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Magritte's "La Trahison des Images" ("The Treachery of Images") (1928-9) or "Ceci n'est pas une pipe" ("This is not a pipe").

 

1. 사진에 관하여 -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사진을 볼 때, 그 사진이 사실과 진실을 담고 있음을 기대한다. 그래서 그 사진이 적나라하거나 잔인할수록 그곳에서의 현실이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채 다르고 끔찍하다고 여긴다. 그림의 경우 사진처럼 완전히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적다. 또한, 글처럼 작가의 상상력과 해석에 따라 변한다고 여긴다. 사물을 그리는 정물화나 풍경화 또는 초상화조차도 우리의 시각으로 인식하는 실제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래서 그림이 아무리 이것이 “내가 본 실제 장면이다, 혹은 현실이다.”라고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진짜 현실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진은 다르다. 우리는 마치 거울이나 우물에 비친 나의 모습이 나 자신과 같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오른손을 들으면 거울도 같은 손을 들고 왼쪽 눈을 찡그리면 마찬가지로 똑같이 찡그린다. 또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내가 눈으로 보는 나의 신체와 동일하다는 것도 알아차린다. 나의 행동을 똑같이 한다는 차원에서, 두 눈으로 보는 나와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이 같다는 차원에서, 거울에 비친 존재는 결국 '나'임을 증명하게 된다. 사진 역시 그러한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사진기를 갖다 대고 찍은 사진 속에서 방금 전까지 내 눈으로 본 피사체의 단면이 그대로 찍혀 나온다는 점은 사진이 그림과 달리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인식을 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사진 같은 그림, 그림 같은 사진은 어떨까? 포토샵이나 사진기의 필터는 사진을 왜곡시킨다. 사진을 만화와 같이 만들기도 하고 장난감 세계처럼 만들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만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리얼리즘, 또는 하이퍼 리얼리즘이라는 이름 아래 그려진 그림은 실물보다 더 실제처럼 정교하다. 인간의 눈으로 모두 파악하기 어려운 세밀한 주름조차도 정교하게 그려낸다.

이럴 때, 그림이라는 단어와 사진이라는 단어에서 가지고 있던 본래의 의미가 다소 깨지게 되고 그 정교함에 따라 혼란을 겪는다. 그림이 사진처럼 되고 사진이 그림처럼 될 때, 우리는 정교한 그림에 등장하는 모습이 ‘진짜일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만화 같은 모습의 사진 역시 우리는 왜곡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사진’과 ‘그림’이라는 단어가 가진 오래된 환상은 워낙 단단해서 완전히 깨어지지 않고 다만 '그림 같은 사진’, ‘사진 같은 그림'이라는 비유적 수사가 덧붙여진다. (그러나 사진과 같은 그림에 “이것은 그림이다”라는 말이 언급되지 않으면 사진과 비슷한 인식을 할 것이다.)

 

 

 

Le Basier de L'Hotel de Vilne, 1950. Gelatin Silver Print, Signed (시청앞에서의 키스)

 

사진이 갖는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예술성 또는 상징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연출되거나 조작되는 사진들은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광고 사진은 상업성을 극대화한다는 차원에서 진실성이 내몰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광고 사진들을 보면서 이것이 진실일 것이라는 무의식적 착각을 한다.) 보다 극적인 효과, 사진이 주는 인상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만들어지는 사진은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에 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Faction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마치 가상의 그림과 가상의 이야기가 진실을 더 잘 밝혀주기도 하듯이, 현실의 이미지를 차용한 가상의 이미지는 소설이나 그림보다도 더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진들의 반복적 노출과 (거대 자본이 등 뒤에 있는) 허용은 우리를 기만한다는 생각보다 의례 그러려니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따금 그러한 사진이 우리를 기만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지만,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그것을 그저 무의식적으로, 또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면서 35mm 휴대용 라이카 카메라가 등장했다. 그전까지의 보도사진에는 어떠한 현장감을 기대하거나 진실성을 기대하기는 사실 어려웠다. 사진은 정적이거나 혹은 연출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서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전까지의 사진기는 쉽게 휴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보도 사진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휴대성이 강화되면서 현장에서 실제 전투 중에 찍히는 사진들이 많아졌고 점차 보도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저널리즘의 한 영역이 되었다. 그것은 기사를 보충하거나 그 자체가 증거자료가 되어 기사가 가지는 진실성을 좀 더 강화시켜주었다.

