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20世紀의 사상을 찾아서 - T.W.아도르노

아도르노, 이성의 자각을 위해…
"도구적 이성이 서구문명 타락시켰다"…분야 국한 않은 비판이론 .

테오도르 W. 아도르노(Adorno, Theodor Wiesengrund, 1903.9.11~1969.8.6))

이 시대의 서양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들 가운데 단연 첫 손가락에 꼽히는 철학자로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를 떠올리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닐 듯싶다. 하버마스가 세계 최고의 철학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배경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세계적 지위에서 유래한다.

비판 이론을 20세기 서구의 주요 사상으로 끌어올린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1세대 이론가들 중에서도 이론의 깊이와 학문적 업적면에서 가장 탁월한 이론가는 단연코 아도르노였다. 하버마스의 명성은 아도르노가 남기고 간 '이성의 자기자각'이라는 개념을 의사소통적 합리성으로 발전시킨데 근거한다.

아도르노 사상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핵심 개념은 '도구적 이성'이다. 나치가 들어서기 이전인 1931년, 28세의 젊은 나이였던 그는 교수 자격을 따낸 뒤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의 현재적 중요성'이란 강연을 통해 칸트이래 서양 관념철학의 전통에서 사고가 사물을 사물 자체로 대하지 않고 사고의 총체성에 종속시키고 있음을 비판했다. 대상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는 것을 가리키는 도구적 이성이라는 개념의 단초는 아도르노 사상의 초기 단계에서 이미 잉태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이론을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를 경험한 산물로 일방적으로 환원하려는 견해는 옳지않다. 다만 사고의 폭력성에 대한 그의 시각이 나치즘 등을 경험한 후 더욱 급진적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아도르노는 도구적 이성이 원시 제전의 미메시스적 행동, 오딧세우스의 자기 보존적 전략들, 올림피아 제신들이 행하는 지배권력, 근세이래 형식논리의 발달, 시민사회의 경제적 합리성 등의 단계를 거쳐 마침내 모든 대상을 사고에 종속시키는 동일화 사고로까지 부정적으로 진보하였다고 분석한다. 이 과정이 바로 서구 문명의 타락사이며 그 정점에는 나치즘-스탈린주의-동구권 사회주의가 자리잡는다. 그는 1960년대 말 서구의 풍요사회도 도구성의 총체적 매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도구적 이성은 사회를 사회에 의한 개인의 총체적 지배를 가능하게하는 불의의 연관관계로 만든다. 인간이 자연의 절대적 위력으로부터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첫 시도인 원시제전에서 사회가 출발한 것으로 본 아도르노에게는 사회가 조직된다는 것 자체가 개인이 사회에 강제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자기 보존이라는 강제적 필연성에서 출발한 사회는 따라서 개인을 목적으로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취급한다. 사회는 이미 그 출발점에서부터 개인에게 부자유한 노동과 희생을 강요하며 자기 주체의 포기를 요구하는 속성을 지니는 것이다. 시민사회 발달과 더불어 이윤 추구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적 경제 원리가 사회 구성의 주도적 원리로 등장하면서 사회는 개인을 교환의 대상으로 관리하기에 이른다. 교환 합리성은 아도르노 사회 이론의 핵심적 개념이며, 교환 원리가 총체적으로 작동되는 사회를 그는 잘 알려진 대로 '관리된 세계'라고 명명하였다.

예술에 대한 아도르노의 관심도 진정한 예술 작품에서는 도구적 이성이 비판되고 있음에 착안한 것에서 유래한다. 원시 제전이래 삶의 실제에 직접적으로 매개되어 있으면서도 그러한 실제로부터 거리를 두 면서 실제를 비판한 역사를 갖고 있는 예술은 도구적 이성이 저지른 타락에 대한 증언이자 비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사회에 대한 사회적인 반테제'이다. 보편 사상으로서 아도르노 사상은 크게 보아 역사철학, 인식론, 사회이론, 미학, 문학이론, 음악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특정 분야에 대한 특정 이론이 그 분야에만 국한되어 구성된 것이 아니고 다른 분야와 상호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관계를 형성하는 공통분모는 '비판'이다. 그의 미학은 철학이자 사회 이론이다. 비판이 지향하는 바는 도구적 이성의 자기자각이며, 자기자각은 화해로 이어진다. 화해는 서로 상이한 것들이 평화롭게 함께 존재하는 상태이며 화해상태에서는 대상이 수단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문병호· 광주여대교수 ·서양철학). 
▲1954년생 ▲고려대 독어독문학과 학사-석사,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박사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강사 ▲현재 광주여대 문화정보학과 교수 ▲저서 '아도르노의 사회이론과 예술이론'(1993), '서정시와 문명비판'(1995), 역서 '계몽의 변증법'(근간) 등.

[아도르노] 음악등 다방면 재능…`계몽의 변증법' 유명

테오도르 아도르노(1903∼1969)는 20세기 사상가 중에서 가장 음악에 밝은 인물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성악가였던 덕분에 어린 시절 일찍이 소리의 세계를 깨우쳤다.

아도르노는 1920년대 초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철학, 사회학,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음악학도 파고들었다. 훗설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에도 작곡과 피아노 연주 수업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음악 평론을 썼고, 12음계 기법을 창시한 현대음악가 쇤베르크를 일생동안 존경했다. 아도르노는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 미술에 대한 소양도 깊었다. 대학시절 가장 감명깊게 읽은 책 중에서 루카치의 문예 이론서 '소설의 이론'을 꼽을 정도였다. 그만큼 아도르노 사상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남달랐다. 그는 생전에 '신음악의 철학'을 펴냈고, 사후엔 '예술이론'도 나왔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음악이 처한 현재 상황에 대해 아도르노보다 더 잘 청중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도르노는 1938년 미국으로 이주, 상업주의와 대중문화가 만개한 그곳에서 '문화산업론'을 구상했다. 자본주의 문화산업이 내포한 대중기만이란 정치적 의미를 냉엄하게 지적한 그의 비판은 어린시절부터 몸에 익힌 고급예술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학자로서 아도르노의 명성은 프랑크푸르트학파 동료였던 호르크 하이머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으로 더 높아졌다. 이 책은 나치즘을 통해 타락한 몰골을 드러낸 서구의 이성과 문명을 역사철학적 관점에서 비판한 20세기의 명저이다. 아도르노는 50년대에 다시 독일로 돌아간 뒤 프랑크푸르트대학 교수로 강의하면서 '부정 변증법' 출간 등 왕성한 저작 활동을 펼쳤다. 또한 라디오와 텔레비전에도 출연, 자신의 비판 철학을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는 '68혁명'이라고 하는 60년대 말 서구학생 운동의 폭력 사용을 비판하면서 학생들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학생들과 심한 논쟁으로 골치가 아팠던 그는 1969년 스위스로 휴가를 떠났다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박해현기자)

[아도르노 사상계보]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 벤야민 등과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1세대에 해당한다. 이들은 1930년대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무대로 활동하면서 헤겔 변증법적 역사관의 계승 발전, 마르크스 자본주의 분석의 재해석, 프로이트 정신분석학 등을 결합해 현대 산업 사회에 대한 비판이론을 전개했다. 이들은 나치즘 대두로 미국에 망명해 있는 동안에도 연구지를 발간하고 공동연구서를 내놓으면서 동질성을 확대해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50년 다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연구와 후진양성에 몰두했으며 마르쿠제, 하버마스, 슈미트 등 유럽과 전세계에 지적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을 배출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1960년대 후반 서방 세계의 대학가를 강타한 학생운동의 지적 배경이 됐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점차 폭력성을 더해가고 소련과 동유럽 국가 등 현실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친화적 태도를 보이는 것을 비판함으로써 양자는 큰 갈등을 빚게 됐다.

