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와 편견의 세계사
헨드릭 빌렘 반 룬 지음, 김희숙.정보라 옮김 / 생각의길 / 201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두툼했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두께를 자랑하는 이 책은 제목이 흥미를 끌었다. 이 책은 1920년대에 미국에서 쓰였고 1940년대에 개정 증보되어 2000년대에 이르러서야 한국에서 출판되었다는 그간의 과정을 알고 읽어야 덜 지루하다. 문맥을 파악하기에도 편하다. 그리고 중세 유럽에 대한 기본적인 역사적 지식이 있어야 책장을 넘기기가 수월하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 책을 읽기 바로 전에 너무도 우연히 고 남경태 선생님의 종횡무진 세계사를 읽었다. 그래서 그나마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단기 기억으로 남아 있는 중세 유럽에 대한 몇 몇의 지식을 등대 삼아 조금은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지은이 헨드릭 빌렘 반 룬은 굉장히 유머러스한 사람 같다. 미처 생각지 못한 곳에서 빵빵 터지는 위트가 책읽기를 즐겁게 한다. 옮긴이들의 수고도 돋보인다. 가끔씩 번역이 왜 이래?’ 하는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역자후기를 읽어보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고 납득이 갔다. 이 책을 통과해온 나는 그전의 나보다 얼마나 달라졌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머릿속엔 분명 새로운 지식이 쌓였겠지만(금방 잊겠지만) 중요한건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계속 생각하고 생각해 볼 참이다. 내 마음에 와 닿은 다섯 가지 문단을 음미해 보면서 말이다.

 

1. - 책은 한 권이면 족했다. 성경 안에 담긴 모든 문자, 모든 쉼표, 모든 세미콜론, 모든 감탄 부호 들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었다. -

거칠게 이야기하면, 중세 유럽을 관통하는 아니 지배하는 하나의 법칙은 종교였다. 유일신 신앙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이것 이외에는 다 거짓이고 비정상이고 배척의 대상이며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추악한 것이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피 튀기는 싸움 이후로는 이것 아닌 것의 불관용이 더 심해진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전체주의와 다르지 않다.

종교는 지극히 문화의 산물이다.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 문단에서 다문화 시대라고 말은 하지만 여전히 자문화주의에 빠져 사는 나의 정형화된 무의식을 느꼈다. 언론에서 만들어낸 동남아시아인, 조선족, 새터민들의 검증되지 않은 이미지와 편견을 오롯이 믿고 시간을 내여 이들의 삶을 들여다 볼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내 일상에 그들의 삶이 교차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심히 넘겼다. 하나의 책만 보았고 그것으로 만족했다. 주위에 있는 다양한 빛깔의 책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럴 필요 혹은 이유가 없었다. 이것이 문제였다는 사실을 이 문단을 읽으면서 막연하게나마 깨닫는다. 그럼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2. - 모든 시대에는 그 나름대로의 골칫거리가 있다. 우리에게는 빨갱이가 있다. 우리 아버지에게는 사회주의자가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는 몰리 매과이어가 있었다. 우리 고조할아버지에게는 자코뱅이 있었다. 그리고 300년 전 우리 조상이라고 상황이 더 나았던 건 아니었다. -

2018년 대한민국에는 어떤 골칫거리가 있을까? 골칫거리라고 하니 어감이 부정적이다. 기분도 우울해진다. ‘시대의 숙제라고 해두자. ‘다문화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도 꼭 완수해야 할 숙제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아직 다문화 교육론에 대한 지식은 미천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한국은 분명 다문화 사회임에는 틀림이 없다. 내 아이 학교 학급에도 꼭 한 명씩은 다문화 2세들이 있고 집 주변 도서관에는 다문화 특화 코너에 중국어, 일어, 베트남어, 필리핀어 등의 책들이 즐비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다문화 지원 센터에서는 각종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어 그 곳을 이용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서비스들은 다문화 가족 혹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 정작 다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그리고 궁금한 대한민국 시민들을 위한 다문화 교육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문화 교육론 2(다문화 교육의 개념과 쟁점 오해와 이해) 동영상 강의 내용이 그래서 더욱 공감이 된다. 책을 통한 이해가 아닌 체험을 통한 이해가 절실하다. 다문화라는 말의 개념 모순을 지적하는 학문적인 공방도 의미가 있지만 거리를 지나치다 자주 마주치게 되는 외국인에 대한 나의 열린 마음이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 잘 모를 때, 찾아가 의논할 수 있는 생활 속 다문화 교육의 장이 있었으면 좋겠다.

