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재장전 -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알랭 바디우 외 지음, 이현우 외 옮김 / 마티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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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값과 읽기... 알라딘 반값 행사에 레닌 재장전이 떳다 [프레시안] 레닌 르네상스...그가 돌아왔다! '레닌 재장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레닌의 초상을 표지에 실은 책이 나왔다. 원제는 'Lenin Reloaded'. 아무래도 영화 <매트릭스>에서 따온 표현임이 분명하다. 할리우드 영화와 레닌의 이 만남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아니, 21세기도 새 10년을 맞이하는 지금, 레닌이 다시 서점가에 등장하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최근 베를린 시가 레닌 동상을 복구한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내 기억 속 마지막 레닌은 거의 스무 해 가까이 전 해체된 동상의 모습인 것 같다. 그리스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에 나왔던, 강에 떠내려가는 레닌 동상. 독일 영화 <굿바이 레닌>에 나온, 헬리콥터에 실려 공중에 떠 있는 그 동상. 1980년대 변혁 운동의 여진이 남아 있을 무렵 읽었던, <무엇을 할 것인가>니 <국가와 혁명>이니 하는 저작 속의 그 단호하고 신랄한 문구들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한 퇴장이었던가! 역사가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레닌 동상이 해체되던 그 무렵이 러시아 10월 혁명으로 시작된 '짧은 20세기'의 종지부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레닌의 저작에 흥분하기도 하고 주눅 들기도 하다가 그 처연한 퇴장을 목도한 우리는 '짧은 20세기'의 끝물에 휩쓸렸던 것이겠다. 지젝-레닌 커넥션 이 씁쓸한 기억이 채 다 가라앉기도 전에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휘저어 놓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레닌이 했던 그 일을, 물론 100년 전과는 분명 다른 방식들을 통해서이기는 하겠지만, '반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누구인가. 시대에 어긋난 몽상가, 선동가들인가. 아니면 <레닌 재장전>이라는 책의 부제('진리의 정치를 향하여')처럼,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리'의 고지자들인가. 레닌 컴백을 주도하는 사람은 스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다. 2004년에 영국의 좌파 출판사 버소(Verso)에서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한 라는 책이 나왔다. 번역하면, '문 앞의 혁명' 정도가 되겠는데, 레닌에 대한 지젝의 글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나머지 절반은 1917년 10월 혁명 직전에 쓰인 레닌의 글들이다. 국내에도 레닌에 대한 지젝의 저작이 두 권이나 나와 있다. 하나는 그의 독일어 논고들을 번역한 <혁명이 다가온다-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이서원 옮김, 길 펴냄)이고, 다른 하나는 위의 영어 저작을 번역한 <지젝이 만난 레닌-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정영목 옮김, 교양인 펴냄)다. 말하자면 '레닌 르네상스'는 어느 정도는 지젝의 노고의 결과다. 이번에 나온 <레닌 재장전>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편저자 중 한 명으로 지젝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그의 글도 한 편 수록되어 있다. 사실 이 책에 실린 글들의 집필 시점은 앞에 소개한 책들보다 앞서 있다. 비록 영어본이 나온 것은 2007년이지만, 2001년에 독일에서 열린 '진리의 정치를 향하여: 레닌의 복구'라는 국제 심포지엄의 발표문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지젝은 왜 이토록 레닌에 집착하는가. 대중 소설과 할리우드 영화를 소재로 삼아 헤겔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강의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이 21세기 철학자가 잊혀진 20세기의 혁명가를 자꾸 들먹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더구나 지젝은 고국인 슬로베니아(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독립한 나라)에서 공산당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벌였던 인물이다. 그는 '자유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을 통해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서기까지 했었다. 