국내 지식인 사회에서 아도르노에 대한 관심은 지난 70년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 이론이 활발하게 소개되면서 높아졌다. 마르크스의 원전이 금서로 묶였던 시절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이론은 산업화사회의 폐해를 경험하기 시작한 젊은 지식인들의 눈길을 끌었 다. 하지만 80년대 학생운동권에서 아도르노는 그리 매력적인 이론가는 아니었다. 헤겔과 마르크스는 물론 베버와 프로이트 이해가 필수적인 아도르노 사상은 실천적 무기가 되기엔 너무 어려웠다. 또 소련 이론가들이 수립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와 북한의 주체사상이 급격히 영향력을 확대하는 가운데서 비판 이론에 대한 관심은 식어갔다.

그러나 전문 연구가들은 이 시기에 아도르노의 저작들을 잇따라 번역하기 시작했다. 독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주연 교수(숙명여대)가 '아도르노의 문학 이론'을 편역했고, '미학 이론'(홍승용 옮김) 등이 나왔다. 90년대 들어 '계몽의 변증법'(김유동 외 옮김)이 뒤늦게 나왔고, 문병호 교수(광주여대)의 연구서 '아도르노의 사회 이론과 예술이론', 김유동 교수(경상대)의 연구서 '아도르노와 현대 사상'이 속속 출간됐다. 또 올해 2월엔 서울대 음대에서 서양음악학 을 전공한 김방현씨의 '아도르노의 음악이론'이 박사 논문으로 통과됐다.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

 

 

 

 

아도르노
하르트무트 샤이블레 지음 / 한길사 / 1997년 3월

 

 

 

 

아도르노와 현대 사상
김유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7월

 

 

 

 

미학이론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홍승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11월

 

 

 

 

부정변증법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 한길사 / 1999년 9월

 

 

 

 

한줌의 도덕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최문규 옮김 / 솔출판사 / 2000년 3월
(절판되어서 구할 수가 없다. 아쉬운 책이다.)

 

 

 

 

아도르노
마틴 제이 지음, 서창렬 옮김 / 시공사 / 2000년 6월

 

 

 

 

계몽의 변증법
테오도르 아도르노 외 지음, 김유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8월

 

 

 

 

계몽의 변증법을 넘어서
노명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7월

 

 

 

 

말러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이정하 옮김 / 책세상 / 2004년 6월

 

 

 

 

프리즘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홍승용 엮음 / 문학동네 / 2004년 11월

 

 

 

 

미니마 모랄리아
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김유동 옮김 / 길 / 2005년 3월

(로쟈님이 알려주시길 이 책이 "한 줌의 도덕"이란다. 아흐흐...그러고 보니 제목이...)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
이순예 지음 / 풀빛 / 2005년 3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바람구두 > 박홍규 - 폭력론: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 아렌트의 논의를 중심으로

폭력론: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 아렌트의 논의를 중심으로

- 박홍규



1. 폭력의 뜻

국어사전에서 폭력이란 ‘함부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힘’으로 풀이되고, ‘폭력을 써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단체’가 폭력단이라고 설명된다. 그리고 폭력주의자는 테러리스트, 폭력주의는 테러리즘이라고 한다. 즉 폭력은 테러라는 것이 국어사전의 이해이다. 그러나 국어사전에서는 폭력의 영어를 force라고 표기한다. 일반적으로 영어에서 폭력은 테러(terror)도 힘(force)도 아닌 violence를 말한다. 영어사전에서 violence란 ‘비공인의 완력이나 물리적 힘에 의한 강습’을 뜻하고, 공인된 군대나 경찰의 경우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쟁이나 경찰력의 행사는 폭력이 아니게 된다. 이는 폭력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으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재산에 손해를 입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로 정의하는 입장과 같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폭력이 그런 것이다. 이러한 폭력 개념은 윤리나 정치 또는 법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관념이 되고 있는 것으로 폭력을 힘의 비합법적인 행사인 악으로 보는 전통적인 개념이다.

이런 입장은 ‘구체적인 행동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라고 비판하는 견해가 있다. 조희연·조현연, 「국가폭력·민주주의 투쟁·희생에 대한 총론적 이해」, 조희연 편, ꡔ국가폭력, 민주주의 투쟁, 그리고 희생ꡕ, 함께읽는책, 2002, 26쪽.

그러한 견해는 이러한 비판을 하면서도 달리 폭력을 정의하지 않고서, 억압의 폭력(기성 지배체제가 휘두르는 제도적 폭력, 공격적 폭력)과 해방의 폭력(필연적으로 불법적인 저항적 폭력, 생존의 방어를 위한 폭력)이란 개념을 사용하여 제도나 저항까지 폭력에 포함한다. 그러나 그런 개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폭력 개념을 구체적인 행동에만 집중한다고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이유는 이러한 견해에서 사용되는 폭력이란 개념은 매우 특수하기 때문이다. 즉 종래의 일반적인 폭력 개념은 억압의 폭력이나 해방의 폭력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고, 폭력이란 개념은 억압과 해방이라고 하는 정치 사회적인 맥락에서 특수하게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위 견해는 억압의 폭력을 전쟁, 고문, 살인, 학살 등으로 상징되는 ‘국가폭력’이란 말로 이해한다. 위의 책.

그러나 그러한 국가폭력도 구체적인 행동을 뜻하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물론 위 견해는 그런 국가폭력을 낳는 근거인 유신체제와 같은 악법을 ‘제도적 폭력’이라고 보고 있으나, 법제도까지 폭력이라고 보는 경우 폭력에 대한 더욱 엄밀한 정의가 필요하다.

폭력에 대한 구조적인 정의는 빈곤을 비롯한 사회적 부정의를 말하는 더욱 광범한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예컨대 Johan Galtung, “Violence, Peace and Peace Research," The Journal of Peace Research6(2), 1969, pp. 167-91. 특히 p. 168과 p. 173. 또한 N. Garver, “What Violence Is," in J. Rachels and F. A. Tilman (eds), Philosophical Issues: A Contemporary Introduction, New York: Harper &Row, 1972, pp. 223-8. 또한 빈곤과 관련해서는 S. Lee, 'Poverty and Violence', Social Theory and Practice 22 (1) 1996, pp. 67-82.

그것은 개인이나 제도에 의해 또는 사회 자체에 의해 가해지는 물질적인 피해는 물론 심리적인 피해까지 낳는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된다. 주로 평화 연구의 영역에서 평화를 저해하는 모든 반평화적 행태나 제도를 폭력으로 보려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너무나도 광범하고 모호하다는 비판도 있다. C. A. J. Coady, “The Idea of Violence," Journal of Applied Philosophy 3 (1) 1986, pp 3-19.

이와 달리 폭력=테러라는 말은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정부가 이슬람 또는 그 일부 세력 그리고 북한 등을 비난하며 지칭하는 개념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행사하는 힘은 ‘폭력’이 아니라 ‘정의’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슬람 등은 미국 등이 정의라고 주장하는 것을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국제관계에서 사용되는 폭력 논의는 그 판단이 쉽지 않으나, 어느 측이든 자신을 폭력이라고 말하지 않고 상대방을 비난하는 개념으로 사용함은 확실하다.

이처럼 폭력이란 말의 사용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적어도 법적으로 폭력은 불법이므로 그 합법성이 논의될 수 없다. 물론 법적인 차원에서도 가령 범죄의 피침해자가 자력구제를 가하는 경우라든가 또는 노동자나 노동조합의 쟁의행위와 같이 그 폭력에 대한 법적 판단이 반드시 구체적인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볼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예외적이다. 그러나 그런 법적 평가와 무관하게 억압적 국가 권력 자체를 ‘합법적 폭력’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에 대한 법적인 판단은 국가 권력 자체를 폭력이 아니라 합법적인 ‘권력’이라고 보는 것을 전제로 하여, 권력의 부당한 폭력적 행사에 대해서만 법은 적어도 원칙적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여하튼 그런 부당한 권력의 폭력적 행사에 대해 비폭력을 주장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예컨대 인도의 간디처럼) 유효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대부분의 경우 더욱 큰 권력의 폭력적 행사를 초래할 수도 있고, 그런 경우에는 도리어 폭력적 저항(예컨대 알제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식민지 해방 투쟁)이 유효할 수 있다. 따라서 적어도 해방 전략의 차원에서 무조건적인 비폭력 주장은 반드시 유효한 것이 아니고, 폭력이 역사적으로 정당성을 갖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여하튼 이 글은 폭력에 대한 엄밀한 정의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정의에 대해서는 각종 사회과학 사전이나 문헌을 살펴볼 수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더 이상 다루지 않는다. 대신 이 글에서는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 아렌트의 폭력 논의를 중심으로 폭력에 대한 사상을 검토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논의의 핵심은 국가폭력과 그것에 대항하는 저항폭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개념에서 사용되는 폭력은 위에서 본 일반적인 폭력의 개념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즉 국가 권력의 부당한 폭력의 행사와 그것에 저항하는 정당한 폭력의 행사를 대립시켜 그 범주에서만 폭력을 검토하는 것이다.