그 사진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기사에 관한 개개인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충격적인 이미지들을 전달했다. 그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의 상상을 구체화하였고 실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이것은 사실이다.’라는 명제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가장 적나라한 사진인 타인의 고통과 죽음의 이미지조차 점점 쉽게 재생산되고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이로써 사진이 주는 특수성은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가 아닌 '이것은 사실이다?'라는 물음표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2. 타인의 고통 - 무감각해지는 법.

 

 

수전 손택의 책 『타인의 고통』은 이러한 이미지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이미지로 접하는) 전쟁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이미지를 통해 바라볼 수밖에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단순히 연민 수준에서의 인식을 넘어서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미지가 가지는 문제점, 미디어에서 다루는 전쟁, 파괴 등의 고통스러운 사건에 대하여 우리가 인식은 하지만 왜 그것을 쉽게 외면해버리는지를 고찰한다.

이미지 생산과 복제는 인터넷, 스마트폰의 보급과 함께 엄청난 성장을 이룬다. 이는 기존에 언론이나 전문 사진작가들이 찍어오던 이미지를 뛰어넘어 쉽게 카메라를 들이댈 뿐 아니라 쉽게 전파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2011년, 튀니지, 이집트에서 벌어진 민주주의 시위와 그에 대한 폭력 진압에 관하여 미디어로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이제 TIME 이나 뉴욕 타임즈 같은 전문 언론 기관이 아니라 트위터와 페이스북이었다.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업로드 되는 사진과 글은 그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 바깥세상에 알렸고 또한 전 세계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지지가 변화를 이끄는 것은 아니었다. 지지를 한 많은 이들 중에서는 그것을 보고서도 사이버 세상 안에서 평상시처럼 '좋아요'나 'RT'를 무감각하게 누르는 이가 있었고 또한 당장 그것밖에 할 수 없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작년에 잊지 못할 사진 하나를 기억하고 있다. 화물까지 포함하면 약 1만 톤에 달하는 배가 거꾸로 뒤집힌 채, 뉴스와 신문 전면에 도배되었기에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면 누구나 기억할 사진이다. 사진의 아래쪽에는 ‘전원 구조 성공’이라는 커다란 자막이 있었다가 이내 다른 말로 교체되었다. 뒤집힌 배와 그 배 주변을 맴도는 작은 배들, 통곡하는 유가족들의 이미지가 연일 뉴스의 첫머리에 등장했다.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될 무렵, 여러 이유에 의하여 그 이미지를 보지 않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생겼고, 어떤 이유에 의하여 조롱하는 사람이 생겼으며, 어떤 관점에 의해 유가족들의 집단행동을 정치적인 목표를 가진 나쁜 이들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이미지의 계속되는 재생산과 반복이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을 무감각해지도록 한 것일까? 혹은 혹자의 말을 빌려본다면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죽은 이만 쳐다보고 있을 것인가?’처럼 산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힘들더라도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차원일까?

무엇이 되었건 어쨌거나 과거의 고통은 잊고 무감각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현실을 살아가려면 과거의 고통을 외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지금 나의 고통이 더 우선하니 죽은 자가 느꼈을 법한 고통은 미뤄두자는 말이다. 이것이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상상력의 실패이고 공감의 실패인지, 혹은 일부러 떠오르는 망각을 잊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우리는 고통스러운 것을 직시하거나 인식하려 하기보다는 외면하려 한다는 것이다.

 

 

3. 타인의 고통 - 연민을 넘어서!