수많은 레닌들 중에서도 1917년의 레닌 여기에서 우리는 지젝이 주목하는 레닌이 그의 수많은 얼굴들 중에서도 특히 1917년의 레닌임을 주목해야 한다. 차르 정권에 맞서기 위해 지하 정당을 만들던 <무엇을 할 것인가>의 레닌도 아니고, 민주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해 불철주야하던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의 레닌도 아니다. 이미 민주주의 혁명이 승리한 상황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향해 곧장 나아가자고 주장하던, 1917년 2월부터 10월 사이의 레닌이다. 지젝이 여러 레닌들 중에서도 유독 이 시기의 레닌에 주목하는 것은 이 시기의 레닌이 펼친 그 '정치'가 지금 우리 시대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 시기의 레닌의 정치는 마치 무소불위인 것처럼만 보이던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에 결정적인 균열을 가하는 역사적이자 집단적인 행위였다. 우리 시대 지구화의 미래가 어쩔지 예감케 해주는 지난 100년 전 지구화(흔히 '제국주의'라 불리는)는 1914년 세계 전쟁을 통해 그 모순을 폭발시켰다. 그 동안 일국 단위에서 사회주의 개혁 혹은 민주 혁명을 추진하던 유럽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은 이 사태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지배 계급의 전쟁 수행에 공범이 되어주든가 시대에 절망하든가 둘 중 하나였다.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당시 좌파의 맹목(盲目)이 재앙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레닌은 절망하기보다는 시각을 전환했다. 자본주의의 전 지구적 연계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세계 전쟁이 불러일으킬 정치적 효과들에 대해 고민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제국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 즉 러시아에서부터 세계 혁명이 폭발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었다. 자본주의 지구화가 낳은 모순을 바탕으로, 그것을 극복할 또 다른 전 지구적인 연계(북반구의 노동자 혁명과 남반구의 민족 해방 혁명 사이의 연대)가 구축될 수 있으리라는 강력한 희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이 미친 듯한 유토피아적 열정으로 그는 1917년 2월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의 공간이 열린 조국 러시아에서 새로운 혁명의 시작을 재촉했다. 본래 러시아 민주주의 혁명의 이론가이자 지도자였던 그가 귀국하자마자 그 일성으로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을 외친 것이다('4월 테제'). 다들 그의 정신 건강을 의심했다. 처음에는 소속 정당인 볼셰비키당 간부들조차 그랬다. 하지만 실제로 10월에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세계는 '제국주의 대 반제국주의'의 거대한 균열선을 현실로서 마주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지구화의 시대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을 수 없게 되었다. 레닌이 마주한 순간들을 되새기려는 시도들 <레닌 재장전>도 이 시기의 레닌에 관심을 집중한다. 안 그런 글들도 있지만, 적어도 2장과 3장의 글들은 그렇다. 실제로 이 책에서 가장 읽을 만한 것이 이 2장(철학에서의 레닌)과 3장(전쟁과 제국주의)이다. 2장, 3장은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진 저자들의 글로 채워져 있다. 사실 가장 저명한 저자들의 글은 1장(레닌을 복구하기)에 모여 있다. 알랭 바디우, 알렉스 캘리니코스, 테리 이글턴, 프레드릭 제임슨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 우리 시대 좌파 저술가로서는 더 이상 호화로울 수 없는 캐스팅이다. 하지만 심포지엄 발표문들을 모은 책이라 그런지 글의 완성도는 천차만별이다. 특히 스타급 필자들 중에서 몇몇은 뜻밖의 실망을 안겨준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그렇다. 1935년에 트로츠키가 꾼, 레닌이 나오는 꿈 이야기에서 시작해 사뭇 비장하기는 한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는 글로 끝난다. 4장(정치와 그 주체)에 실린 안토니오 네그리의 글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네그리는 레닌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가 레닌에 대해 쓴 글이 더 흥미를 끌 수밖에 없는데, 막상 읽어보면 레닌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고 평소 자신의 주장을 반복할 뿐이다. 반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2장과 3장의 필자들이 제1차 세계 대전과 2월 혁명, 10월 혁명에 이르는 시기의 레닌의 사상적 고민과 발전을 흥미롭게 분석하고 있다. 가령 미국 사회과학자 케빈 앤더슨의 글은 레닌의 전망이 남반구 민족 해방 운동 및 유색 인종 해방 운동에 끼친 결정적인 영향을 잘 보여준다. 