2. 국가폭력과 저항폭력

사회과학에서는 흔히 근대 국가를 일정한 영토적 공간에서의 힘(force)의 합법적 독점체로 규정한다. 예컨대 앤터니 기든스, ꡔ현대사회학ꡕ, 김미숙 외 역, 을유문화사, 1992, 276쪽.

여기서 힘이라고 한 force를 우리말 번역에서는 ‘폭력’이라고 하나, 그 폭력은 당연히 위에서 말한 법적인 개념이 아니라 정치학적, 사회학적 개념으로써 힘을 말하는 것이므로 위에서 말한 법적 폭력과는 구별해야 한다. 여기서 국가의 폭력이라 함은 법적 차원에서 권력이라고 불리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적어도 합법적 폭력인 권력인 한 그것을 불법적인 폭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국가 자체를 폭력 조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이는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한 것이리라.

문제는 근대 국가가 합법적인 힘(폭력)의 독점인 권력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경우에 따라 권력의 이름으로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이고, 이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시민에 의한 저항의 폭력이 당연히 발생한다는 점에 있다. 이처럼 국가 기관이나 국가 관련 요원이 그 부당한 폭력에 의한 직간접의 희생자인 시민들에게 공포감과 복종심을 가질 수 있도록 폭력이나 위협행동을 의도적으로 행하는 것을 ‘국가폭력’(State Terror)이라고 할 수 있고, 이에 정당하게 저항하는 ‘저항폭력’을 대치시킬 수 있다. 따라서 저항폭력은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것이고 정당성을 갖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두 폭력의 대치는 흔히 위기 상황에서 나타난다. 그 하나가 1920대의 독일에서였다. 즉 1917년 러시아에서 2월혁명(부르주아 혁명)과 10월혁명(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거쳐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고, 이어 1918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11월 혁명이 터져 제국이 무너져 각지에서 혁명적 폭력 기관으로서 병사·노동자평의회가 수립되었다. 그 후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그에 의한 스팔타카스단의 폭력 봉기가 일어났으나 실패했다. 그런 가운데 프롤레타리아의 비권력적인 폭력에의 기대가 지식인들과 민중 사이에서 높아졌다.

이 시기에 와서, 시민적 권리=시민법의 주체로서 각 시민이, 자연상태에서 행사하는 ‘폭력’을 ‘법’의 경계선 안에서 하나의 ‘권력’으로 독점시킨다는 전제에 선 근대 시민사회는 중대한 위기를 맞았다. 즉 국가는 그 ‘권력’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권력의 본질인 ‘폭력’을 계속 추구하여 가장 야만적인 폭력인 제국주의 전쟁과 계급 갈등의 유지에로 나아갔고, 이에 대해 시민사회는 그것을 억제하기는커녕 도리어 국가가 주장하는 ‘이성’이나 ‘도덕’ 및 ‘법’이라는 것에 순응했다. 근대 국가의 시민법 질서 틀 안에서 ‘주체’로 자기를 형성한 ‘시민’에게는 법의 목표인 실질적인 ‘정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혁명적 에너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부르주아 국가 틀이 온존되고 시민이 그 속에 존재하는 한 법과 정의의 괴리는 극복될 수 없었다.

이 시기에 브로흐, 루카치, 그람시 같은 지식인들이 급속하게 공산당에 접근하고,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연구소에 모인 폴록이나 호르크하이머 같은 젊은 학자들이 네오 맑스주의적인 관점에서 계몽된 시민사회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게 된 배경에는, 폭력적인 국가 권력 앞에 무력한 부르주아 시민문화에 대한 절망이 있었다. 따라서 부르주아적인 권력 쟁탈과는 무관한 ‘정의’를 목표로 한 프롤레타리아 ‘폭력’의 가능성을 논의하여 ‘근대’라는 감옥을 탈출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당대 지식인의 급선무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벤야민의 폭력론이 나왔다.

3. 소렐과 벤야민의 폭력론

벤야민의 폭력론은 조르주 소렐의 ꡔ폭력론ꡕ(1908)에 근거한다. 소렐은 공포 정치로 변질된 프랑스 대혁명(1789)의 담당자인 부르주아에 의한 국가 권력의 남용과, 노동조합의 총파업을 통해 ‘법’의 지배를 타파하고자 한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을 명확히 구별한다. 즉 부르주아가 혁명적 정치 행동을 야기해도 그것은 ‘법’에 의해 기존의 국가 형태를 온존시키면서 권력을 특권자의 것으로 유지하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나,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은 ‘법’을 떠나 어떤 종류의 국가 권력 형태도 용인하지 않고 순수한 아나키를 지향한다고 소렐은 주장했다.

이러한 소렐의 주장 역시 20세기 초엽 프랑스의 위기 상황을 의식한 것이나, 소렐의 폭력론이 나온 지 13년 뒤에 쓰여진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은 위에서 설명한 1920년대 독일의 현실적 위기에서 소렐의 논의를 발전시킨 것이다. 소렐의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법’에 의하느냐 아니냐 하는 점이다. 이를 벤야민은 Rechtssetzung이라는 개념으로 부른다. 일본에서는 이를 법차정(法借定)이라고 번역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따르는 견해가 있으나, 차정이란 우리말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이니 우리말로 삼기에는 어색하다. 여기서는 반드시 정확한 번역이라고 볼 수 없으나, 편의상 ‘법준거’라는 말로 옮기도록 하자. 벤야민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법준거에서 폭력의 기능은 아래와 같은 의미에서 이중적이다. 즉 법준거는 폭력을 수단으로 하여 법으로 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추구하나, 목적이 된 것이 법으로 제정된 순간 폭 력을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욱 엄밀한 의미에서 게다가 직접적으로 폭력을―폭력으로부터 자유롭고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리고 은밀하게 폭력과 결부되어 있는 목적을 권력의 이름으로 법으로 제정함에 따라―법준거적인 폭력으로 만들게 된다. 법 준거는 권력준거이고, 그 점에서 폭력을 직접 선언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정의가 온전 히 신적인 목적준거의 원리임에 대해 권력은 온전히 신화적인 법준거의 원리이다. Walter Benjamin, Zur Kritik der Gewalt, in: Angelus Novus=Ausgewälte Schriften 2, 1966 Frankfurte a. M. (Shurkamp), S. 61.