3. -유일신을 섬기건 열두 명의 신을 섬기건 모든 신을 섬기건 상관없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팍스 로마나의 성공이 각자 자기 방식대로 살자는 원칙을 편견 없이 적용한 덕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했다. -

어떤 단어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그 반대의 단어를 이용하여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 명확하다. 관용의 반대쪽에 있는 무지와 편견, 광기를 통해 관용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준 이 책은 그래서 똑똑하다. 위의 문단은 그런 방식의 반전이다. 관용의 잘된 예를 통해서 관용을 설명했다. 예로 든 시대는 팍스 로마나.

우리 앞의 숙제 중 하나인 다문화에 대한 인식 개선도 어떻게 해야 할지 역사 속에서 찾으면 답이 아주 없지는 않을 터. 고 남경태 선생님이 쓰신 한국사에는 백의민족, 한민족, 한핏줄 등등 한국인의 고유한(?) 정체성에 대한 거의 망상에 가까운 오해가 얼마나 몰역사적인 관점의 소산인지 잘 나와 있다. 자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긍정은 바람직하지만 그 바탕은 사실과 진실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다문화 이해 이전에 자문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다문화 유전자를 되새기며 조상들의 다문화성에 대해 배우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후에야 비로소 다문화 존중의 길이 조금은 더 쉽게 열릴 것이다. 한국사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다문화 존중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는 고려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려시대 사람들의 개방성과 다른 문화에 대한 존중을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배울 수 있는 학습 공간이 필요하다. 나도 더 많이 배우고 싶다.

4. -사적인 불관용은 어느 사회에서나 불편을 끼치기 마련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생충, 천연두, 험담을 일삼는 여자를 합친 것 보다 더 큰 해를 끼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인 불관용은 교수대가 되지는 않는다. -

개인적으로 나는 뚱뚱한 사람을 싫어한다. 그리고 목소리가 허스키한 사람도 싫어한다. 큰 눈이 앞으로 돌출되기까지 했다면 최악이다. 나는 이렇듯 사람의 신체적 조건에 대한 이유 없는 불관용이 있다. 그러나 이건 내가 티를 내지만 않는다면 사회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사적 불관용이 공적 불관용으로 둔갑하여 제도화 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뚱뚱한 사람은 차를 탈 수 없게 제도화 한다면? 목소리가 허스키한 사람은 공공장소에서 침묵해야 한다는 법을 만든다면? 픽 하고 웃고 넘길 우스갯소리로 들리지만 다문화에 대한 사적인 불관용이 아무런 제한 없이 퍼지고 확대재생산 되어 마침내 제도화 된다면 결과는 끔찍하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 르완다의 민족 내전, 중동지역의 종교 전쟁 등등 무수히 많은 불관용(공적)이 불어온 전쟁의 참상을. 다문화에 대한 공적 불관용을 용납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모두 공멸하지 않기 위해, 모두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다.

5. -여태까지 진보를 일종의 자동 시계로 여기고 따로 태엽을 감아줄 필요 없이 때때로 찬성만 해주면 된다는 행복한 착각에 빠져서 살아왔던 많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매우 끔찍해 보일 것이다. -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 우리는 알맞게 물을 주고 햇살을 주고 바람을 준다. 이런 일은 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수고스러움이 아니고 기꺼운 마음의 발로이다. 꽃은 아름다운 모습과 향기로 보답한다. 진보 역시 마찬가지다. 다문화 이해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땅에서 관용이라는 비료를 가지고 다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는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 한다. 보수적이고 몰개성적이고 군중심리가 강한 대한민국에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꽃밭에서 살고 싶다. 그럼 첫 삽을 뜨고 씨를 뿌리고 아주 영양가가 좋은 비료를 듬뿍 주고 기다려야 하리라. 천천히 그렇지만 성실하게 나의 꽃밭을 가꾸어 나가면 다른 이의 꽃밭과 만나 꽃밭은 점점 넓어지고 커질 것이다. 무수히 좋은 향기가 온 하늘과 땅 사이에서 진동할 것이다.

 

이 책의 어떤 지점이 다문화교육론과 연관성이 있을까?’ 책을 읽기시작하면서 계속 들었던 의문이 책읽기 중반을 넘기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중세 유럽에서 행해졌던 불행하고 끔찍한 사건들은 다양한 양상(결과)으로 나타났지만 원인은 하나였다. 자신의 생각, 문화, 신념, 종교만이 유일하게 옳다는 독선, 이것이었다.

관용의 정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다문화 사회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민의식도 관용일 것이다. 나는 관용적인 사람인가? 나는 세계시민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할 보편적인 시민성을 내재하고 있는가? 자문해 본다.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자문해 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