 

 

『이것이 인간인가』를 저술한 프리모 레비는 슬픈 추억을 되살리는 힘을 지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그 커다란 고통의 추억 앞에서 크게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는 말을 한다.

 

슬픈 추억을 되살리는 힘을 지닌 이 수용소 앞에서 살아남은 우리들은 모두 서로 다른 태도를 보였지만 대개 두 부류로 나뉘었다. 첫째 부류는 이곳으로 돌아오기를, 혹은 이런 주제로 이야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어서 악몽에 시달렸던 사람들도 여기에 속한다. 그래서 결국 다 잊어버린 사람들, 모든 것을 지우고 제로에서부터 다시 시작한 사람들이 여기 속한다. 나는 대개 이런 사람들이 불운 때문에, 그러니까 정치 활동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다가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에게 고통은 사고나 질병 같은 트라우마일 뿐, 의미나 가르침이 전혀 없는 경험이었다. 그들에게 기억은 낯선 어떤 것, 그들의 삶에 난입한 고통스러운 물체였다. 그들은 그 기억을 지우려고 애썼다(혹은 아직도 애쓰고 있다). 둘째 부류는 반대로 ‘정치적’이었던, 혹은 어찌 되었든 정치적 경험이 있거나 종교적 신념 또는 강한 도덕성을 소유한 포로들이다. 이 귀환자들에게는 기억하는 것이 의무다. 그들은 잊고 싶어하지 않는다. 특히 세상이 잊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의 경험에 의미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수용소는 사고가 아니라는 걸, 단순히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역사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284~285p, 2007. 돌베개>

 

고통을 겪었던 이들조차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을 보인다. 지옥으로부터 구조된 그들 역시 고통을 받은 장본인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주변에는 같은 수용소에서 고통을 당하고 죽음을 당한 타인이 존재했다. 「상기하기」를 할 때에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에 대한 상기도 있지만,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 대한 상기도 이에 포함된다. 고통을 당한 사람조차도 반복되는 기억의 재생에 대하여 망각하고 무감각해지기를 바라는데, 이미지로만 겪는 우리는 어떠하겠는가?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들에게 있어 타자이다. 우리는 절대 이미지로는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많은 경우 그 사진을 보며 눈물짓고 동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충격에 따른 그러한 연민은 금방 무감각해진다. 마치 가까운 이가 죽고 나면 삼일장을 치르고 나서 평상시의 무감각한 생활로 돌아가다가 간혹, 어쩌다 한 번 떠올리다 말듯이, 연민은 짧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연민이 아닌 수치심을 부르짖었다.

 

그는 그 대신에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도록 마음을 쓴다. 참으로, 나는 연민의 정이라는 것을 베풂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저 자비롭다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나도 수치심을 모른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혹시, 슬픔과 연민을 앞세워 즐기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안타까운 일이라면서 마치 오늘의 날씨와 같은 일상적인 대화의 소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러한 타인의 고통과는 상관없다고, 우리는 그런 사건에 대해 결코 연루되어 있지 않기에 저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한 연민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상관없는, 영화에 나오는 클라이막스 장면을 보고 느끼는 감정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수전 손택의 말처럼, 그것은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 154p>

 

그렇다면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그들이 아니라 우리는(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연민이 아닌 보다 적극적인 행위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연민 이상의 무엇을 해보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전쟁조차도, 같은 지구 상의 존재가 겪는 여러 문제와 고통에 대해서 우리와는 무관하다는 생각으로 방조해서는 안 된다. 타인에 대한 연민보다 우리가 가지는 수치심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객관성의 칼날 - 과학 사상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
찰스 길리스피 지음, 이필렬 옮김 / 새물결 / 200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어린 시절에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갔던 교회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라는 식으로 시작되는 구절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은 성경의 역사에서 유명한 각각의 인물들의 가계도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안에 있는 수십 개의 전서에는 그들이 이룬 업적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히 기술(記述)이 되어 있었습니다.