벤야민은 자기 목적화 되지 않는 폭력의 최종 도달 목표인 ‘정의’와, 일단 준거되어 폭력적인 ‘권력’ 행사의 근거로 변한 ‘법’을 구별한다. 이는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정의를 뜻하는 justice가 라틴어의 ius에서 파생된 말인 것과 달리 독일어에서는 각각 Gerechtigkeit와 Recht가 구별되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벤야민에 의하면 법은 권력자의 ‘법 이전 특권’(Vor-recht)을 유지하기 위해 그 권력이 미치는 경계선을 정하고 고정화한다. 그리고 그 경계선을 침범하는 자를 범죄자로 보고 속죄를 요구한다. 이를 벤야민은 신화적인 법이 지배하는 세계로 본다. 그 세계에서 법=권리의 주체인 각자는 시원적인 폭력을 통해 준거된 법의 경계선 안에 머물도록 강요된다고 벤야민은 주장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법적 폭력을 법 수호적 폭력(기존의 법을 유지하기 위한 폭력)과 법 형성적 폭력(새로운 법을 제기하는 폭력)으로 구분하면서도 그 둘 모두 법에 의한 지배를 전제함으로써 지배 권력관계를 재생산하는 신화적 폭력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여기서 신화적이란 법을 변화시킴에 의해 지배 권력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법에서 흔히 실정법과 자연법으로 구분하는 것에 각각 대응된다. 즉 벤야민은 실정법과 자연법에서 폭력의 개념이 모두 정당한 목적과 수단의 관계라는 도그마를 공유한다고 비판하고, 시인된 합법적 폭력과 시인되지 않은 불법적 폭력의 구별이 법과 관련된 폭력성을 간과한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반면 벤야민이 신적 폭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법과의 연관을 부정하는 혁명적 폭력으로서, 법적 폭력-신화적 폭력을 폐기하기 위한 것이다. 즉 법의 경계선을 파괴하고 ‘법권력’ 하에서의 죄를 제거하기 위한 폭력이다. 파괴적인 작용을 결과한다는 점에서 신적 폭력도 신화적 폭력과 유사하나, 전자가 파괴적인 것은 오직 재화, 법=권리, 생활과 같은 외적 사항과 관련되고, 생명 있는 것의 영혼을 파괴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고 벤야민은 주장한다. 즉 신적인 폭력은 희생의 피를 흐르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대립을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신이 대립하듯이, 신화적 폭력에는 신적인 폭력이 대립한다. 게다가 모든 점에서 대립한다. 신화적 폭력이 법에 준거하는 것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을 파괴한다. 전자가 경계를 설정한다면 후자는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자가 죄를 만들고 속죄하게 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죄를 제거한다. 전자가 협박적이라면 후자는 충격적이고, 전자가 피의 냄새를 풍긴다면 후자는 피의 냄새가 없고 치명적이다. 위의 글, S. 63.


이러한 신적인 폭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신화적 폭력과 달리 명확하지 않다. 벤야민 자신은 그런 신적인 폭력의 보기로서 「폭력비판론」의 마지막에 구약성경의 예를 들고 있다. 즉 민수기(民數記)의 전설에 나오는 신의 심판이다. 그것은 예고도 협박도 없이 특권자인 제사장(레비) 무리에게 퍼부어져 그들을 섬멸시키는 심판이다.

따라서 이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법과 결별한 정의를 긍정하기 위하여 논리적으로 요청되는 어떤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문제는 신적 폭력이 목적과 수단이라는 관계를 면제받는 순수 폭력이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이를 데리다도 ꡔꡔ법의 힘ꡕ에서 비판한다. 즉 그에 의하면 벤야민은 법을 창설하는 ‘힘의 일격’이라는 것의 근거 없음을 폭로하여 법을 탈구축하면서도 다시 탈구축할 수 없는 정의를 내세워 법과의 구분을 시도했으나, 그 정의란 것이 다른 법으로 타락하지 않을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적 폭력이라고 하는 것도 언제나 신화적 폭력으로 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그가 말한 신화적 폭력에 의해 근대 초월을 목표로 한 나치스가 집권하여 망명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서도 프롤레타리아를 주체로 하는 비권력적인 신적 폭력에 의한 폭력혁명의 가능성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복제기술시대의 예술작품」(1936)의 마지막에서 나치즘에 의한 정치의 ‘미학-감성화’에 대해 프롤레타리아는 그와 반대로 미학의 정치화에 의해 응하리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는 반대였고, 결국 벤야민은 현실에 대한 비관 끝에 자살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벤야민이 그 의도와는 전혀 거꾸로 그가 반대한 나치스의 이데올로기에 접근했다고 하는 아이러니한 점이다. 즉 나치스에 의해 폭력에 의해 계몽화된 시민사회의 법질서를 근본으로부터 파괴하고자 하는 혁명적-메시아적 근본주의가 점증하는 가운데 벤야민의 주장은 나치스의 주장, 특히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과 결과적으로는 일치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가 주장한 신적 폭력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폭력 혁명도 이미 1930년대에 스탈린주의에 의해 그 허구성 역시 명백히 드러났다고 하는 사실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4. 데리다의 폭력론

1989년은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맞은 해였다. 그 해 데리다가 미국에서 행한 「법에서 정의로」라는 강연과, 이듬해 발표한 「벤야민의 이름」이라는 논문을 합쳐 발표된 책이 데리다의 ꡔ법의 힘ꡕ(1994)이었다. 1989년 프랑스는 1921년 독일의 벤야민처럼 권력으로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폭력을 논의하기에는 그 역사적 상황이 너무 달랐다. 당시 2세기에 걸친 프랑스 혁명의 성과가 요란하게 축하되었으나, 혁명이 초래한 두 가지 정치 형태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특히 사회주의가 패배한 시점이었다. 즉 벤야민이 주장한 프롤레타리아의 순수한 폭력에 의해 비권력적인 최종의 해방을 목표로 삼았어야 할 사회주의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 이상으로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킨 결과, 당시 폴란드에서 보듯이 노동조합 총파업 등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법질서가 붕괴되었다. 게다가 데리다의 첫 강연이 있고 난 직후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리다는 벤야민을 비판한다. 우선 그는 벤야민이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을 구별함은 그리스적인 것과 유태적인 것의 이분법에 대응하고, 벤야민의 관점은 유태적인 것이라고 본다. 마찬가지로 그런 유태적 관점에 입각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 그렇듯이 벤야민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자 했으나, 그 파괴 이후 다시금 법준거의 권력으로 타락하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데리다는 비판한다.

데리다는 벤야민이 말하는 폭력(Gewalt)이 독일에서는 입법권(gesetzgebende Gewalt), 영적 권위(geistische Gewalt), 국가권력(Staatsgewalt) 등과 같이 권력이나 권위를 뜻함을 지적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기성 법질서에 근거한 권력이 폐기하는 ‘신적 폭력’은 그 폐기를 선언한 그 순간부터 그것을 대신하는 새로운 권력으로 변모한다. 즉 폭력의 선언은 동시에 법준거의 선언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화적 법권력으로 변한 폭력은 역사 과정 속에서 부패하고 신적인 순수함으로부터 먼 것임을 폭로한다고 데리다는 본다. 벤야민은 법권력으로 준거된 그러한 부패를 극복하기 위해 신적 폭력을 요구하지만, ‘신적’인 것은 기성의 신화적 폭력의 폐기를 선언하는 순간 스스로 신화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고 데리다는 비판한 것이다.

여기서 데리다는 폭력이 나타나는 순간만은 순수하다는 주장을 새롭게 제기한다. 즉 벤야민이 순수한 신적 폭력에 역사적인 희망을 거는 것과 달리, 데리다는 그 순간을 특권화하지 않고 우리가 일상에서 직면하는 법 앞에서의 ‘결단’ 속에서 폭력에 의한 단절의 순간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데리다는 그 순간에 정의를 향한 일보를 딛게 되나, 동시에 그 순간은 광기를 가져 폭력을 증폭시킬 수도 있음을 경고하면서 그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데리다는 정의를 향한 발걸음에서 시간적으로는 물론 공간적으로도 무한한 타인에 대한 책임이 수반된다고 주장한다. 법을 개혁하고 혁명을 반복해도 법 자체의 근원적인 부정적 성격은 근절되지 않고 정의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가 되기 마련이라고 보면서도, 데리다는 타인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갖는 결단을 통해 다시금 정의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리다가 말하는 정의란 ‘불가능한 것에 대한 경험’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데리다의 주장은 그의 탈구축 또는 해체와 정치, 윤리, 법의 관계를 논의한 것으로 주목된다. 그러나 ‘탈구축이 정의이다’라는 그의 결론은 대단히 난해하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경험’은 어떻게 가능하고, 그것을 정의로 삼는 순수한 결단의 폭력이란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의 논의가 모두 그렇듯이 논리적으로 그 내용을 확정하기란 어렵다. 이상의 주장에서도 그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점은 그가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벤야민식의 메시아주의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논리 이전의 심정적 또는 상황적 동감을 부정할 수 없는 점은 사실이다. 특히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이 1968년 범세계적인 학생운동에서 경전처럼 읽힌 점, 또한 데리다의 폭력론 역시 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그 전후의 모든 사회적 저항에서 그들의 주장이 정당화되는 것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광주민중저항을 비롯한 저항운동에서 그들의 주장은 충분히 원용될 수 있다.