지젝과 함께 이 책의 공동 편집자인 스타티스 쿠벨라키스도 레닌의 헤겔 <논리학> 연구와 이 당시 정치 실천 사이의 연관을 분석하면서 레닌 이해에 커다란 도움을 준다. 다분히 철학적이라 읽기 좀 까다롭기는 하지만 말이다. 2장, 3장 필자들 중 국내에 어느 정도 알려진 이들인 다니엘 벤사이드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글도 많은 시사와 영감을 던져준다. 벤사이드는 레닌의 성취뿐만 아니라 그의 시대적 한계도 가감 없이 지적하고 있으며, 발리바르의 글도 마찬가지로 냉정한 접근을 보여준다. 특히 벤사이드(68세대로서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트로츠키주의 운동가였고 반자본주의신당의 산파 중 한 명이었다)는 지난 달 작고했기에 그의 글을 읽는 느낌이 남 다르다. 이들 필자의 글들에서 일관된 것은 레닌의 특정한 주장을 반복하거나 그의 권위를 강조하기보다는 그가 1910년대(그러고 보니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이다)의 시간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이와 대결했는지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그 순간들, 그 속에서 레닌이 취한 포즈를 되새기려 한다. 이것은 곧 지젝이 "레닌주의적 제스처"라고 말하는 바이기도 하다. 지젝은 다른 공동 편저자들과 함께 쓴 '서문'에서 이를 "상황에 개입하겠다는 결단"이라고 풀어 말한다. "필요한 타협을 하고 현실적인 요구에 이론을 맞추려는 실용주의적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모든 기회주의적 타협을 물리치고, 오직 일이관지하는 급진적 입장(이를 통해서만 우리의 개입이 상황의 배치를 바꿀 수 있는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다)을 채택한다는 의미에서" 개입한다는 결정. 신자유주의의 범위를 넘어서는 정치적 선택 자체가 금기시돼온 지난 30여 년간의 시대를 끝내려면, 바로 이러한 제스처를 통해 한 시대를 갈라야 한다는 것이다. 100년 전 그것이 1917년 10월 러시아 민중들을 통해 작렬했다면, 우리 시대에 그것은 어떠한 모습으로 출현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어떻게 분출시킬 수 있을 것인가? 다시금 '돌파'의 시대를 꿈꾸며 <레닌 재장전>에 실린 여러 글들에서 반복되는 한 단어가 있다. '돌파'라는 말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레닌 자신이 1917년의 뜨거운 논설들 중 하나에서 이 말을 인상 깊게 쓰고 있다. "1917년 2월에서 3월에 걸친 러시아 혁명은 제국주의 전쟁이 내전으로 전화된 시작이었다. 이 혁명은 전쟁을 끝장내는 최초의 일보를 내딛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2보, 즉 국가 권력의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이전 그리고 전쟁의 종결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전 세계적 규모에서의 '돌파(break-through)', 자본주의적 이해관계의 전선에서의 돌파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직 이 전선의 돌파에 의해서만 프롤레타리아트는 인류를 전쟁의 공포로부터 구해내고 인류에게 평화의 은총을 내릴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이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창조함으로써 이미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끈 것은 바로 자본주의 전선에서의 '돌파'로였다."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프롤레타리아 당의 강령 초안>) '돌파'는 교착 상태를 깨는 행위다. 기존의 전선에 머물고 적의 강점과 우리의 약점을 넘을 수 없는 한계로 치부하는 게 아니라, 전선을 이동시키고 적의 강점을 약점으로, 우리의 약점을 강점으로 탈바꿈시키는 행위다. 이것은 판박이를 벗어나기 위한 판갈이의 정치이고, 우선은 '판을 깨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지구화, 금융화된 자본주의 세계 체제가 흔들리고 있지만 정치적 선택지는 여전히 과거 그대로인 우리 시대, '반MB의 시간'이 '진보의 시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우리 시대 역시 하나의 교착 상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돌파'의 정치, '판을 깨는' 정치다. 다시 '레닌'을 꺼내는 게 느닷없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과거 레닌주의의 복고(復古)가 아니라 그가 상징하는 어떤 정치의 시의적절한 반복에 대한 대망이라면 말이다.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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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노동을 만났을 때 - 영화로 만나는 15개의 노동이야기
이성철.이치한 지음 / 호밀밭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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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노동 전제해보지 않았던 조합, 늘 영화노동속에서 살면서 ㅎㅎ 프래시안의 서평


