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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시대
장윈 지음, 허유영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2월
평점 :
중국에서 존경받는 작가, '장윈'의 소설이다.
그의 소설은 시대의 현상이나 사건을 다루기보다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숭고한 내면을 드러내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인다는 평이 많다.
글쎄..줄거리가 답답하긴 했지만,
내게 생각할 꺼리를 안겨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개중에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분명 있었다.
인생이.. 뭐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이긴 해도..
자 이제 시작해볼까.
이 책은
시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망허'라는 남자와
그와 슬픈 운명으로 얽힌 두 여인의 이야기다.
'천샹'은 '망허'의 완벽한 시적 감성에 반하여 하룻밤 정을 나누게 된다.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하고, 학교를 그만두고서라도 아이를 키울 결심을 한다.
시인의 고귀한 자질과 내면을 물려받을 아이가 마치 선물인 듯 기뻐하는 것이다.
천샹을 남몰래 좋아하던 같은 과의 '라오저우'는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청혼하고, 마침내 결혼하여 평범하고도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
라오저우는 아이를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아끼지만...
천샹은 여전히 망허와의 순수하고 짧았던 사랑을
보물처럼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녀가 난 영~맘에 들지 않는다.
천샹의 독한 기운도 싫고
순수한 시적 영혼(?)따위 하나 믿고
아이 생부에 대한 사랑을 오랫동안 홀로 지키는고리타분함도 싫다.
게다가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이기적이다.
한편 망허는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지만
곧 답답함을 느끼곤 행장을 꾸려 훌쩍 길을 떠난다.
정처없는 여행길 도중 '예러우'를 만나고
그녀와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어간다.
망허는 예러우의 논문에 필요한 조사를 도우며 함께 걸어서 여행을 하기로 한다.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며 망허와 예러우의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망허는 청혼하기에 이른다.
예러우는 망허의 시인스러움이 두려웠다.
그의 영혼은 현실의 껍데기를 거부하고 언젠가 또 다른 초월을 찾아 떠날 것이다.
자신은 그런 망허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상처받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그 둘은 본래 한 몸이었던 듯 깊이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 둘을 잔인하리만큼 가혹하게 갈라놓는다.
자궁외임신을 한 예러우는 그 사실도 모른 채 유산하게 되고,
과다출혈로 변변히 치료 한번 없이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녀의 죽음앞에 망허는 실성한 듯 미쳐 날뛴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다.
그들의 사랑은 내게도 절절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천샹을 까마득히 잊은 채 다른 여인을 사랑한다는 사실이 못내 마뜩찮았지만
그래서 시인의 영혼이 정말 순수하다면서 여러 여인을 저리 쉽게 농락해도 되는건가...
라고..저렴하고도 일차원적 불만을 홀로 토로하기도 했지만....ㅡㅡ;
망허와 예러우의 사랑과 가혹한 결별은
그런 불만을 일시에 잠재울만큼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죽음이야 누구나 맞이해야겠지만,
왜 그게 하필 미칠 듯이 사랑하는 지금이어야 하냔 말이다.
그리고 천샹..
그녀는 한 서점에서 망허의 신작시집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이 시집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친다는 문구와 함께
망허의 사진은 그녀를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천샹이 알던 망허가 아니다. 그의 약력은 분명 망허가 맞는데
사진은 그가 사랑하던 망허와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즉.. 천샹과 짧은 사랑을 나눴던 그는 시인 망허를 사칭하였던 사기꾼이었던 것!
그 이후 천샹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지옥불에 내던진다.
천샹의 삶의 근간을 이루던 망허가 사실은 허상이었음을 알고 난
그녀의 행동은 너무 잔인한 것이었다.
아이를 혐오하고,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형제나 다름없는 친구를 떠난다.
결국 아이는 친정에 맡기지만 얼마 안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고 만다.
도대체.. 천샹을 이해할 수 있나?
정말 다들 그녀의 영혼이 고결함을 추구하다 병든 것 뿐이라 생각하나?
나는 미친 것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저건 죄악이다.
시를 사랑하는 마음? 고매하고 형이상학적인 영혼?
그딴 걸 저렇게 많은 사람을 희생시켜서 얻나?
자기가 사랑한 이가 시인이 아니었다는
겨우 그 사실 하나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짐승보듯 하는 어미가
미친 게 아니고 뭔가..
고매한 영혼 오히려 그런 건 낮은 자리에서 찾아야 한다.
초라할 것 같은 영혼에게서 보석같은 내면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 많다.
예를 들면, 천샹의 남편 라오저우는 묵묵히 그녀와 아이를 위해 희생한다.
이게 고매한 영혼이 아니면 뭐지?
뭐~어째됐든 망허와 천샹은 완전한 남이면서도
완전히 남이라고 할 수 없는 오묘한 관계인 채로 십수년이 흘렀다.
천샹의 친구 밍추이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망허는 이후 천샹을 만나게 된다.
외진 시골마을에서 작은 학교 하나를 후원해주게 된 망허와
그 곳에 교장을 맡고 있는 천샹은
서로 오랜 우여곡절을 가슴에 담은 채
해후 아닌 해후를 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참~인생 알 수 없다.
인생이 얼마나 오묘한지 깨닫고
처연히 대응할 날이 되면
이미 내 머리는 하얗게 눈이 앉았겠지.
망허와 천샹 그들 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