특히 데리다의 논의 중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서구 근대의 이성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비이성적인 폭력에 의해 행사되었다고 지적하는 점이다. 데리다는 이를 ‘국내 식민지주의’라고 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그것은 언어에 의해 강요된 폭력이다.

주지하듯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법이나 국가법을 수립하는 폭력은, 국가에 의해 재편성된 소수 민족 또는 소수 종족에 하나의 언어를 강제하는 것에 있다. 프랑스에서 이 사태는 적어도 두 가지 경우에 생겼다. 그 최초의 것은 1539년의 왕령이 사법과 행정 용어로 불어를 강제하고 라틴어를 금지함에 의해 군주제 국가를 통합한 것이 었다.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프랑스혁명이었다. 당시 언어의 통일은 가장 억압적인 교육상의 전환을 초래했다. Jacques Derrida, “Force of Law: The "Mystical Foundation of Authority," in Drucilla Cornell, Michael Rosenfeld, David Gray Carlson eds., 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 New York, 1992, p. 21.


데리다는 ‘법에 있어서, 그리고 법에 관한 두 종류의 폭력’을 구별한다. 즉 ‘법을 수립하는 폭력, 곧 법을 제정하고 배치하는 폭력과, 법을 유지하는 폭력, 곧 법의 영속력과 강제력을 유지하고 확정하며 보증하는 폭력’이다. 위의 책, p. 31.

이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근대성 역사의 특징이다. 제3 세계에서도 제1 유형의 폭력―수립하는 폭력―이 제2 유형의 폭력에 대한 제3 세계 민중의 관계에 의해 대부분 결정되고 있는 것은 쉽게 발견된다. 문제는 그러한 폭력이 식민 종주국에서는 ‘국내 식민지주의’로 나타나도 근대화를 뜻했으나 식민지에서는 반드시 그렇지 못했다고 하는 점이다. 예컨대 제3세계에서는 여전히 국가 기구의 법적 강제인 경찰에 의해 고문이 가해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근대적 역사관은 실패한다. 따라서 유일한 방법은 피억압자로부터 배우는 것이 된다. 물론 근대적 역사관이 무조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컨대 분배에 관한 정의의 관념 그 자체가 필요하다는 것은 시민, 민주주의, 복지를 둘러싼 근대적 개념이 모든 계급―특히 피억압 계급―에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관이 진정으로 피억압자의 대화에서 생겨난 것인지는 의문이다. 대화는 목적론적이어서는 안 된다. 즉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선험적으로 옳다는 것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

극단적으로 피억압자가 혁명에 이르게 되는 경우라도 그들이 그 혁명에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람시는 그 점을 인정하고서 피억압자는 혁명적 지식인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했다.

피억압 계급은 스스로가 <국가>로 되기까지 통일되어 있지 않고 통일될 수도 없다. 그 역사는 필연적으로 단편화되고 있는 삽화풍이다. 이러한 집단의 역사적 활동에는 (적어도 어느 정도 잠정적 단계의) 통일에의 경향이 확실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 경향은 지배자 집단의 활동에 의해 끊임없이 중단된다. 실제로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피억압집단은 자신들을 방위하고자 급급하는 것에 불과하다. Antonio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of Antonio Gramsci, trans. and ed. Quintin Hoare and Geoffrey Nowell Smith, New York, 1971, pp. 52, 54-55.

우리는 국가에 의해 구조화된 사회에 살고 있고 피억압자는 그 현실과 결부된 지식 형태를 필요로 하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 지식 형태는 국가나 정부, 전체와 결부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즉 계몽적 합리주의의 유산과는 결별하는 것이어야 한다. 결국 데리다의 논의는 지식인 논의로 나아간다.


5. 파농의 폭력론

이상은 서구에서의 폭력론에 대한 검토이다. 우리는 식민지 차원의 폭력론으로 파농의 그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파농은 식민지화란 어떤 땅에 대포와 기계의 힘으로 침략해온 타종족이 그 원주민을 지배하여 토지와 인간을 사유화하는 폭력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식민지 사회란 포식과 기아로 분할된 사회, 곧 그 경계가 경찰과 군대에 의해 직접 유지되는 인종차별적인 폭력 사회라고 규정한다. 그곳에서 원주민은 절대악이고, 반가치이며, 동물이나 물건에 가까운 수동적인 존재, 요컨대 비인간적인 것으로 식민자에 의해 조작된 대상이다. 이러한 식민지화 역사의 배후에, 식민지 사회 구조의 근본에는 식민자=타자의 폭력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을 해방하고 그 주체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식민지 체제를 타도해야 한다고 파농은 주장한다. 즉 비식민지화란 폭력 현상이고 인간 종족의 교대를 뜻한다. 즉 식민지화 역사를 통하여 심신이 모두 억제되고 고통당하며 동물화 되고 사물화된 원주민이 자신의 비인간성에 눈을 떠서, 내면에 저장된 폭력(내면화된 타자의 폭력)을 공격성(반대 폭력)으로 반전시키는 운동이 비식민지화 운동이라고 파농은 주장한다.

요컨대 폭력이 폭력을 낳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비식민지화 과정은 식민지화 과정 속에 이미 잠재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은 역사의 필연적인 과정이 된다고 파농은 말한다. 그에 의하면 식민지주의는 생각하는 기계도 아니고, 이성을 부여받은 육체도 아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의 폭력으로서, 그것 이상으로 ‘더욱 큰 폭력’에 의해서만 굴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더욱 큰 폭력’을 구현하고 인수하며 담당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파농은 먼저 식민지 시대에는 정당, 지식인, 상인 등이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나, 참으로 혁명적인 폭력을 구현하는 자는 농민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의 해방 투쟁기에는 도시에서 산골로 도망간 지식인과 소수의 활동가가 농민을 만남에 의해 인민의 의식이 전진한다고 본다. 이어 봉기가 폭발하면 도시 주변부에 집결하는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통하여 그것은 확대된다고 주장한다.

파농은 식민지 사회에서 도시 프롤레타리아, 기술자, 관리 등은 특권층으로서, 식민지주의와 타협하여 비폭력을 주장한다고 본다. 이에 대해 농민대중, 그리고 토지를 수탈당하여 도시주변을 방황하는 부랑자, 범죄자, 실업자들이 식민지주의의 이익으로부터 제외되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존재라고 본다. 그들만이 비타협적이고, 오직 폭력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파농은 비식민지화 운동을 단순히 인간 종족의 교대로만 본 것은 아니다. 이 운동이 동시에 ‘새로운 인간의 창조’라는 것, 존재의 ‘근본적인 변경’이라는 것, 곧 가치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어떤 이념이나 추상의 차원이 아니라 ‘대지에 저주받은 자들’이 비식민지화 운동을 통하여 형성하는 역사적인 존재라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비식민화 운동이 폭력현상인 바 그 존재는 또한 폭력적 존재이기도 하다.

파농에 의하면 실제로 ‘새로운 인간’은 먼저 ‘식민지화된 신체’로 제출된다. 바로 굶주리고 억눌린 존재로서이다. 그러한 존재는 하루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아니다. 식민지에 대한 최초의 반응은 싸움과 범죄 및 부족 항쟁으로, 또한 원시적 종교와 마술에 대한 신앙 및 집단무용으로 나타난다. 억압이 강하면 강할수록 억압에 대한 눈뜸은 늦어지고 장기화된다.

