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에는 별처럼 무수한 야구팀들이 원칙과 룰을 지키며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그 반짝임 속에서 결국 자신의 별을 발견하고, 응원하게 된다. 즉

   저 별은 나의 별이다. p.81

 

"신경 쓰지 마."

조성훈이 그렇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신경이 쓰였다.

"뭘?"

"회사 잘린 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약간의 분노와 패배감, 불안같은 것들이 재구성된 지구의 표면 위로 떠올라왔다.

"처음 널 봤을 때...... 내 느낌이 어땠는지 말해줄까?"

"어땠는데?

"9회 말 투 아웃에서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 상황을 맞이한 타자 같았어."

"뭐가?"

"너 4년 내내 그렇게 살았지? 내 느낌이 맞다면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리고 조금 전 들어온 공, 그 공이 스트라이크였다고 생각했겠지? 삼진이다, 끝장이다, 라고!"

"......"

"바보야, 그건 볼이었어!"

"볼?"

"투 스트라이크 포볼! 그러니 진루해!"

"진루라니?"

"이젠 1루로 나가서 쉬란 말이야...... 쉬고, 자고, 뒹굴고, 놀란 말이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봐. 공을 끝까지 보란 말이야. 물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겠지. 어차피 세상은 한통속이니까 말이야. 제발 더 이상은 속지 마. 거기 놀아나지 말란 말이야. 내가 보기에 분명 그 공은 ㅡ 이제 부디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어." p.234, 235

 

세계는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성해 나가는 것이었다. p.242

 

- 요는 말이지. 어쩌다 프로가 되었나, 라는 것이야. 생각해봐, 우리는 원래 프로가 아니었어. 그런데 갑자기 모두 프로가 된 거야. 그 과정을 생각해보란 말이야. 물론 프로야구가 세상을 바꾸었단 얘기가 아냐. 요는, 프로야구를 통해 우리가 분명 속았다는 것이지.

- 속아?

- 그럼, 전부가 속았던 거야. '어린이에겐 꿈을! 젊은이에겐 낭만을!'이란 구호는 사실 '어린이에겐 경쟁을! 젊은이에겐 더 많은 일을!'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면 돼. 우리도 마찬가지였지. 참으로 운 좋게 삼미 슈퍼스타즈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우리의 삶은 구원받지 못했을 거야. 삼미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도 같은 존재지. 그리고 그 프로의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모든 아마추어들을 대표해 그 모진 핍박과 박해를 받았던 거야. 이제 세상을 박해하는 것은 총과 칼이 아니야. 바로 프로지! p.242, 243

 

그때는 이미 프로의 세계가 현실에서 구축되어 수많은 삶이 영문도 모른 채 프로의 삶으로 전환되던 시기였으니까. 즉 <야구>를 하던 선수들이 어느 날 갑자기 <프로야구>를 하게 된 것처럼, <인생>을 살던 모든 국민들이 어느 날 갑자기 <프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시기였어. p.249

 

결코 그 어떤 프로 팀도 <자신의 야구>를 완성한 적은 없었지. 왜? 그들의 목표는 한결같이 우승이었으니까. p.250, 251

 

그랬다. 회사를 그만두면 죽을 줄 알았던 그 시절도, 실은 국수의 가락처럼 끊기 쉬운 것이었다. 빙하기가 왔다는 그 말도 실은 모두가 거짓이었다. 실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죽은 것은 회사를 그만두면 죽을 줄 알았던 과거의 나뿐이다. p.262

 

올 여름은 왜 이렇게 긴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비로소, 시간은 원래 넘쳐흐르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 무렵의 시간은 말 그대로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어서, 나는 언제나 새 치약의 퉁퉁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나의 시간을 향유했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ㅡ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p.264,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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