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어렸을 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본적이 있다. 그 내용은 상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제목이 하도 당당하고 파격적이라 십수년이 흐른 지금도 제목만은 기억하고 있다. 더이상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는 중국, 여성 파워가 남성 이상으로 당당한 중국, 도를 버리고 이미 그 자리에 돈이 차지하고 있는 중국, 그런데도 수천년전 공자왈 맹자왈을 따르며 공자의 말씀을 지키고 사는 우리나라가 답답했다. 아직도 제삿상에 홍동백서를 따지고, 양반 가문 운운하며 족보를 쓰시는 시댁어른들에 대한 답답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 <논어>를 읽고 싶다는 막연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수직적 인간관계를 만들기위해, 혹은 내가 배운집 양반입네하고 그 형식만 열심히 따라했던 꼰대들 때문에 공자가 말하기 원했던 속 뜻을 한번도 되새겨 본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상대방에게 인정받고 다른 사람들이 내 진심을 알아주기를 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이럴 때 공자의 지혜가 또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는 마음가짐은 공자의 가르침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논어>읽기는 자신을 성찰하고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춘추전국시대 초기에 쓰인 <논어>가 현대인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스마트 기기와 인공지능이 출현한 지금 이 시대에, 2천년 전의 <논어>를 어떻게 현대인들과 공유해야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논어>를 정보화 시대에 어떻게 응용해야할까? 만약 우리가 논어를 문자 그대로 고지식하게 읽고 있다면 <논어>는 시대착오적이고 경직된 죽은 학문이된다. 아무리 존경받는 공자일지라도 우리에게 죽은 지식은 필요 없다. 인터넷을 떠도는 논어의 해설은 대부분 지나치게 통속적이거나 무미건조하다. 심지어 공자의 뜻에 어긋나거나 가장 진귀한 고견을 빠트리는 경우도 있다. 검증되지 않은 잘못된 해설이 하이퍼링크로 연결돼 공유되고 증식되고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술술 읽힐 수 있는 <논어>는 어떤 모습일까? 심리학,물리학,사회학, 경영학등 현대의 학문들과 연결해본다. 만약 이 연결들이 이루어진다면 <논어>의 현대화도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확신했다. 지금 이 시대에 <논어>를 살아 움직이게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올바른 <논어>읽기의 방법이 될것이다. <나는 불안할 때 논어를 읽는다> 는 많은 논쟁을 불러 올 수 있다. <논어>의 간단한 문장 속에는 심오한 여러가지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해석의 방향도 다양하다. 학자들은 각자의 해석에 정당성을 갖추기 위해 합당한 근거를 마련한다. 그리고 서로 자신들의 해석이 가장 훌륭하다고 다투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논어>읽기가 현대인의 삶에 더욱 밀접하게 연결되어 깨달음을 줄 수 있기는 바랄뿐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필요한 창업자, 자녀 교육 걱정에 여념이 없는 부모들, 직업을 선택해야하는 대학 졸업생들을 비롯한 현대인 누구에게나 <논어>는 길라잡이가 된다.

學而時習之 학이이습지 ; 논어 한 문장으로 인생의 변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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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공자의 가르침중에 가장 기본이며, 이 부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평생 공부를 해도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을까? 책에는 1편 배움, 2편 리더, 3편 예법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오늘은 전체를 아우르는 말은 결구 배우고, 익혀, 실천하라는 1편이 가장 근본이 아닐까 한다.

공자가 말하길 "배우고 제때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친구가 먼 곳에서 찾아오니 기쁘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아니하니 군자답지 아니한가?

논어의 제 1편 제목은 '학이'學而 이다. 공자의 후세들은 <논어>를 총 20편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첫 문장에 나오는 단어를 제목으로 삼아 20개의 소제목을 달았다. 첫 문장은 누구나 학창시절에 한 번쯤은 들어본적이 있는 익숙한 문장이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

문장에서 '아니한가?'하고 번역된 불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공자는 간단히 설파하면 될 말을 왜 독자들에게 물어보듯 말했을까? 우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나는 배우고 제때 익히는 일이 즐거운가?' 대답은 아니다. 배우는 것, 즉 공부가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닐 것이다. 공자도 대부분의 사람이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건 같다. 그래서 그는 '이또한 즐거운일이 아니겠는가?'라고 역설적으로 독자들에게 되물으며 배움의 세계로 반갑게 초대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책을 매일 읽어도 왜 내 삶은 좋아지지 않는 걸까? 이유는 분명히 있다. '배우기'만 하고 '익히지 않기' 때문이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분별하며, 성실이 실천해야 한다. "

평상시 우리가 마주하는 배움에 대한 어려움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아예 배우려하지 않는 경우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공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다. <논어>는 주로 스승인 공자와 제자들이 대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미 배우고 있거나 배우겠다는 마음을 가진 제자들과 토론하면서 배우지 않는 경우를 이야기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두번째 상황은 배우기만 하고 응용과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것을 만들지 않은 경우이다. 배운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짧은 시간 안에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사람일 경우, 배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배움이 삶을 바꾸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 도 있다. 쉽고 빠른 지름길로 가고 싶은 초조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정독하는 대신 오디오 북으로 흘려듣고, 한가지 지식을 배운 것으로 삶의 변화가 즉시 일어나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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