파농과 달리 혁명 이론가들은 그러한 타락과 일탈 및 후퇴를 직시하지 않고 자각은 직선적으로 달성된다고들 했다. 그러나 파농은 종교도 주술도 ‘아편’으로 보지 않고 몽상도 광기도 부정적인 요인으로 배척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이 모든 것을 폭력의 과정으로, 반대 폭력에 대한 성숙으로 ‘새로운 인간의 창조’를 향한 최초의 단계, 곧 ‘폭력의 분위기’로 보았다. 파농에 의하면 이러한 ‘폭력의 분위기’는 차차 ‘행동화한 폭력’으로 나아간다. 그 계기는 식민지의 탄압이다. 여기서 폭력은 신체의 긴장과 이완, 집단 무용이나 축제로는 처리될 수 없다. 먹느냐 먹히느냐가 지배하는 반란의 초기 단계에 신체상 중요한 것은 노동이다. 그러나 여기서 노동이란 생산 노동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식민지체제에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도리어 태만이야말로 비협력이자, 저항으로 평가된다. 반대로 원주민에게 가치 있는 노동이란 식민주의를 타도하는 노동이다.

파농은 말한다. ‘새로운 인간’, 곧 ‘완전한 인간’은 근육과 두뇌를 분리시키지 않고 노동 속에서 양자를 통일하는 인간이고, 능률과 효율이 아니라 자기 신체와 두뇌의 리듬에 따라 노동하는 인간이다. 그리고 도구나 기술에 지배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목적에 따라서만 도구나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이다. 또한 일-행동의 계획으로부터 실현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 타인과 함께 의식적으로 참가하고 그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인간이다. 그리고 자율적인 공동체의 자율적인 구성원으로서 타인에 대한 겸양, 배려, 사랑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동료와의 협력이나 의사소통에 가치를 두는 인간이다. 나아가 타자-타민족의 착취와 지배를 거부하고 타자-타민족과의 공생을 원리로 삼는 인간이다. 이러한 새로운 인간상이 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에서도 불가능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자율적인 공동체와 완전한 인간의 미래는 그 어느 것도 아닌 제3 세계에서만 가능하다고 파농은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파농의 희망 역시 제3 세계에서 과연 현실적으로 구현되었는지 의심할 수 있다.

6. 아렌트의 폭력론

아렌트는 유럽과 달리 정당한 법의 근거를 폭력을 비롯한 다른 것에서 구하려는 전통이 없는 미국을 통해 위에서 지적한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을 비판하면서 나름의 해결을 강구하고자 한다. 따라서 언뜻 보면 아렌트는 소렐 등이 말한 저항폭력을 부정하고, 그들이 국가폭력이라고 한 권력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그녀의 ꡔ폭력론ꡕ(1970)에서 중점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나,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ꡔ인간의 조건ꡕ(1958)을 비롯한 그녀의 정치사상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먼저 ꡔ폭력론ꡕ에서 그녀는 폭력은 권력과 대립한다는 전통적인 주장을 전제한다. 그녀에 의하면 폭력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권력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토론하고 행동하여 생기는 것으로 그 자체가 정당성을 갖는다. 따라서 권력이 폭력을 사용하면 이미 권력이 아니고 정당성도 없다. 그녀에 의하면 소렐 이후 폭력론이 등장한 것은 근대 사회의 이성이나 진보라는 획일화에 의해 토론과 행동을 통한 공공권이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미국을 그러한 근대적 전통에서 해방된 개인, 그 개인이 자유로운 의사를 서로 표명할 수 있는 공적 생활에 기초를 둔 공화제의 원리로 체현한 나라로 본다. 물론 그녀는 미국에도 많은 소수 인종에 대한 차별을 당연히 인정하나, 이는 자유의 영역인 정치=공공권과는 무관한 사회의 영역으로 본다.

아렌트는 ꡔ인간의 조건ꡕ에서 그런 정치의 이상을 고대 그리스에서 생긴 공공권에서 발견한다. 그녀가 말하는 공공권이란 생물적 욕구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사람들이 언론과 설득에 의해 자유롭게 활동하는 공간을 뜻한다. 반면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가계가 추구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근대 국가에 와서 가계가 가정을 뛰어넘어 국가의 관심사가 되어 사회적 영역이 나타났고, 인종차별과 같은 폭력은 그런 영역에서 문제된다고 아렌트는 본다.

아렌트는 근대 시민혁명의 두 가지인 1776년의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을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본다. 그녀는 우리가 말하는 자유를 Liberation, 즉 물질적으로 결핍된 상태나 물리적으로 억압된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소극적 개념과, Freedom, 즉 자신의 정신적 활동의 단서를 스스로 만들고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스스로 형성해 가는 능동적인 개념으로 구별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Freedom이 중심이었으나, 근대 국가에서는 Liberation이 중심이 되었고, 이는 맑스를 거쳐 사회주의 혁명에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전체주의는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19-20세기 질서를 묘사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녀가 말하는 19세기 서구형 국민 국가는 자본주의를 강력히 추진하여 제국주의적 팽창을 결과했다. 그것은 또한 인종주의와 결탁하여 ‘피와 땅의 공동체’로 변질되어 반유태주의를 격화시켰고, 마찬가지로 제국 사이의 대립도 격화시켜 제1차대전을 낳았다. 그 후 20세기는 경찰 조직과 강제수용소를 통해, ‘국민’의 인종화와 전쟁에 의해 대량 생산된 무국적자=무권리자를 국민에서 배제했다.

아렌트에 의하면 프랑스 대혁명 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 정치는 자유로운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들 사이를 무시하고 개인의 마음 속 문제인 동정을 통일적 원리로 삼아 인간을 일반의지를 갖는 공동체로 조직하려고 한 시도였다. 그녀는 이러한 ‘동정에의 열광’에 근거한 정치가 폭력적 충동을 인간의 자연적 본능으로 보아 인민을 하나의 육체처럼 움직이고 하나의 의지를 갖는 것처럼 행위하는 영혼으로 변모시켰다고 본다. 어떤 이성적 제약도 받지 않는 이 육체는 스스로에게 동화할 수 없는 것을 폭력에 의해 파괴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폴리스적인 자유와는 상용될 수 없는 자연적 폭력을 해방시킨 프랑스 혁명에 반해 미국 혁명은 ‘자유의 창설’이라는 본래 목적을 잃지 않고 계속 추구했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그녀에 의하면 미국에도 빈민은 존재했으나 프랑스나 독일처럼 비참하지는 않았고, 경제적 격차는 정치가 아니라 사회 문제로 여겨져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요구에 의해 혁명의 방향이 결정되거나 변질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관심도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자유의 창설에 대한 참여였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미국에서도 인민(people)은 존재했으나, 그것은 프랑스처럼 자연적 충동에 의해 하나의 의지를 갖는 육체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성을 보증하는 자유로운 결합체를 의미했다. 이는 제퍼슨이나 매디슨 같은 초기 대통령들이 정치적 자유의 본질을 복수성에서 구한 것에 알 수 있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즉 그들은 상이한 의견을 갖는 사람들 사이의 교환이 있음으로 비로소 상대를 변론에 의해 설득하고자 하는 활동의 계기가 생긴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와 같이 일반의지가 지배하는 여론에는 다양성이 포함될 여지가 없으나, 미국 공화제에서는 처음부터 전원일치의 허구가 거부되고 서로의 논의를 통해 개인적인 이성의 잘못을 교정하면서 공공생활권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이다. 즉 상이한 의견의 당파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미국 통치형태의 특징이라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아렌트는 자신의 자유로운 활동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존재에 의해 형이상학적으로 근거되는 삶의 방식을 인간성에 반하는 것으로 거부한다. 그녀에 의하면 형이상학적 원리에 의해 일원적으로 지배되는 세계에는 복수성에 근거한 인간성을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없다. 따라서 종교적, 초월적 권위에 의해 외부로부터 정당화된 중세 기독교 세계의 통치체제는 인간성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렌트는 근대 혁명 속에서 탈형이상학적, 세속적인 정치권력 창설의 계기를 발견하고자 한다. 그러나 현실 혁명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자기 통치의 근거를 자신이 창설한 자유가 아니라, 어떤 형태의 신적인 원리에서 구한 혁명 전권은 형이상학에 빠져 자유로운 활동을 위한 공간을 스스로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반의지’의 표현이라는 여론에 의해 자기 통치를 신성화하고자 한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혁명가는 좌절했다고 아렌트는 분석한다. 즉 앙시앙 레짐의 절대군주제로부터 자기를 해방하고자 한 그들은 절대군주를 대신하는 새로운 절대자를 실체적으로 창출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에 의하면 식민지 미국에서는 그 지배자인 영국에서 절대군주제가 없어졌고 ‘법에 의해 제한된’ 군주제가 있었던 탓으로 미국인들은 ‘법을 초월한 절대적 지배자’라는 환상에 빠지지 않았다. 반면 더욱 강력한 권위를 갖는 절대자를 인민에게 구한 프랑스에서는 자신의 절대성과 동화될 수 없는 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정치 이전의 자연적 폭력’으로 변질되었다. 인민이라는 이름으로 절대화된 군중의 폭력은 절대군주제를 붕괴시켰으나, 동시에 같은 폭력에 의해 혁명 정부 자체가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정치에서 절대자가 담당하는 기능을 다음 둘로 본다. 하나는 인간에 의한 법제정을 둘러싼 악순환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작이라고 하는 악순환이다. 첫째는 입법의 타당성과 합법성을 외부, 즉 ‘더욱 고차원의 법’에서 구하는 것으로서 인위적인 법을 언제나 다른 권위에서 구하는 악순환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불완전하므로 결국은 자신의 이름으로 둘째의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게 된다. 즉 인민의 이름으로이다. 이는 바로 앞에서 본 소렐이나 벤야민 또는 데리다까지의 ‘신화적 폭력’이라는 문제의식이었다.