  찰스 길리스피의 『객관성의 칼날』을 보며 느꼈던 감정은 마치 성경에서 보았던 가계도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다만 성경, 특히 구약이 신과 이스라엘의 계보와 역사라면 『객관성의 칼날』은 르네상스 이후 과학의 꽃을 피운 인물들의 계보와 과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죠.

 

 2. 이 책은?

 

  이 책은 중세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어떻게 객관성을 갖춘 과학을 얻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일종의 역사서입니다. 책의 맨 앞 장에는 근대 과학 발견의 초석이라 할 수 있는 갈릴레오의 낙체운동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당시 신 중심의 유럽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것은 지구가 천체의 중심이고 행성은 완벽한 원형으로 지구 주변을 돈다는 관점이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신 중심의 사상이 함께 결합하면서 모든 자연의 법칙은 신의 뜻에 따라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어오게 됩니다. 객관성보다도 주관성이 강했으며 무실험적이며 이성의 만족만으로도 논의가 끝날 수 있었죠. 그러나 이것은 근대 과학이 추구하는 수학적, 분석적, 경험적, 계량화와 거리가 먼 것들이었습니다.

  『객관성의 칼날』은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근대과학이 그러한 체계를 갖추기까지 있었던 과학사적 사건들을 마치 가계도와 같이 유기적으로 기술합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티코 브라헤, 갈릴레오의 사상이 어떻게 뉴턴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의 실험 방법이나 이론들이 또다시 여러 역학과 화학, 생물학 등의 세분화된 과학의 분야들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그들의 에피소드를 빌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3. 과학 사상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

 

  『객관성의 칼날』은 “과학 사상의 역사에 관한 에세이” 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부제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책이 과학 사상서라는 것과 그것이 전개된 역사 그리고 그것을 에세이로 풀어서 썼다는 말일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현대 과학의 과학적 기법이나 방법, 사상, 이론 등 모든 전반에서 어떻게 신 중심이나 주관적인 해석을 벗어나 합리적이면서 객관성을 유지하게 되었는지를 논의하는 과학 사상서입니다. 그리고 저자 찰스 길리스피는 그러한 과학 사상이 어떻게 계몽주의나 철학 등의 사상에 유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책의 제목의 원제를 잠시 살펴보면 『The Edge of Objectivity』입니다. 우리 책에서 칼날이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사실 ‘Edge’라는 것은 ‘모서리, 가장자리’의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이 동의하듯, 중세에서 근대로의 변화처럼 하나의 시대가 다른 시대로 넘어가게 되는 것은 단순하게 어느 한 명의 영웅의 등장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시대가 변화하는 것은 변화를 바라는 수많은 군중과 학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그러한 변화의 시기에는 혁명적인 인물이 한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단순히 천재적으로 혼자 완성한 것이 아닌 많은 이들의 이론과 뜻이 응축되어서 하나의 통일된 사상으로 매듭짓는 때가 오죠. 마치 동이 트기 전까지 차츰 빛이 새어 나오다가 이윽고 태양의 전체 모습이 보이듯이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는 시기가 있듯이, 우리의 시대도 새벽에서 오전으로 그리고 오전에서 오후로 가게 되는 기준이 존재합니다. 이 책은 그 변화 기준의 가장자리에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역사는 대중을 통해 움직이지만, 그 시대의 끝 또는 『가장자리』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노력이 새로운 시기를 여는 문을 열어주었기에 저자는 이 책을 『객관성의 칼날』이라고 명명했다고 봅니다.

 

4.교과서에 나오는 것을 중심으로…….

