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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노동을 만났을 때 - 영화로 만나는 15개의 노동이야기
이성철.이치한 지음 / 호밀밭 / 2011년 8월
평점 :
영화와 노동 전제해보지 않았던 조합, 늘 영화노동속에서 살면서 ㅎㅎ 프래시안의 서평
한국 영화, '전태일'은 없고 '살인마'만 있다!
영화 <파업전야>의 비디오
테이프 전면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전노협원년 세계노동절 101주년
기념영화". 어느 투쟁가요 노랫말처럼 "소나기 퍼붓는 옥포의
조선소에서 눈보라 휘날리는 서울 철로 위로"('해방을 향한 진군') 전국
방방곳곳
제조업 계열의 중소 단위
공장 노조들을 중심으로 20여만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만든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의 역사의 출발점에 하나의 영화가 함께 서 있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한 영화학도로서 애써 감정 이입해 말한다면, 이런 노동자 운동의 인상 깊은 사건과 영화의 마주침은 어떤 '해묵은 꿈'을 떠올리게 만든다. 오늘날 영화가 감히 넘볼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어떤 상상의
풍경이 그려지면서 말이다.
<파업전야>에는 충무로로 떠난 어느 영화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졸업장을 팽개치고 공장으로 간 '학출' 노동자 주완익이 등장한다. 대중적으로 썩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충무로에서 몇 편의 영화를 찍은, 그러나 최근에는 장기화된 영화 시장의 불황으로 좀처럼
촬영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충무로의 한 영화감독은 매우 드라마틱한 계기로 '영화판'에 들어갔다.
젊은 시절 그는 <파업전야>의 '주완익'처럼, 그리고 당시 대다수 청년들이 그러했듯 열정적으로 학생 운동에 가담했었다. 그리고 졸업장보다는 대의의 길에 투신하기 위해 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지에 놓인 공장에
위장 취업을 했다. 당시 수도권에만 3000여 명에 이르는 '학출'이 있었다고 하니 그도 이런 물결과 함께한 강고한 의식의 청년이었으리라.
그러나 이런 그가 수년간 공장에 있으며 얻은 것은 좌절감과 지친 마음뿐이었다. 1991년 5월의 열사투쟁 정국의 급속한
냉각과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를
목도하면서 많은 청년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게다가 공장에서의 거친 삶,
다리 하나가 송두리째 잘릴 뻔했던 아찔한
경험은 그곳에 버티는 것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그처럼 떠난 이가 대다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후의 삶에 대한 아무 희망도 없던 그 시절, 공장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즈음, 그는 연세
대학교에 가 '장산곶매'의 <파업전야>를 보았다. 공장에서 함께 노동조합 활동을 하던 몇몇 조합원들과 영화를 보러 간 그는 그곳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우리가 '인생의 영화'를 만났다고 느낄 때의 황홀한 감정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길로 그는 충무로로 향한다. 인생의 한 막이 내리고 드라마틱하게 영화의 시기가 열린 것이다.
일군의
문화- 뉴라이트주의자로부터 흘러나오는 듣기에도 민망한 '모함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과거 변혁적 사회 운동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386 세대'의 많은 청년들이 충무로로 온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말 그대로 충무로 영화 시장의 거상이 되기도 하였고, 어떤 이들은
한창 '대박'을 치며 잘 나가다가
외환 위기 국면을 지나며 '쪽박'을 차기도 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그곳을 영영 떠나기도 했다. 이후 세대의 영화 노동자들, 혹은 독립 영화 운동을 하던 어떤 이들은
지금 충무로의 허름하고도 영예로운 저 '주역들'이 지난 날 영화 스태프들의 노동 조건과 삶의 악조건을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의심스럽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 런데 이 영광과 오욕의 충무로 '386 세대'에 대한 이런저런 도덕적 판단은 차치하더라도 오늘날 충무로에서 20여 년 전 좌절과 슬픔, 혹은 벅찬 혁명적 열의와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던 열혈 청년들이 '영화'에 대해 품었던 꿈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조금 늦었지만 이 오래된 꿈이 다시 기억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다시금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른바 '예술의 종언'(아서 단토)과 함께 '영화의 종언'(장뤼크 고다르)이 선언되는 지금 그 오래된 꿈을 떠올리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혹은 그런 꿈을 꾸는 것이 '허용'될 수 있을까? 