한국 영화, '전태일'은 없고 '살인마'만 있다!


영화 <파업전야>의 비디오테이프 전면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전노협원년 세계노동절 101주년 기념영화". 어느 투쟁가요 노랫말처럼 "소나기 퍼붓는 옥포의 조선소에서 눈보라 휘날리는 서울 철로 위로"('해방을 향한 진군') 전국 방방곳곳 제조업 계열의 중소 단위 공장 노조들을 중심으로 20여만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역사의 출발점에 하나의 영화가 함께 서 있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한 영화학도로서 애써 감정 이입해 말한다면, 이런 노동자 운동의 인상 깊은 사건과 영화의 마주침은 어떤 '해묵은 꿈'을 떠올리게 만든다. 오늘날 영화가 감히 넘볼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어떤 상상의 풍경이 그려지면서 말이다.

<파업전야>에는 충무로로 떠난 어느 영화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졸업장을 팽개치고 공장으로 간 '학출' 노동자 주완익이 등장한다. 대중적으로 썩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충무로에서 몇 편의 영화를 찍은, 그러나 최근에는 장기화된 영화 시장의 불황으로 좀처럼 촬영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충무로의 한 영화감독은 매우 드라마틱한 계기로 '영화판'에 들어갔다.

젊은 시절 그는 <파업전야>의 '주완익'처럼, 그리고 당시 대다수 청년들이 그러했듯 열정적으로 학생 운동에 가담했었다. 그리고 졸업장보다는 대의의 길에 투신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지에 놓인 공장에 위장 취업을 했다. 당시 수도권에만 3000여 명에 이르는 '학출'이 있었다고 하니 그도 이런 물결과 함께한 강고한 의식의 청년이었으리라.

그러나 이런 그가 수년간 공장에 있으며 얻은 것은 좌절감과 지친 마음뿐이었다. 1991년 5월의 열사투쟁 정국의 급속한 냉각과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목도하면서 많은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게다가 공장에서의 거친 삶, 다리 하나가 송두리째 잘릴 뻔했던 아찔한 경험은 그곳에 버티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그처럼 떠난 이가 대다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후의 삶에 대한 아무 희망도 없던 그 시절, 공장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즈음, 그는 연세대학교에 가 '장산곶매'의 <파업전야>를 보았다. 공장에서 함께 노동조합 활동을 하던 몇몇 조합원들과 영화를 보러 간 그는 그곳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우리가 '인생의 영화'를 만났다고 느낄 때의 황홀한 감정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길로 그는 충무로로 향한다. 인생의 한 막이 내리고 드라마틱하게 영화의 시기가 열린 것이다.

일군의 문화- 뉴라이트주의자로부터 흘러나오는 듣기에도 민망한 '모함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과거 변혁적 사회 운동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386 세대'의 많은 청년들이 충무로로 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말 그대로 충무로 영화 시장의 거상이 되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한창 '대박'을 치며 잘 나가다가 외환 위기 국면을 지나며 '쪽박'을 차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그곳을 영영 떠나기도 했다. 이후 세대의 영화 노동자들, 혹은 독립 영화 운동을 하던 어떤 이들은 지금 충무로의 허름하고도 영예로운 저 '주역들'이 지난 날 영화 스태프들의 노동 조건과 삶의 악조건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의심스럽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 런데 이 영광과 오욕의 충무로 '386 세대'에 대한 이런저런 도덕적 판단은 차치하더라도 오늘날 충무로에서 20여 년 전 좌절과 슬픔, 혹은 벅찬 혁명적 열의와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던 열혈 청년들이 '영화'에 대해 품었던 꿈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조금 늦었지만 이 오래된 꿈이 다시 기억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다시금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른바 '예술의 종언'(아서 단토)과 함께 '영화의 종언'(장뤼크 고다르)이 선언되는 지금 그 오래된 꿈을 떠올리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혹은 그런 꿈을 꾸는 것이 '허용'될 수 있을까? 이 생뚱맞은 물음에 대한 응답을 잠시 보류하고 책을 펼쳐보자.