아렌트는 혁명에서 절대자는, 이러한 두 가지 악순환을 회피하여 합법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하고자 하는 경우 논리적으로 요구된다고 본다. 즉 근대초의 절대군주제는 중세 기독교 세계의 신적인 합법성을 차단하고 세속 권력을 수립하고자 하여 생긴 것으로 중세적 권위의 잔재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프랑스 혁명에서는 절대군주제 대신 군중=인민이 절대자로 나타났다. 이는 법에 구속되지 않는 자연적 폭력을 해방시켰다.

반면 미국에서는 인민이 권력의 담당자로 여겨졌으나 법의 원천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대신 법은 풀뿌리 차원의 인민의 의지를 넘는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그 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혁명 과정과 함께 갱신되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즉 Freedom의 영역을 새로이 창설하고자 하는 혁명운동의 과정이 법의 원천이고 ‘보다 높은 법’은 언제나 생성되는 것이었다. 아렌트에 의하면 실체화되지 않고 언제나 자기생산을 계속하는 법이 ‘인민에 의한 통치’를 구속하고, ‘정치 이전의 폭력’을 봉쇄하는 메커니즘이 생김에 의해 미국 혁명은 절대자를 둘러싼 세속화된 형이상학에 빠지지 않았다. 즉 절대자가 실체적으로 표상화되지 않았기에 권력이 폭력으로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렌트가 말하는 역사의 새로운 시작은 역사를 초월한 절대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창설’하는 ‘행위’ 그 자체 속에 있다. 즉 행위가 절대이지 주체가 절대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 소렐-벤야민-데리다의 문제는 아렌트에 와서 자신의 창설 행위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는 미국 혁명에서 해답을 보이게 된다. 아렌트는 ꡔ공화국의 위기ꡕ(1972)에서 미국 헌법의 기본으로 시민적 불복종을 다루었다. 즉 그것은 위법적 폭력행위가 아니라 헌법 옹호의 행위로서 합법화된 것이었다. 여기서 폭력론은 시민적 불복종의 논의로 나아간다.


7. 맺음말

지금까지 소렐, 벤야민, 데리다, 파농의 저항적 폭력론과 그것에 비판적인 아렌트의 폭력론을 살펴보았다. 그것들은 나름대로의 현실 상황에서 생겨난 논의들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어떤 주장이 반드시 옳고 그르다고 재단할 필요는 없을 것이나, 필자의 입장은 아렌트의 주장에 가깝다. 여하튼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한 두 가지를 더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하나는 국민형성의 폭력적 구조 문제이다. 근대사에서 국민형성의 폭력이란 ‘국민’이 ‘되는’ 과정을 말하는 것으로, 전쟁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전쟁이 비상사태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생활과 관련된다고 하는 점이다. ‘전시동원’이란 신체의 동원으로서 생활의 규율화를 통해 가능하고, 생활 규율로부터 군사 규율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군사 규율은 생활 규율로 다시 내면화된다. 우리는 그러한 폭력적 구조를 식민지 시대와 군사독재 시대에 경험했고, 그러한 구조는 분단에 의한 냉전 의식이 여전히 팽배한 지금도 상당 부분 온존되고 있다.

이러한 생활 구조적인 폭력성은 특히 성의 측면에서 나타난다. 근대 국가가 성을 제도로써 통제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전시성 성폭력인 ‘종군위안부’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 이전부터 소위 ‘훌륭한 국민’을 재생산하기 위한 성과 생식의 통제를 가한 것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현모양처’와 ‘종군위안부’라는 여성에 대한 이중 기준이 남성에 의해 이용되어 성폭력은 모든 국민에게 작용했다. 이러한 이중 기준은 식민지 전쟁과 6.25 전쟁이 끝난 후에는 물론, 지금까지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식민지의 경우 가해자 일본만이 아니라 피해자 조선-한국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그것은 서양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제도를 모방하여 발전시킨 것으로서, 서양에서도 식민지에서 더욱 가혹한 형태를 취했다. 그 근본인 경제의 논리와 민족 차별의 논리는 성 차별에도 그대로 관철되었으며, 일본의 그것은 서양식 성 관리 정책에 다름이 아니었고, 그 유습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러한 성에 대한 폭력적 구조는 노동, 사상, 교육 등등 국민형성의 모든 요소 속에 동일하게 유지되어 이미 기성의 신화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한 신화적 폭력에 대항하는 저항적 폭력, 벤야민이나 데리다 또는 파농이 말하는 신적 폭력 또는 결단적 폭력 등은 우리에게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도 다시금 신화적 폭력으로 변질되지 않고 그 순수성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또는 그 대안으로 아렌트가 말하는 폭력과 대치되는, 토론과 행동의 권력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 출처: 진보평론 제 17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바람구두 > [퍼온글] [펌] 강풀 - FTA를 말한다.

우와!  이젠 강풀도 FTA를 말하네요! 
원래 하던 연재를 중단하고 FTA 만화를 실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바람구두 > [퍼온글] [펌.평택범대위] 이윤엽 판화 인터넷 판매

 

이윤엽 판화 인터넷 판매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의 모습을 담은 이윤엽 작가의 판화를 판매합니다.

한 장 15,000원 (단 ‘대추리 사람들’ 30,000원)

판매 수익은 투쟁기금으로 사용됩니다.

판화를 구입하실 분은 아래의 연락처로 신청해주세요.

