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군을 특등으로 사랑한 아고리

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ㅣ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사랑해 마지않는 아내와 타국에 떨어져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가슴이 찢어질 것 처럼 그립고 뼈에 사무칠 정도의 외로움이 마음 가득 쌓일 때, 종이 한 장에 펜을 들고 편지를 써내려 갈 것이다. 보고싶다, 사랑한다, 잘 지내고 있나. 온갖 수식어를 붙여 마음을 표현하고 답장을 재촉할 것이다. 그리움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는 글솜씨를 탓하며 편지를 잘 봉해 부치고는 답장이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겠지. 혹여 내가 예술가였다면 내 마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소'를 그린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이중섭이 타국에 떨어진 아내와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책으로 엮었다. 예술 전문 출판사인 다빈치에서 출간된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은 이중섭의 예술세계와 내밀한 개인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중섭이 가정을 꾸린 후 한국은 해방을 맞았다. 공산당의 지배 아래에서 살던 이중섭은 예술가에 대한 강압과 일본인 아내를 둔 것에 대한 사회적 압박을 견뎌야 했다. 이중섭의 본가는 꽤 돈이 많았기에 북한에서 살 때는 금전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나 월남해 부산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아내와 두 자식뿐이었다. 

결국 아내는 아이와 함께 일본으로 떠났고 이중섭은 한국에 남았다. 그러던 와중에 사기를 당해 아내는 삯바느질로 빚을 갚고 이중섭은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익히 들어 알듯 이중섭은 껌을 포장한 은박지에도 그림을 그렸고 담배갑에도 그림을 그렸다. 모든것이 이중섭에게는 캔버스였고 그 어떤것도 이중섭에게는 붓과 물감이 되었다. 

아내를 그리워하는 이중섭은 편지만 써서 보내지 않았다. 편지지에 온갖 그림을 그려 예쁘게 꾸몄고 그림엽서를 동봉해 보내는 등, 이중섭의 사랑은 참 로맨틱했다. 편지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편지지를 꾸미는 정성에서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또한 볼만한 것이, 보고싶은 마음을 고스란히 녹아 편지를 쓴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내에게 의지해 빌붙어 살았다는 손가락질 이면에는 아내와 두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전하는 책이다. 

이중섭을 익히 알던 시인의 글에서는 이중섭의 인간적인 면모도 느낄 수 있고 이중섭의 예술이 가지는 가치에 대한 짤막한 글도 함께 실려있다.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이중섭의 그림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책을 접하기 전에 내가 알던 이중섭의 그림은 '소'가 전부였다. 편지글 사이사이 실린 이중섭의 그림은 굉장히 다양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듯 한 묘사에서부터 언뜻 보면 피카소의 그림 같기도 한 느낌도 받았다. 

예술가를 소개하는 책들은 많다. 보통 그 예술가의 탄생에서 시작해 활동시기를 거쳐 사망에 이르는 연대기적 구성으로 엮여있다.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은 그런 보편적인 방식을 버렸다. 이중섭과 그의 아내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글로만 엮인 이 책은 이중섭의 생애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이중섭을 이해하는 데 매우 많은 도움을 준다. 이중섭이라는 예술가에 대한 소개라기 보다는 그가 지녔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상세한 기술로 엮인 책.

아내를 부르는 사랑스러운 애칭과 조금은 자학적인 이중섭 본인의 애칭이 섞일 때, 예술가 이중섭을 오롯이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