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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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5일, 천안 '가문비나무아래' 책방에서 오랜만의 신작인 <이중 하나는 거짓말>(장편소설)로 독자들에게 다가온 김애란 작가를 만났다. 나는 그녀를 코로나 이전인 2019년에 출간된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 북토크에 세 번을 참석해서 만났다. 오랜만에 조우한 그녀는 그때와 비교해 한결 여유가 넘치고 밝고 가벼운 모습이어서 반가웠다. (그에 비해 이번 작품은 예전보다 훨씬 웅숭깊은 울림이 느껴졌지만 말이다. ㅎㅎ)

북토크 내내 그녀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온통 신경을 집중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녀는 내 마음속 '문장의 멘토이자 문학의 로망'이기 때문이었다. 중간중간에 인사이트가 넘치는 멘트를 메모하였는데 잊지 않기 위해 여기에 남겨 본다.

1. "성장이란 작아지는 것, 내가 작아지는 만큼 세상이 커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청소년들의 성장 이야기이다. 어른들에게 성장은 회사의 매출 상승, 아파트 평수의 넓어짐, SNS에서의 인기도 증가 같은 것이다. '1인칭 중심시대'(이것도 그녀가 진단한 용어이다)를 지나며 점점 부풀어 오르는 과잉 인정욕구를 과시하는 대중들로 넘치며 피곤하고 공허한 세태에 던지는 작가의 예리한 통찰이었다.

2. "진정한 자립이란 복수(複數)의 의존처를 갖는 것이 아닐까 해요."

이번 작품에 나오는 세 명의 주인공은 10대 후반의 고등학생들이다. 미래는 뿌옇게 불투명하지만, 현재는 막막한 잔인함으로 인해 서슬이 퍼렇게 선명하다. 청소년기에는 진흙탕 같은 현실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나는 꿈을 깨어있는 동안에도 꾼다. 더 강해져야 한다고, 누군가에게 기대어 탈출하겠다는 기대 따위는 꿈도 꾸지 말라고 스스로 되뇐다. 여기서 '누군가'에는 피를 나눈 가족들까지 포함된 말이다.

'이제 누구의 자식도 되지 마, 채운아. 그게 설사 너와 같은 지옥에 있던 상태라 해도, 가족과 꼭 잘 지내지 않아도 돼.' (p.182)

작가는 어쩌면 자기가 청소년기를 지나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다짐했을지도 모르겠다. 피를 나눈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하고, 사랑하는 엄마가 죽어서 이별을 하고, 생면부지 타인이 어느 날 가족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불편한 동거를 해야 하는 일도 허다하다. 친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깊고 아파서 작품 속 주인공들은 반려동물에게 애정을 쏟아붓고, 그림을 그리며 아픔을 극복하려고 애를 쓴다.

나는 여기서 문득 '오뚝이'를 떠올렸다. 자꾸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야 하는 운명의 장난감은, 어느 날 보란 듯이 홀로 서 있는 모습을 열망하다가 자기 밑동을 평평하게 깎아내 '自立'에 성공하지만, 그 댓가로 깎여 나간 자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려 선혈이 낭자한 장면을 말이다. 혈육의 정을 끊어낸 자리에 이제 자신의 피와 골수로 마련한 紫立의 강이 흐른다.

오똑이가 쓰러지지 않는 다른 방법은, 다른 오똑이와 손을 잡거나 어깨를 걸어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하는 것도 실은 용기에 해당되는 일이다.

3. "이제는 저 자신과 사람들이 '점'이 아니라 '선'으로 이해돼요."

김애란은 아프지만 거기에 함몰하는 작가는 아니다. 그녀의 전작(前作, 全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며 그 가운데에서 작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긍정을 담아놓는다. 막연하고 설핏한 낙관이 아니라 치열한 고민과 사유를 통해 독자들에게 실날같은 빛을 비춘다. 사방이 막힌 어두운 방에 난 작은 틈으로 미세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과도 같은 희망과도 같은.

'지우가 이해하기로는 지우개는 뭔가를 없앨 뿐 아니라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대상에 빛을 드리우고 그림자를 입힐 때 꼭 필요했다. 그 대상이 사물이거나 인물, 심지어 신일 때조차 그랬다. 누구든 신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서는 신의 얼굴을 조금 지워야 했다. '광원', 즉 빛이 출발한 곳을 먼저 파악해 빛이 닿는 곳은 어둡게, 그렇지 않은 데는 밝게 표현하는 게 기본이었다.' (p.200)

김애란은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 희망의 얼굴을 조금 지워서 없앤다. 희망이 시작하는 곳에서 절망을 풀어놓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거짓말과 그에 따른 비밀'이 놓여있다. 능숙한 화가의 손길처럼 그녀는 독자들을 홀리며 특유의 서늘하고 섬칫하고 정교한 문장을 풀어낸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인공들의 '성장 이야기'에 관한 결말을 다음처럼 고백한다.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p.233)

북토크에서 작가는 점과 선에 관한 이야기로 첫 멘트를 끊었다. 책을 구매하면 제공되는 엽서의 손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그 심정을 서술했다.

"나이 들어 더 느끼는 바지만 시간은 가차 없고 시간은 무자비하지요. 하지만 가끔 출발점과 도착점 사이에 어떤 선이 생겨, 이런 이야기를 선물해 주는 게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작가로서의 그녀가 세월이 흐르면서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다.

#홀리는_김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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