이 생뚱맞은 물음에 대한 응답을 잠시 보류하고 책을 펼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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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가 노동을 만났을 때 : 영화로 만나는 15개의 노동 이야기>(이성철·이치한 지음, 호밀밭 펴냄). ⓒ호밀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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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노동을 만났을 때 : 영화로 만나는 15개의 노동 이야기>(이성철·이치한 지음, 호밀밭 펴냄)는 영화를 만들거나
전문적인 비평을 하는 것과는 연관성을
찾기 어려운 인문학 연구자들이 '영화'를 매개로 노동 운동의 역사와 쟁점들에 대해 서술한 책이다. 따라서 전문적인 영화 비평에서 보이는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비평 담론과는 다른, 노동 운동과 15편의 영화들이 지닌 이야기들
사이의 역사적 맥락과 서브
정보들 을 살피고 분석하는 데 열중하는 하나의 '노동 운동사(史)'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영화의 역사에 복수 '들'(s)이 붙을 수 있다면 이것은 저 많은 '역사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을 집필한 의미를 설명하며 이것이 노동 운동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하나의 매개로 활용되길 바라는 기대를 겸연하게 밝히지만, 어찌 보면 영화와 노동의 마주침은
모종의 필연성을 갖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우선 '영화'와 '노동' 두 가지
모두 자본주의 체제의 산물이다. 노동(력)이 자본주의 체제가 지닌 생산 관계의 모순 속에서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이자 "잃을 것이라고는 몸뚱어리와 두 주먹뿐인" 프롤레타리아에게 주어진 유일한 '힘'이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 내의 특수한 조건이라면, 영화 역시 19세기 말 자본주의 체제의 가치 생산의 잉여들이 빚어낸 욕망의 분출들 속에서 생겨난(발명된)
기술 발전 시대의 산물이자 새로운 표현의 언어였다. 그것은 새로운 '예술'로서 자리매김했다. 만약 "영화는 곧 삶이다."라고 말한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말이 옳다면, 영화는 노동의
문제로 끊임없이 (재)
구성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인간의 삶을 응시할 수 있는 거대한
창문이다. 저자가 노동 운동의 역사를 영화로서 응시하고자 시도한 것이 모종의 취향에서 비롯된 우연적인 일만은 아닌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문화적 실천과 노동 운동의 현재적 조건과 쟁점에 대해 연구해온 저자 이성철은 지난 100여 년 전 세계적으로 있었던 노동자 운동의 인상적 사건을 다룬 영화들을
소개하며 노동자 운동의 지난 궤적을 살피며 영화와 노동의
만남을 시도한다. 대공황 시기
미국 주변부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윌리엄 웰먼의 <
베가스 오브
라이프>는 1928년에 제작된 흑백 무성 영화이지만 당시
경제 공황으로 치달아가던 미국 노동자 계급 가장 밑바닥 계층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인상적인
작품이다. 저자는 당시 미국의 시대적, 공간적 상황을 개괄한 후 영화의 서사에 대해 조목조목 꼼꼼하게
스포일러를 공개하고, 이어서 노동 운동사적 의미에서의 영화의 위치에 대해 이야기하며 영화에 대한 소개를 마무리 짓는다.
다른 영화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스티 코넹의 <단스>(1992년)를 통해 20세기 초 유럽 노동자 계급의 상황과 저항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데, 이 영화는 자본주의 초기
영국과 유럽 대륙 곳곳에서 벌어진 자본의
원시적 축적 과정이 어떻게 해서 작동되고
아동과 여성 등을 향해 얼마나 극심한 착취가 벌어졌는지 상세하게
묘사한다. 이어서 미국으로 옮겨가 마틴 리트의 <몰리
맥과이어스>(1970년)를 보면 19세기 중후반
아일랜드에서
이주해 미국의 탄광에서 일한 노동자들이 얼마나 극심한 노동자 운동 탄압과 테러들에 직면했었는지 이야기하고, <호파>(1992년)와 <투쟁의 날들 F.I.S.T>(1978년)를 통해 1930~40년대 미국 노동조합 운동이 겪은 사건들을 드라마틱한 영화의 소개와 함께 설명한다. 이 당시 급성장하고 이후 매카시 광풍을 경과하며 무너져간 미국 노동 운동은
마이크 니콜스의 <실크우드>(1983년)나 마틴 리트의 <노마 레이>(1979년)가 보여주는 것처럼 미국에서 알려진 여성 노동자의
