 '무엇'에 정초되어 있지 않고, '무엇' 바깥의 타인의 나타남에 응답하는 순간의 정념情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접촉, '무엇'에 의하지 않는, '무엇' 때문이 아닌 급진적인 만남, 그것에 정념만이, 극단의 단수성(singularite, 타인의 나타남의 단수성)을 긍정하면서, 답할 수 있다. 정념, 만져지지 않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무엇'에 따라 고정될 수 없는 관계 자체에 대한 감지.

그러나 만남의 유한성은 인간들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나아가 지속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다만 그 유한성은 관계를 '내'가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즉 타인을 '나'에게 필요한 그 '무엇'의 요구에 따라 어떤 동일성 내에로 동일화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에 따라 그것은, 만일 '무엇'이 관계를 지배할 때, 그러한 지배(예를 들어 재산의 지배, 정치적 이념의 지배, 인종과 국적의 동일성의 지배―지금 이 땅의 경우 학벌과 지역적 동일성의 지배)에 지속적으로 저항할 수 있게 하는, 근거·이유·목적도 없는 만남, 또는 그 자체가 이유와 목적인 만남, 즉 실존들의 접촉과 그 순수성을 정당화한다.

세 번째로 낭시가 말하는 유한성은, 그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 한계상황(죽음, 병, 고독)에 놓여 있는 인간의 존재양태를 표현한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낭시에게 유한성은 공유 내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하이데거는 죽음에로의 접근이 '나'로 하여금 일상적이고 평균적인 존재양태, '그 누구Man'의 지배에서 벗어나 본래적 실존에로 눈을 돌리게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반해 낭시는 죽음에로의 접근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본래적 실존에로 돌아가게 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외존(타인을 향해 존재함, 타인과의 관계 내에 존재함)을 통한 급진적인 공유 내의 존재를 부르게 한다고 본다. 죽음에로의 접근의 경험은 '나'와 자신의 본래적 관계의 회복을 요청한다기 보다는, 죽음이라는 절대타자 앞에서 '나'의 동일성이, 그것이 무엇이든,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07. 01. 13.

P.S. 한 분이 귀뜀해주신 바에 따르면 국내에도 개봉된 바 있는 영화 <텐 미니츠 첼로>(2002)에 낭시가 직접 출연했다. 열 명의 감독이 찍은 단편영화 열 편으로 구성돼 있는 <텐 미니츠 첼로>의 다섯번째 영화가 바로 클레르 드니 감독의 <낭시를 향해서(Vers Nancy)>이다. 기차여행을 하면서 10분간의 철학적 대화를 나눈다고 하는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이렇다. 

철학자 장 뤽 낭시와 그의 학생 중 한 사람인 안나가 기차여행을 하며 서로 나누는 대화만으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낭시는 ‘침입자’라는 단어로 이민자들이나 타자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불안과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또한 인종융합에 관한 미국적 개념인 ‘도가니’가 차이를 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비판하며 더불어 이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태도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 길게 이어진 대화가 끝난 후 그들의 자리에 한 흑인이 들어와 조용히 묻는다. “언제 도착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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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하이데거와 함께 철학을!

하이데거의 <철학입문>(까치글방, 2006)이 출간됐다. 출간일자는 작년말이지만 지난주에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알라딘의 '새로 나온 책'을 둘러보다가 발견하게 됐다. 지난주에 유난히 읽을 만한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온 탓에(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나 다니엘 벨의 <탈산업사회의 도래> 등)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는데, "하이데거가 1928~29년 겨울 학기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수록한 강의록"으로서 지난 1996년 하이데거의 전집 제27권으로 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충분히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아직 영역본은 나오지 않은 듯하다).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기도 하지만, 게다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 입문' 아닌가?

하이데거  

그런 '입문'이란 단어를 제목에 달고 있는 책으로 나는 <형이상학 입문>(문예출판사, 1994)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우연이지만, 내가 하이데거에 매혹당하게끔 한 책이 바로 <형이상학 입문>이었다. 그러니 <철학 입문> 또한 철학 입문이면서 동시에 하이데거 입문으로의 역할을 덩달아 해줄 거란 기대를 갖는 건 억지스럽지 않다. 1928-9년이면 주저인 <존재와 시간>을 발표한 직후이고 갓 마흔이 된 '젊은' 거장의 염력이 거침없을 때이다. 해서, 이 겨울에 딱 3일 정도 바람이라도 쐬러 가면서 들고 가고픈 책이다.

하이데거와 전혀 '안면'이 없는 독자라면 <30분에 읽는 하이데거>에서부터 역자이기도 한 이기상 교수의 <하이데거 철학에의 안내>(서광사, 1993)나 역시나 하이데거 전공자인 박찬국 교수의 <들길의 철학자, 하이데거>(동녘, 2004)를 미리 혹은 같이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내가 감동적으로 읽었던 조지 스타이너의 <하이데거>(지성의샘, 1996)도 지난번에 절판된 듯하다고 적었지만 다시 나왔다). 한데, 하이데거는 가장 기초적인 물음(들)을 던지면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기 때문에 그냥 차근차근 따라가봐도 팍팍하거나 멀미나지 않는다. 아니, 그냥 장서용이면 어떤가. 폼나지 않나. '하이데거' 그리고 '철학입문'.

 

 

 

 

재작년 여름에 데리다의 <정신에 대하여>(동문선, 2005)가 출간되었을 때 책소개를 하면서 몇 자 적어놓은 걸 다시 읽어봤는데, 이왕 하이데거를 펴보았다면 하이데거론도 곁들어 얼마쯤 읽어두면 좋겠다. 나도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정신에 대하여>에서, 이전의 소개를 반복하자면, "데리다는 하이데거와 관련하여 한번도 질문된 적이 없는 '정신(Geist)'의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하이데거의 철학은 해체/구축한다. 이런 '대결' 장면은 며칠전 이종격투기 프라이드 경기에서 표도르('효도르'라는 이름은 러시아어가 일어로 음역된 걸 다시 옮겨오면서 생긴 '괴상한' 이름이다)와 크로캅이 맞붙은 것만큼이나 흥미진진한 볼거리이다. 그런 걸 놓쳐도 좋은 삶은 또한편 나름대로 재미있을지 모르겠으나 내가 부러워하는 삶은 아니다."

앨런 메길의 <극단의 예언자들: 니체, 하이데거, 푸코, 데리다>(새물결, 1996)은 네 철학자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안내서이다. 하이데거 편을 데리다 편과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그리고 부르디외의 하이데거 비판서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2005)도 (원제인)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 비판으로 읽어봄 직하다. 한데,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 그리고 라캉주의자가 되기 이전에 하이데거 전공자였던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 책의 1장은 '칸트 독자로서의 마르틴 하이데거'를 다루고 있는데, 주로 <존재의 시간>에서의 곤궁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한길사, 2001)에서 어떻게 극복/회피하려고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놓는다(나는 지젝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도달해 있는/있을 경지가 부럽다).  

 

 

 

 

물론 <철학 입문>을 통해서 하이데거의 사유에 맛을 들이고 매혹을 느낀다면 이후엔 그의 주저들에 도전해볼 수 있겠다. 하이데거만큼 상대적으로 풍족하게 번역/소개된 철학자도 국내엔 많지 않다. 게다가 번역의 수준도 높은 편이다(당장 헤겔과 비교해 보라). <존재와 시간>에서 <이정표>에 이르기까지의 여정? 그렇게만 읽어도 우리의 한해는 다 가고 말 것이다. 맨날 하는 소리이기도 한데, 인생은 행복하기에는 너무 길지만 공부하기에는 너무 짧다...

07.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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