이메일 panhwa123@hanmail.net
주문신청 및 문의 : 016-498-2017
계좌번호 232702-04-080878 (국민은행, 진재연)

- 미군기지확장반대 팽성대책위 -

<작품 보기>

  
▲ 대추리 노인회관에서                         ▲ 대추리 풍경

   
▲ 대추리 농사꾼                                              ▲ 들일 나가는 강금순씨

  
▲ 전쟁놀이                                                     ▲ 얼굴1

     
▲ 얼굴2                                                 ▲ 씨뿌리는 사람

    
▲ 집달리                                    ▲ 5월 5일 황조롱이

   
▲ 5월 14일 대추리 사람들 (3만원)             ▲ 미군기지확장반대

   
▲ 도두2리                                                       ▲ 들에 선 조창묵님

    
▲ 황새울의 흰머리 독수리              ▲ 5월 4일 새볔 파밭

    
▲ 흙무지 들판                              ▲ 낮잠

   
▲ 민의형님                            ▲ 들판에 선 군인                   ▲ 염주를 줏은 병수형

  
▲ 대추리 가는 길                       ▲ 황새울 가족


▲ 비오는 날 대추리

   
▲ 삽에 걸린 비행기                     ▲ 대추리 부녀회장님


▲ 대추리 환삼덩쿨                    ▲ 공권력에 맞짱뜨는 사람-대추리에서

 
▲ 흙무지 들판에 솔부엉이                                           ▲ 부부-대추리에서



 오랜만에 평택범대위 홈에 갔더니 못 본 게시물이 많다. 도배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혹시라도 좋은 정보가 될까 해서. 이번 달에는 학기 동안 못 본 지인들 몇을 만나기로 했는데, 집구석에서 뒹구는 걸로 대신한 휴가비용이라 생각하고 몇 장 사야겠다. 개인적으로는 '대추리 가는 길'이 제일 맘에 든다. 나중에, 이 판화가 다시는 볼 수 없는 수몰지구의 사라진 풍경처럼 되지는 말았으면 정말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바람구두 > 회의주의자 당나귀 벤자민 보다 복서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1903년 6월 25일, 당시 인도의 식민지였던 벵골의 모티하리에서 식민지 하급관리의 아들(본명은 Eric Arthur Blair)로 태어난다. 그의 탄생일이 기묘하게도 한국전쟁 발발일인 6월 25일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작가 오웰은 우리나라에 많은 인연을 맺고 있다. 그는 6.25에 태어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사망했고, 1945년 출간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동물농장(Animal Farm)』이 외국어로 옮겨져 소개(1948년, 김길준)된 최초의 나라가 한국이었다.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이 냉전의 최전선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해외정보국(VSIA)은 1942년 6월 창립된 이래 주로 적대국에 대한 선전방송을 해온 기관이다. 전후 냉전 기간에는 주로 공산권 국가에 자유주의 진영의 이데올로기·문화·생활수준 등을 소개·선전하는 일을 했고, 한국어 방송은 1942년부터 시작했다. 오웰의 『동물농장』은 반공(反共)문학으로 분류되어 신생공화국의 이데올로기 투쟁을 위해 이용되었고, 같은 이유로 『1984년』 역시 출간되자마자 우리말로 옮겨진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1980년대 중반까지 미국에서 『동물농장』은 여전히 문제 있는 책으로 분류되었다. 저자인 조지 오웰이 공산주의자(사실은 무정부주의자)였고, 『동물농장』이 기본적으로 민중봉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하급관리의 자식으로 태어난 오웰은 1911년 수업료를 감해준다는 조건으로 사립기숙학교인 이튼에 입학하지만, 부유층이나 귀족 등 상류계급과의 심한 차별감 속에 더 이상의 진학을 포기하고 영국 식민지였던 버마의 경찰이 되었다. 그는 식민지의 말단 관리로 근무하며 서구 제국주의의 현실에 대해 새롭게 눈뜬다. 오웰은 식민지 경찰로 근무하며 느꼈던 여러 생각과 경험들을 『제국은 없다(서지원, 2002)』와 『코끼리를 쏘다(실천문학, 2003)』에 담아내고 있다. 이후 1927년 유럽으로 돌아와 새로운 세계대전의 조짐이 농익어가던 불황의 파리와 런던의 빈민가에서 부랑자로 살아가며 하층민의 삶을 실제로 체험했다. 이때의 기록이 그의 처녀작이기도 한 르포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삼우반, 2003)』이었다.

사회주의자가 된 오웰은 1937년 말 스페인시민전쟁에 무정부주의(POUM)의 시민의용군으로 참전한다. 켄 로치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이 잘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스탈린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세력과 무정부주의 세력 간의 심각한 정치 투쟁을 통해 오웰은 이후 스탈린과 스탈린주의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 바르셀로나에서 부상을 당한 오웰은 이후 박해를 피해 귀국하여 스페인시민전쟁 참전기라 할 수 있는 『카탈로니아 찬가(민음사, 2001)』를 썼다.

오웰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 『동물농장』을 처음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 스페인시민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막상 그가 집필한 것은 1943년 말경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웰이 소설을 탈고했을 무렵에는 영국의 어느 출판사도 선뜻 이 책을 출간하려 하지 않았다. 이유는 당시 영국과 소련이 나치를 상대로 전시동맹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스탈린의 비위를 거스를 것이 명백한 이 책의 출판을 꺼렸다. (1943년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아직까지 서구(영국)의 지식인들 - 자유주의적이었건, 좌파적이었건 간에 - 이 소련의 스탈린과 소비에트 정부에 대해, 심지어는 스탈린주의에 대해서까지 우호적인 감정을 느끼던 시대 분위기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오웰은 당시 영국의 BBC방송이 적군(赤軍) 25주년을 축하하면서도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에 대해 개탄했다. 그는 이미 내재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기준(혹은 정치적 이해관계)을 통해 현실로 드러나고 있는 현실을 왜곡하는 상황에 분노했다.

이와 같은 분노를 담고 있는 작품이 바로 『동물농장』이었다. 잘 알려진 바대로 『동물농장』은 1917년 2월 혁명으로부터 1943년의 테헤란회담에 이르는 소련의 역사를 우화적으로 재현하면서 스탈린의 전체주의 독재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다. 농장주 존스의 농장에서 빈곤한 처지에 놓인 가축들은 수퇘지 메이저(마르크스) 영감에게 감화되어 반란을 일으킨다. 가축들은 비교적 영리한 돼지인 스노볼(트로츠키), 나폴레옹(스탈린), 스퀼러(스탈린의 추종자)의 지도 아래 모든 동물이 평등한 공화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들은 열심히 일하고, 문맹퇴치를 위한 학습을 거치며 말과 오리에 이르는 모든 동물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농장의 운영에 참여한다.

그러나 풍차건설을 계기로 벌어지기 시작한 권력투쟁 속에서 이상주의자였던 스노볼은 나폴레옹에 의해 숙청당한다. 이후 나폴레옹은 전 농장주인 존스가 쳐들어온다는 위협과 풍요를 약속하며 동물들의 자유를 빼앗는다. 반항하는 동물들은 개와 돼지들을 내세워 공격하고, 반동으로 몰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과거의 농장주보다 더한 사치와 타락 속에 마침내 과거의 “두 다리는 나쁘고 네 다리는 좋다”던 구호마저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욱 좋다”는 구호로 탈바꿈시킨다.

앞서 말한 것처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스탈린과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대한 알레고리와 풍자를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이 부분만 주목하는 것은 오웰의 본래 의도는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의 진정한 실현을 믿었고, 마침내는 그 실현을 위해 헌신했으나 결국 푸줏간으로 팔려가야 했던 복서를 비롯한 다양한 인물들은 다소 전형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중요한 교훈들을 준다. 또 나폴레옹이 필킹턴(히틀러)과 손잡는 모습은 역사적으로는 1939년 8월, 독일 외무장관 폰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직접 서명하면서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자본주의화 과정)를 통해 타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오웰이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역사적으로 보자면 진정한 사회주의를 추구하고자 했던 러시아 2월 혁명이 또 다른 전체주의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스페인시민전쟁을 통해 경험한 좌파 내부의 본질적인 문제, 관료화된 국가자본주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던 속류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참한 예감을 담아 이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는 것에 더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오웰은 사회주의자 혹은 무정부주의자로서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사상, 혁명 그 자체의 허망함을 비판하는 회의주의자 당나귀 벤자민 보다 혁명에 헌신하고자 했으나 비판적이지 못했던 복서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미국에서 이 책 『동물농장(Animal Farm)』이 '문제적 서적'으로 낙인찍혔던 진정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