영웅적 투쟁에 의해 자극받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들을 통해 노동자들의 투쟁의 역사를 훑어 올라오다보면 절로 노동자 계급이 자본주의의 구조에서 왜 투쟁에 나서고 노동조합을 만들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동시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 노동자 운동이 왜 위기에 빠졌는지 알게 된다. 요컨대 독자들은 마치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을 읽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영화에 대한 설명마다 무수한 곁가지 담화들이 쏟아지고, 역사적 사건이나 명칭, 의미에 대해 곳곳에
주석이 달려 이해를 돕는다. 그리고
중간 중간 불쑥 튀어나오는 저자의 개탄과 격정적 어조, 전문적인 식견을 보탠 친절한 설명들은 영화 내러티브 중심으로 서술된 이 책 속의 영화들에 대해 색다른 흥미를 부추기는데 모자라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도래한 이후를 묘사한 인상 깊은 영화는 단연 켄 로치의 <빵과
장미>(2000년)와 <네비게이터>(2001년)이다. <빵과 장미>는 미국 서부의 멕시코 출신 이주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청소 노동자로서 어떤 처지에 놓여있고 또 어떻게 조직되어 어떻게 싸웠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서 보이는 청소노동자들의 상황은
한국과 너무나도 닮아있어 신자유주의 체제가 얼마나 전 세계적인 공통성을 갖고 노동자들을 착취하는지 보여준다. 대처리즘(Thatcherism) 개혁으로 민영화된 철도에서 일하는 철도 노동자들의 문제를 다룬 <네비게이터>를 통해서도 우리는 2003년과 이듬해, 그리고 2009년에 걸쳐 전개된 한국의 철도 노동자 투쟁을 떠올릴 수 있다. 한국에서도 영국처럼
정리 해고로 대폭 인력이 축소되었고, 노동량의 증대로 사고가 늘어나고, 죽거나 다친 노동자들이 많아졌다.
한국 영화로는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년)과 <파업전야>(1990년)를 소개하고 있다. 두 편 모두 한국에서는 영화사적으로나 노동 운동사에서나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 작품들이다.
전자는 7만 여명의 자발적
제작비 모금 운동으로 만들어진 운동사적 의미를 지닌 데다 '청년 전태일'이라는
인물을 사회적 리얼리즘의 시선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파업전야>는 만들어진 과정이나 배급 경로나 모두 비시장의 범주에서 이루어졌지만 압도적인 관심과 지지로 인해 엄청난 사회적 파급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한국 독립 영화사의 어떤 효시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 책의 첫 장을 펼치기 전에 나는 '영화'와 '노동'이라는 두 개의 기표 사이에 쌓인 몇 개의 겹들에 대해 생각했다. '적어도' 20년 전에는 열혈 청년이었던 저 영화
쟁이들 의 영화를 향한 오래된 꿈, 그리고 오늘날 충무로에 만연한 '스태프'(영화 노동자)들을 겨누는 착취의 구조, 마지막으로 '영화'를 볼 여유조차 찾기 어려운 하청 노동자들의 삶. 오늘날 동시대적인 의미에서 정녕 영화가 노동과 만나려면 이 세 가지 쟁점을 우회할 순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을 우회하지도 적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 마주침을 위한 어떤 궤적을 보여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역사에서 이토록 다양하게
국적과 형식을 막론하고 '노동 운동사'를 다룬 작품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노동 운동 연구자인 저자 이성철이 '노동'의 문제를 다룬 영화의
리스트를 백과사전식으로 풀어 유연하고도 편안하게 설명한 텍스트라는 점에서 이 책은 '노동'의 '영화'에 대한 구애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영화가 다시 영화 자신의 현재적 조건과 결코 동떨어져 있지 않은 '노동'의 문제와 '만나는 것'은 가능할까? 이 질문은 앞서 던진 질문과 맞닿아 있다. 왜 영화 잡지 <씨네21>에 대해서 우리는 "예전처럼 읽을 만한 글이 없다"고 말하는가? 왜 어떤 영화들은 충무로에서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가?
이런 의문들로 인해 나는 종종 오늘날의 영화가 완전히 새로운 땅에서 새롭게 선언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건 망상으로 취급 받을게 뻔하다. 그러나 오늘날 대다수 사람의 삶이 '불안정 노동'의 문제의 모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래서 현실이 여전히 영화가 다시 '노동'을 만나야하는 사소한
이유라도 있다면, 그것은 '노동'의 문제와는 전혀 만나지 못하고 있는 충무로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책을 그 새로운 땅을 향해 세워놓고 싶다.
/홍명교 <유령 세상을 향해 주먹을 뻗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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