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도덕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버트란드 러셀 지음, 김영철 옮김 / 자작나무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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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Marriage and morals)

 

 

  이 도서는 1920년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었다. 나는 그것이 정말 당연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이 책은 개방적이다. 하지만 러셀의 몇몇 주장은 지금 실현된 것들도 있고, 그가 ‘성’에 대해 억압적이거나 모순되지 않은 입장을 보인 것은 매우 본받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라는 존재의 고유역할은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 사회에서도 이 도서에 나온 몇몇 주장들이 사회의 관습적 의미로써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특히 아버지의 역할을 국가에서 대신할 것이라는 주장은, 오히려 더 많은 성적 개방이 이루어질 것이고, 또 그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분명 태어난 아이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생물학적 역할은 국가가 하기에 충분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입양’으로 아이를 양육하는 어버이에게 적용될 수 없다. 즉, 러셀은 아버지의 존재를 ‘종자를 퍼뜨린 남성’에게 국한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프랑스의 동성결혼이 합법화되고, 여러 국가에서 동성애를 포함한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는 흐름에 따라 아버지라는 존재의 역할은 성에 구애받지 않을 뿐더러 더 다양해질 가능성도 생겼다. 물론 경제적인 역할이 아버지에게 있음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경제적인 역할만이 아버지의 역할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부부 사이에 아이가 매개함으로써 서로간의 감정보다는 ‘어버이’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러셀의 주장도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나 또한 아이 없는 부부간의 감정과 사랑이 어버이의 그것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아이 없는 부부의 이혼이 즉각 승인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성을 사는 사람만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이 맞다

 

 

   그의 아버지 역할에 대한 대안은 반박당할 여지가 분명하지만, 성적 자유에 있어서 러셀의 주장은 그렇지 않다. 나는 “현대에는 잔인성을 결여한 남성과 결벽성을 결여한 여성”이라는 새로운 흐름이 생겼다는 러셀의 표현에 동의한다. 그런데 오히려 최근의 성적 불평등이, 나는 이 새로운 흐름에서 오는 피로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을 ‘점잖게’ 드러내는 자유로운 사회, 그 이면에 여성의 결벽성을 되찾기 위한 외부적 차단을 요구하는 사회. 여성의 이미지는 대체로 박혀있다. 여기에는 매춘부와 여성의 경계가 흐려진 탓이 있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으로 매춘부는 남성의 재산과 허세이며, 따라서 아래라고 속하는 ‘관습적’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매춘부가 흔히 자유연애를 즐기는, 즉 결벽성을 결여한 여성과의 경계가 흐려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관습적 의미로의 매춘부의 속성이 결벽성을 결여한 여성의 충분조건이 되어 버린다.

 

   중요한 점은, 나는 이렇게 오는 ‘성적 피로’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무의식적인 피해의식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우선 이번에 개정안을 발의한 ‘성매매특별법’에 대해 말하고 싶다. 개정안은 ‘자발적 성매매’로 처벌하고 있는 현행법에서 ‘성매매 피해자’ 규정에 ‘성을 파는 행위를 한 사람’을 추가했다. 즉, 성을 사는 사람만이 처벌받는 것이다. 이것을 이른바 꽃뱀활성화법이라고 반대하거나, '생계유지 목적으로 마약파는 여성은 무죄, 중독으로 마약 사는 남성은 유죄'도 가능하냐는 반문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들은 정말 시대착오적이며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성이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개정안을 제출했다”는 김상희 의원의 발언은 지금의 성적 불평등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의 독립성과 자유로움을 말하지 않았던 이전 사회에서는 여성의 ‘성’이 남성들의 지배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사회는 ‘성’이 (그 성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다른 성에 지배되거나 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성적지배에 있어서의 (여)성의 관습적 의미에 따른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법안이 꼭 필요하다.

