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싯다르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고빈다가 말하였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어, 싯다르타, 그리고 아직도 배울 것이 많이 있네. 우리는 쳇바퀴처럼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위를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거야. 그 바퀴는 둥근 원이 아니라 나선형이고, 우리는 이미 많은 단계들을 거쳐온거야] p.33
어느 누구에게도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세존이시여, 당신은, 당신이 깨달은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아무에게도 말이나 가르침으로 전달하여 주실 수도, 말하여 주실 수도 없습니다. p.55
싯다르타는 자신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나갈 때마다 매번 새로운 것을 배웠으니, 세상이 달라져 보였고 그의 마음이 마법에 걸린 듯 세상에 매혹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숲이 울창한 산 위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그리고 저 멀리 야자나무가 우거진 강변 위로 태양이 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밤하늘에 별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았으며, 초승달이 마치 파란 바다를 떠다니는 한 조각의 배처럼 두둥실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나무들, 별들, 짐승들, 구름들, 무지개, 바위들, 풀들, 꽃들, 시내와 강, 풀밭에서 반짝이는 아침 이슬, 저 멀리에 파랗고 뽀얀 빛깔을 하고 서 있는 높은 산들을 보았다. 새들이 노래하고 꿀벌들이 윙윙거렸으며, 벼가 익어가는 들판에는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한 청아한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었다. 이 오색영롱한 천태만상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으며, 항상 달과 해는 비추고 있었으며, 항상 시냇물은 졸졸 소리내며 흐르고 있었고 꿀벌들은 윙윙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싯다르타에게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눈을 가리는 무상하고 기만적인 너울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본질적인 것이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 너머 저편 피안에 있다고 생각한 싯다르타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예전에는 이 모든 것들이 불신의 눈으로 관찰되었으며, 철저한 사유에 의하여 무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차안의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그는 가시적인 것을 보고 인식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고향을 찾았으며,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피안의 세계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추구함이 없이, 이처럼 단순소박하게, 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바라보니,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P.71-72
언젠가 한 번은 그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은 나와 비슷해. 당신은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달라. 당신은 딴사람들과는 생판 다른 오직 카밀라일 뿐이야. 당신의 내면에는 당신이 매순간마다 그 속에 파고들어가 편안하게 안주할 수 있는 그런 고요한 은신처가 하나 있어.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야. 그런 은신처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되지.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은신처를 갖고 있는지도 몰라] P.107-108
그러나 자기가 그 내면의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자기가 보다 더 높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여 본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자기가 걸어온 길은 얼마나 단조롭고 황량하였던가! 자기가 높은 목표도 없이, 갈증도 없이, 향상도 없이, 자그마한 쾌락들에 만족하면서도 결코 흡족해하지 못한 채 헛되이 보낸 세월이 그 얼마나 길었던가! P.123
<알 필요가 있는 것이라면 모조리>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몸소 맛본다는 것, 그건 좋은 일이야. 속세의 쾌락과 부는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이미 어린 시절에 배웠었지. 그 사실을 안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내가 그것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군. 이제 나는 그 사실을 제대로 안 거야. 그 사실을 단지 기억력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나의 두 눈으로도, 나의 가슴으로도, 나의 위(胃)로도 알게 되었어. 그것을 알게 되어 정말 다행이로군!> p.144
그러나 강에 숨어 있는 무수한 비밀들 가운데에서 그는 오늘 단 한 가지만을 보았을 뿐인데, 그것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그가 본 비밀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순간마다 새롭다! p.149
[바로 그렇습니다]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배웠을 때 나는 나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이었습니다. 소년 싯다르타는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로부터 단지 그림자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을 뿐, 진짜 현실에 의하여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들도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니었으며, 싯다르타의 죽음이나 범천에로의 회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으며,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현존하는 것이며, 모든 것은 본질과 현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p.157-158
[나도 그것을 잘 알고 있어요. 당신은 그 아이에게 강요하지도 않고, 그 아이를 때리지도 않고, 그 아이에게 명령하지도 않아요. 당신은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물이 바위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사랑이 폭력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칭찬하고 싶을 만큼 당신은 아주 잘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당신이 그에게 강요하지 않고 벌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착각이 아닐까요? 당신은 그 아이를 사랑이라는 끈으로 묶어 구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은 날마다 그 아이를 부끄럽게 만들고, 당신은 당신의 호의와 참을성으로 그 아이를 점점 더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당신은 그 아이에게, 오만불손하고 버릇이 잘못 든 그 아이에게, 바나나나 먹고 살아가는 두 늙은이의 오두막에서 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늙은이들이야 쌀밥만 먹어도 별미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생각이 그 아이의 생각일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 아이의 마음은 늙고 고요한 우리 늙은이들의 마음과는 아무래도 다르지 않을까요? 이런데도 그 아이가 강요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p.174-175
[당신이 나에게 그 옛날 바로 이 자리에서 들려주었던 그 이야기 말이에요. 누가 사문인 싯다르타를 윤회로부터, 죄업으로부터, 탐욕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지켜주었던가요? 아버지의 경건함, 스승들의 훈계, 자신의 지식, 자신의 구도 행위가 그를 지켜줄 수 있었던가요? 어느 아버지, 어느 스승이 지켜서서 그를 말릴 수가 있었겠어요? 스스로 삶을 영위하는 일, 그러한 삶으로 스스로를 더럽히는 일, 스스로 자신에게 죄업을 짊어지게 하는 일, 스스로 쓰디쓴 술을 마시는 일,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내고자 하는 일, 그런 일을 못하게 누가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친애하는 친구여, 이러한 길이 어느 누구한테는 혹시 면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신이 설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당신이 어린 아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그 아이에게는 제발 번뇌와 고통과 환멸이 면제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기 때문에, 당신 아들에게는 그 길이 혹시 면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믿고 있는 겁니까? 그렇지만 설령 당신이 아들 대신 열 번을 죽어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 아이의 운명을 눈곱만큼이라도 덜어줄 수는 없을 겁니다] p.176-177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내가 스님에게 들려드릴 말씀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시 이런 말씀을 드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스님은 지나칠 정도로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구도 행위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도대체 어째서 그렇다는 겁니까?] 고빈다가 물었다.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스님, 당신은 어쩌면 실제로 구도자일 수도 있겠군요. 목표에 급급한 나머지 바로 당신의 눈앞에 있는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p.202-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