▲ <영화가 노동을 만났을 때 : 영화로 만나는 15개의 노동 이야기>(이성철·이치한 지음, 호밀밭 펴냄). ⓒ호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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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노동을 만났을 때 : 영화로 만나는 15개의 노동 이야기>(이성철·이치한 지음, 호밀밭 펴냄)는 영화를 만들거나 전문적인 비평을 하는 것과는 연관성을 찾기 어려운 인문학 연구자들이 '영화'를 매개로 노동 운동의 역사와 쟁점들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따라서 전문적인 영화 비평에서 보이는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비평 담론과는 다른, 노동 운동과 15편의 영화들이 지닌 이야기들 사이의 역사적 맥락과 서브 정보들 을 살피고 분석하는 데 열중하는 하나의 '노동 운동사(史)'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영화의 역사에 복수 '들'(s)이 붙을 수 있다면 이것은 저 많은 '역사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집필한 의미를 설명하며 이것이 노동 운동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하나의 매개로 활용되길 바라는 기대를 겸연하게 밝히지만, 어찌 보면 영화와 노동의 마주침은 모종의 필연성을 갖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우선 '영화'와 '노동' 두 가지 모두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다. 노동(력)이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생산 관계의 모순 속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자 "잃을 것이라고는 몸뚱어리와 두 주먹뿐인" 프롤레타리아에게 주어진 유일한 '힘'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 내의 특수한 조건이라면, 영화 역시 19세기 말 자본주의 체제의 가치 생산의 잉여들이 빚어낸 욕망의 분출들 속에서 생겨난(발명된) 기술 발전 시대의 산물이자 새로운 표현의 언어였다. 그것은 새로운 '예술'로서 자리매김했다. 만약 "영화는 곧 삶이다."라고 말한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말이 옳다면, 영화는 노동의 문제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인간의 삶을 응시할 수 있는 거대한 창문이다. 저자가 노동 운동의 역사를 영화로서 응시하고자 시도한 것이 모종의 취향에서 비롯된 우연적인 일만은 아닌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문화적 실천과 노동 운동의 현재적 조건과 쟁점에 대해 연구해온 저자 이성철은 지난 100여 년 전 세계적으로 있었던 노동자 운동의 인상적 사건을 다룬 영화들을 소개하며 노동자 운동의 지난 궤적을 살피며 영화와 노동의 만남을 시도한다. 대공황 시기 미국 주변부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윌리엄 웰먼의 <베가스 오브 라이프>는 1928년에 제작된 흑백 무성 영화이지만 당시 경제 공황으로 치달아가던 미국 노동자 계급 가장 밑바닥 계층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인상적인 작품이다. 저자는 당시 미국의 시대적, 공간적 상황을 개괄한 후 영화의 서사에 대해 조목조목 꼼꼼하게 스포일러를 공개하고, 이어서 노동 운동사적 의미에서의 영화의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며 영화에 대한 소개를 마무리 짓는다.