 

   분명 성을 판 사람과 성을 산 사람 모두를 처벌하는 게 진짜 평등이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사회적 효과가 다르기 때문이다. 분명 지금 사회에서 자유연애는 이루어지고 있고, 또 그렇게 요청되고 있다. 따라서 여성이든 남성이든 ‘성을 사는 사람들’은 욕망을 해소하지 못한, 그래서 성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요청하는 이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자이다. 물론 (금전적 벌이를 이유로) ‘성을 파는 사람들’ 또한 생계유지수단의 가짓수에 따라, 이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부류는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둘 모두를 처벌한다면 이것은 결국 성적 지배이데올로기를 심화시킬 것이다. 성은 스스로에게만 귀속된 독립적인 것이다. 따라서 ‘욕망해소방법들의 여지를 남겨둔 채 성을 사는 사람들’만을 처벌해야 우리사회의 성불평등에 대한 관습적 의미가 조금이나마 바뀌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이런 이유로 러셀이 당시 젊은이들을 보며 현대사회의 흐름을 정확히 간파했다고 생각하지만, 매음에 관련해서 조금은 낙관적인 입장을 보였던 것에 비판한다.

 

 

우생학적 관점은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정신적 결함이 있는 경우만을 법적으로 규제하여 산아제한을 해야 한다”는 러셀의 주장에 동의하는 바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낙태가 인정되는 경우를 보면,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우생학적(優生學的)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가 있다. 이는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우생학적 관점은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는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것에 기초하지만, 우생학적 사상은 모든 인간이 동등하지 않다는 것에 기초한다. 따라서 우생학적인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반기를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하라는 ‘요청’이라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이런 점에서 러셀은 오히려 굉장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중요하다

 

 

   러셀은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사랑’을 굉장히 중시한 사람이다. 이것은 나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랑’자체에 대해 생각해야 모순된 금욕주의를 타파하고 성적 자유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욕이 식욕이라는 러셀의 말 또한 동의한다. 오히려 성욕을 느낄 때마다 억압하거나 참지 않고 바로바로 해소해야만 모순된 성도덕이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앞서 말했듯 ‘매춘부’의 속성이 ‘결벽성을 결여한 현대여성’의 충분조건이 되어버린 지금 사회에서 나와 러셀의 말을 오해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성욕을 자연스러운 욕구로 보는 것은, 타인의 성을 귀속하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

 

   이렇듯 성적 욕구가 자연스럽다는 생각과 서로간의 정신적인 어떠한 것, 그리고 가치의 기준이 합일될 때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질 것이다. 러셀 또한 행복한 결혼을 위해서는 “부부 쌍방이 완전한 평등함을 느껴야 하고, 서로의 자유를 간섭해서는 안 되며, 가장 완전한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화합이 있어야 하며, 가치의 기준도 어느 정도 유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끝으로,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사회에서의 성적 불평등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이고, 진정한 성적 해방과 자유가 무엇일까, 그리고 진짜 행복한 결혼과 사랑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나 스스로도 러셀의 『결혼과 도덕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를 읽으며 그러한 것에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나는 최근 연애를 하면서 결혼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주 적절한 고민을 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 같다.

 

by와실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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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파우스트>에서 <당신들의 천국>까지,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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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책도 다시보자, 자나 깨나 생각하자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책을 다 읽었는데도 읽은 것 같지 않은 미적지근한 느낌. 책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권은 꼬박꼬박 읽는 독자라면 당연히 느낄 것이다. 내게는 중학교3학년 때 읽었던 사르트르의 <구토>가 그랬다. 재미도 있고, 감동도 있고, 생각도 많이 하게 해주었는데도 솔직히 별로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사실 어렵다는 핑계로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왜 어려웠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쉽게 그 책을 파악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힘이 너무나 커져서? 그랬다면 더 좋았겠다. 나는 김용규의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라는 책 덕분에 이해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조금 주관적으로 13편의 고전작품들을 ‘읽고’ 있는 이 책은 많은 철학자의 사상과 자신의 생각을 섞어 객관성을 띄고 있다.

