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파우스트>에서 <당신들의 천국>까지,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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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도 다시보자, 자나 깨나 생각하자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책을 다 읽었는데도 읽은 것 같지 않은 미적지근한 느낌. 책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권은 꼬박꼬박 읽는 독자라면 당연히 느낄 것이다. 내게는 중학교3학년 때 읽었던 사르트르의 <구토>가 그랬다.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고, 생각도 많이 하게 해주었는데도 솔직히 별로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사실 어렵다는 핑계로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왜 어려웠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쉽게 그 책을 파악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힘이 너무나 커져서? 그랬다면 더 좋았겠다. 나는 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라는 책 덕분에 이해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조금 주관적으로 13편의 고전작품들을 ‘읽고’ 있는 이 책은 많은 철학자의 사상과 자신의 생각을 섞어 객관성을 띄고 있다.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 가장 몰입해서 본 것은 역시나 <구토>이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도 같은 맥락으로 읽혔다. 이 셋의 공통점은 모두 부조리에서 오는 낯설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말하는 부조리는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이다. 시간 죽이기로 본질적 권태를 이길 수 없고, 곧 부조리를 깨려는 것이 오히려 인간을 힘들게 한다는 것. 따라서 베케트가 말하는 ‘본질적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실존하면서 자기 스스로 존재가능성을 기획해 그대로 살아라”라고 말했다. 또한 카뮈는 부조리한 이 세계에서 “버티고 반항하라”고 했다. <구토>에서 사르트르는 “삶은 무의미하기에 스스로 의미를 만들 자유가 있다”고 했다. 이는 하이데거, 카뮈, 야스퍼스 등 실존주의자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하다.

 

   나는 본질적 권태라는 말에 크게 공감하였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영화를 보고 있으면서도 나는 종종 “심심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보고 있던 영화가 재미있는데도 말이다. 사람이라면 한번쯤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데도 ‘심심함’이 느껴질 때…. 많은 실존주의자들은 본질적 권태를 “죽음을 기다리면서 생기는 삶의 깊은 권태”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 반항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기획하여 살아가기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라면 느끼는 이 끝없는 권태의 부조리함, 삶과 세계의 무의미함 대신 ‘의미부여의 자유’를 누리기로 했다.

 

   책에서는 파우스트, 오셀로, 데미안, 어린왕자 등의 작품에서도 철학적 의미를 밝히고 있다. 나는 특히나 프란츠카프카의 <변신>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온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공감하였다. 가족, 친구, 동료가 있고 수많은 사람과도 만나는 현대인들은 언제나 ‘외롭다’고 느끼는 것이 태반이다. “인생은 혼자”라는 말이 대중화될 만큼 관계가 없어 보인다. 만나지만 만나지 않은 현대인들은 ‘나’로 인해 ‘너’가 있다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 때문에 진정으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간과하는 것은 가족, 친구, 동료가 있기에 ‘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선 가족적이어야 한다”는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 또한 이러한 관계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꼭 가정이 아니라도 통하는 사람과 ‘가족적’으로 소통하는 것은 자신을 너무나 평온하게 만들어 준다. 이것은 동양적 관계론과 서양적 존재론이 융합된 이상적인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을 언니, 오빠, 삼촌 등 어떤 관계적인 요소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그 개인의 ‘존재’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꼭 어떤 ‘인연’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가족적으로 소통하는 것은 존재를 존중하면서도 관계를 맺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점에서 카프카의 <변신>은 어린왕자의 관계학보다 좀 더 이상적인 것이 아닐까싶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현재의 내가 다가가야 할 목표를 준 것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다. 이 책이 내게 준 의미는 “완전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이는 에리히 프롬의 “성숙한 인간은 밖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내면에 있어서 대립되는 두 자아를 조화시키는 것이 완전함이다. 사실 이것은 이상과 현실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주제만큼이나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은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헤세는 삶의 처음과 끝을 자기실현을 위해 여행하고 방황했다. 너무나도 용기 있는 태도이다. 물론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한 니체 또한 그렇다. 나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이들의 점을 본받아 자신을 실현하는 것에 용기를 가질 것이라 마음먹었다. 아마도 <데미안>은 청소년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의 작품들 중에서는 내가 읽은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이 작품들을 모두 다시 읽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읽은 책도 오래되면 내용을 다 까먹는 법이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적절한 사색을 하면 기억하는 것도, 깨닫는 것도 더 많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생각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는 단순히 작품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한 방향 도 주고 있는 것이다.

 

by와실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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