 

  흔히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법칙들은 당대에 가장 혁명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것들이 나온다고 합니다. 물리학에서 뉴턴의 운동에 관한 법칙이나 화학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 생물에서 유전 법칙 등이 다 그렇죠. 그렇게 대단한 법칙들을 배우지만 우리는 그 법칙들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그들이 알게 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피사의 사탑에서의 갈릴레오의 낙하 실험, 뉴턴의 사과 이야기”처럼 단순한 몇 줄의 에피소드들이 고등학교 문제집 첫 페이지의 삽화와 함께 첨부되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법칙들이 도출되기까지는 수십 년 혹은 백여 년 이상의 수많은 사람의 생각과 실험 그리고 논문들이 겹쳐져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또한, 단순히 그 법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논의된 수많은 사상과 논의들은 정치나 사회 그리고 철학 등에 영향을 미치죠. 이것은 당시 학풍이 하나의 학문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닌 과학자가 동시에 철학자나 작가, 목사 등을 겸했기에도 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철학자 데카르트와 대문호 괴테가 동시에 과학자였던 것처럼 말이죠.

 또한,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당시에 혁명적이었던 과학적 방법론 역시 수많은 사상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가령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인 존 로크의 경우 인간 본성에 관한 과학을 탐구하기 위해 물리학을 모범으로 삼고 뉴턴적 물질관과 유추로부터 정신을 논하기도 했죠. 그런가 하면 애덤 스미스는 아이작 뉴턴의 자연과학 법칙에 감명받아 그것을 사회과학에 도입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국부론을 썼습니다.

『객관성의 칼날』에도 그와 비슷한 그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았듯이 수많은 사상가는 다른 후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어떠한 과학은 또 다른 과학을 탄생시키는 순간에 있었던 다양한 창조적 인간들의 이야기를 밝힙니다.

 

5.거의 모든 것의 역사 VS 객관성의 칼날

 

  과학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책은 함께 생각해볼 수 있으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 빌 브라이슨』의 경우 누구나 읽어도 크게 무리가 없는 반면에 『객관성의 칼날』은 과학 사상에 관한 논의와 전개에서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다소 지루하거나 어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과학자들이 법칙의 발견에 관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동시에 그것이 동시대의 다른 사상과 과학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비교적 딱딱한 문체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때로는 책이 철학적이기도 하고 에세이라고 밝혔음에도 딱딱함이 느껴집니다. 독자의 대상도 전자가 다수의 대중이라면 후자는 어느 정도 고등학생 수준 이상의 과학 법칙에 대해 아는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양서임에도 지식의 확장뿐 아니라 깊이 있는 수준까지 들어 간다랄까요?

  과거에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 대한 리뷰를 진행하면서 이 책을 인터넷의 『엔하 위키』에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과학사의 다양한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재밌거나 야사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전개해 나가 독자들의 흥미를 돋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 반에 이 책은 『위키피디아』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학문적이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비교적 객관적 사실과 법칙에 대입하여 기술(記述)하기 때문입니다.

 

6. 과학과 역학을 배우는 또는, 배우지 않는 이들이게

 

  안타깝게도 전 대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과학을 거의 배운 적이 없습니다. 과학이나 역학과 상관없는 전공의 세분화에 따른 학문의 파편화 때문이었을까요? 전공에 충실했기 때문이었을까요? 20대 이후의 삶에서 과학이라는 것은 교양 서적에서 볼 수 있는 것 정도일 뿐이었습니다. 이미 과거와는 달리 세분화된 학문들은 과거 선배들은 가능했던 학문 간 교류나 다양한 전공을 함께 겸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죠.

  이 책도 역시 과학사에 대한 비교적 무거운 교양서입니다. 역학에 문외한인 저로서는 상식적인 부분을 뛰어넘어 과학 사상의 흐름이 철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사상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공학을 전공하시는 어떤 분은 현재 자신이 배우는 법칙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어서 좋았다는 말을 전하더군요.

  이 『객관성의 칼날』은 대학에서 과학을 배우는 이에게도 그렇지 않은 이에게도 읽는 즐거움과 심사숙고를 할 기회를 줄 것입니다. 누가 되었건 이 책을 통해 지적 성장을 추구하는 분들에게는 분명히 어렵지만 즐거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 노래하지 않는 봄.