 

   책에 수록된 작품들 중 가장 몰입해서 본 것은 역시나 <구토>이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도 같은 맥락으로 읽혔다. 이 셋의 공통점은 모두 부조리에서 오는 낯설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말하는 부조리는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이다. 시간 죽이기로 본질적 권태를 이길 수 없고, 곧 부조리를 깨려는 것이 오히려 인간을 힘들게 한다는 것. 따라서 베케트가 말하는 ‘본질적 권태’를 극복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실존하면서 자기 스스로 존재가능성을 기획해 그대로 살아라”라고 말했다. 또한 카뮈는 부조리한 이 세계에서 “버티고 반항하라”고 했다. <구토>에서 사르트르는 “삶은 무의미하기에 스스로 의미를 만들 자유가 있다”고 했다. 이는 하이데거, 카뮈, 야스퍼스 등 실존주의자들의 공통된 생각이기도 하다.

 

   나는 본질적 권태라는 말에 크게 공감하였다. 책을 읽고 있으면서도, 영화를 보고 있으면서도 나는 종종 “심심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보고 있던 영화가 재미있는데도 말이다. 사람이라면 한번쯤 그런 적이 있을 것이다.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데도 ‘심심함’이 느껴질 때…. 많은 실존주의자들은 본질적 권태를 “죽음을 기다리면서 생기는 삶의 깊은 권태”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 반항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기획하여 살아가기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라면 느끼는 이 끝없는 권태의 부조리함, 삶과 세계의 무의미함 대신 ‘의미부여의 자유’를 누리기로 했다.

 

   책에서는 파우스트, 오셀로, 데미안, 어린왕자 등의 작품에서도 철학적 의미를 밝히고 있다. 나는 특히나 프란츠카프카의 <변신>과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온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공감하였다. 가족, 친구, 동료가 있고 수많은 사람과도 만나는 현대인들은 언제나 ‘외롭다’고 느끼는 것이 태반이다. “인생은 혼자”라는 말이 대중화될 만큼 관계가 없어 보인다. 만나지만 만나지 않은 현대인들은 ‘나’로 인해 ‘너’가 있다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 때문에 진정으로 만날 수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간과하는 것은 가족, 친구, 동료가 있기에 ‘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선 가족적이어야 한다”는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 또한 이러한 관계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꼭 가정이 아니라도 통하는 사람과 ‘가족적’으로 소통하는 것은 자신을 너무나 평온하게 만들어 준다. 이것은 동양적 관계론과 서양적 존재론이 융합된 이상적인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을 언니, 오빠, 삼촌 등 어떤 관계적인 요소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는 그 개인의 ‘존재’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꼭 어떤 ‘인연’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가족적으로 소통하는 것은 존재를 존중하면서도 관계를 맺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런 점에서 카프카의 <변신>은 어린왕자의 관계학보다 좀 더 이상적인 것이 아닐까싶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현재의 내가 다가가야 할 목표를 준 것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다. 이 책이 내게 준 의미는 “완전한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이는 에리히 프롬의 “성숙한 인간은 밖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해방되어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내면에 있어서 대립되는 두 자아를 조화시키는 것이 완전함이다. 사실 이것은 이상과 현실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주제만큼이나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은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헤세는 삶의 처음과 끝을 자기실현을 위해 여행하고 방황했다. 너무나도 용기 있는 태도이다. 물론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한 니체 또한 그렇다. 나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이들의 점을 본받아 자신을 실현하는 것에 용기를 가질 것이라 마음먹었다. 아마도 <데미안>은 청소년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성장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의 작품들 중에서는 내가 읽은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하지만 결국은 이 작품들을 모두 다시 읽게 되었다. 물론 사람들은 읽은 책도 오래되면 내용을 다 까먹는 법이다. 하지만 책을 읽을 때 적절한 사색을 하면 기억하는 것도, 깨닫는 것도 더 많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생각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는 단순히 작품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 지에 대한 방향 도 주고 있는 것이다.

 

by와실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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