다른 영화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스티 코넹의 <단스>(1992년)를 통해 20세기 초 유럽 노동자 계급의 상황과 저항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데, 이 영화는 자본주의 초기 영국과 유럽 대륙 곳곳에서 벌어진 자본의 원시적 축적 과정이 어떻게 해서 작동되고 아동과 여성 등을 향해 얼마나 극심한 착취가 벌어졌는지 상세하게 묘사한다. 이어서 미국으로 옮겨가 마틴 리트의 <몰리 맥과이어스>(1970년)를 보면 19세기 중후반 아일랜드에서 이주해 미국의 탄광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얼마나 극심한 노동자 운동 탄압과 테러들에 직면했었는지 이야기하고, <호파>(1992년)와 <투쟁의 날들 F.I.S.T>(1978년)를 통해 1930~40년대 미국 노동조합 운동이 겪은 사건들을 드라마틱한 영화의 소개와 함께 설명한다. 이 당시 급성장하고 이후 매카시 광풍을 경과하며 무너져간 미국 노동 운동은 마이크 니콜스의 <실크우드>(1983년)나 마틴 리트의 <노마 레이>(1979년)가 보여주는 것처럼 미국에서 알려진 여성 노동자의 영웅적 투쟁에 의해 자극받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들을 통해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를 훑어 올라오다보면 절로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의 구조에서 왜 투쟁에 나서고 노동조합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동시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 노동자 운동이 왜 위기에 빠졌는지 알게 된다. 요컨대 독자들은 마치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을 읽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영화에 대한 설명마다 무수한 곁가지 담화들이 쏟아지고, 역사적 사건이나 명칭, 의미에 대해 곳곳에 주석이 달려 이해를 돕는다. 그리고 중간 중간 불쑥 튀어나오는 저자의 개탄과 격정적 어조, 전문적인 식견을 보탠 친절한 설명들은 영화 내러티브 중심으로 서술된 이 책 속의 영화들에 대해 색다른 흥미를 부추기는데 모자라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도래한 이후를 묘사한 인상 깊은 영화는 단연 켄 로치의 <빵과 장미>(2000년)와 <네비게이터>(2001년)이다. <빵과 장미>는 미국 서부의 멕시코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로서 어떤 처지에 놓여있고 또 어떻게 조직되어 어떻게 싸웠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보이는 청소노동자들의 상황은 한국과 너무나도 닮아있어 신자유주의 체제가 얼마나 전 세계적인 공통성을 갖고 노동자들을 착취하는지 보여준다. 대처리즘(Thatcherism) 개혁으로 민영화된 철도에서 일하는 철도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네비게이터>를 통해서도 우리는 2003년과 이듬해, 그리고 2009년에 걸쳐 전개된 한국의 철도 노동자 투쟁을 떠올릴 수 있다. 한국에서도 영국처럼 정리 해고로 대폭 인력이 축소되었고, 노동량의 증대로 사고가 늘어나고, 죽거나 다친 노동자들이 많아졌다.

한국 영화로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년)과 <파업전야>(1990년)를 소개하고 있다. 두 편 모두 한국에서는 영화사적으로나 노동 운동사에서나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 작품들이다. 전자는 7만 여명의 자발적 제작비 모금 운동으로 만들어진 운동사적 의미를 지닌 데다 '청년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사회적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파업전야>는 만들어진 과정이나 배급 경로나 모두 비시장의 범주에서 이루어졌지만 압도적인 관심과 지지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파급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한국 독립 영화사의 어떤 효시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 책의 첫 장을 펼치기 전에 나는 '영화'와 '노동'이라는 두 개의 기표 사이에 쌓인 몇 개의 겹들에 대해 생각했다. '적어도' 20년 전에는 열혈 청년이었던 저 영화쟁이들 의 영화를 향한 오래된 꿈, 그리고 오늘날 충무로에 만연한 '스태프'(영화 노동자)들을 겨누는 착취의 구조, 마지막으로 '영화'를 볼 여유조차 찾기 어려운 하청 노동자들의 삶. 오늘날 동시대적인 의미에서 정녕 영화가 노동과 만나려면 이 세 가지 쟁점을 우회할 순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우회하지도 적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마주침을 위한 어떤 궤적을 보여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역사에서 이토록 다양하게 국적과 형식을 막론하고 '노동 운동사'를 다룬 작품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노동 운동 연구자인 저자 이성철이 '노동'의 문제를 다룬 영화의 리스트를 백과사전식으로 풀어 유연하고도 편안하게 설명한 텍스트라는 점에서 이 책은 '노동'의 '영화'에 대한 구애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영화가 다시 영화 자신의 현재적 조건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은 '노동'의 문제와 '만나는 것'은 가능할까? 이 질문은 앞서 던진 질문과 맞닿아 있다. 왜 영화 잡지 <씨네21>에 대해서 우리는 "예전처럼 읽을 만한 글이 없다"고 말하는가? 왜 어떤 영화들은 충무로에서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가?

이런 의문들로 인해 나는 종종 오늘날의 영화가 완전히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선언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건 망상으로 취급 받을게 뻔하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사람의 삶이 '불안정 노동'의 문제의 모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래서 현실이 여전히 영화가 다시 '노동'을 만나야하는 사소한 이유라도 있다면, 그것은 '노동'의 문제와는 전혀 만나지 못하고 있는 충무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을 그 새로운 땅을 향해 세워놓고 싶다.
 

/홍명교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 저자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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