혹시 요즘 참새가 짹짹거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혹은 주변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본 적은 있나요? 안타깝게도 근래에 인천에서 새들이 단체로 지저귀는 소리나 광경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고향은 리(里) 단위 소재지입니다. 촌동네인 그곳은 주변에 산이 많아 아침이 되면 뻐꾸기 소리, 올빼미 소리를 쉽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온 뒤로 뻐꾸기, 올빼미 소리는 전혀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어쩌면 세상의 다른 소리에 익숙해져 새들이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보다 봄이 전보다 더 소리 없이 찾아오고 또 소리 없이 가고 있다는 게 전보다 더 크게 느껴지네요.
 
노래하는 새들은 다들 어디로 떠난 것일까요?
 
 
2.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은 올해로 출간 50년을 맞는 책입니다. 50년 전에 살충제의 효과에 대해서 맹신할 때, 그는 그것이 주는 위험성을 경고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환경 파괴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었죠. 지금은 식상하기 이를데 없는 중금속 및 DDT 등의 각종 화학 물질의 체내 축적 문제의 심각성이 그때에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나 봅니다. 하긴 지금까지도 농약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우리도 농약 등에 대해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50년 전 출판한 이 책으로 인해 많은 환경 단체들이 살충제 사용을 억제하는 강력한 시위를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자연과 인간을 위협하는 살충제 사용이 금지되거나 억제가 되었죠. 또한 과학을 맹신하던 대중들의 인식을 크게 돌려놓습니다. 과학은 만능이고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벗어나 자연의 인위적인 조작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이제는 식상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이 책이 지금까지도 인정받는 까닭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자연과 환경에 대한 인식을 전면적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죠.
 
50년이 지난 지금,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가 살충제 사용에 대한 인식은 어떠할까요? 주변을 살펴보면 대체로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으나 '설마 죽기야 하겠나? 그런 거 일일이 다 신경 쓰면 아무것도 먹을 게 없다.' 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 저부터도 식품류에 축적되어 있는 중금속과 잔류 농약보다 일본에서 건너오는 방사능을 더 걱정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50년이 지난 지금에는 살충제에 대한 위험성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높아져 법적으로 규제하거나 친환경 농법들이 점차 발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행동은 식량을 생산함에 있어서 매우 더디고 손이 많이 갑니다. 출하량도 적어 다른 상품보다 비싸기도 하죠. 하지만 사람들은 결국 이것이 자연과 상생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점점 유기농-친환경 상품을 찾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3. 다시 봄을 노래할 새를 위하여.
 
카슨 여사가 살았던 50년 전과 지금을 비교할 때 지구의 환경이 더 좋아진 것인지 혹은 나빠진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DDT를 비롯한 살충제 사용은 비록 줄었을지언정 계속된 산업화 정책과 더불어 중국과 인도, 아프리카 등 과거 1차 산업 국가였던 곳이 공업화됨에 따라 환경은 더 나빠졌습니다.
 
살충제 등의 사용을 억제하는 노력을 기울임에도 불구하고 새들의 노랫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습니다. 21세기에는 살충제 문제와 더불어 여러 환경 문제들이 고개를 든 것이지요. 이것들 뿐만 아니라 새들이 집을 짓고 살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는 점도 큰 몫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쯤 다시 새들의 노랫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요? 노랫소리를 기억하기 어려워도 환경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고 그들이 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봐야하지 않을까요?
 
10여 년 전에 큰 유행을 탔던 것 중에는 웰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웰빙은 우리말로 하면 '참살이'라고 합니다. '참살이'라는 것은 결국 레이첼 카슨 여사가 바랐던 자연과 조화되어 사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네요. 50년이 지난 지금, 진정한 참살이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사랑은 기술인가?
 
근래에 연애 관련된 서적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대학에서도 연애나 남녀 관계 코칭에 관한 강의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과거, 학교에서도 물의를 일으켰던 '픽업 아티스트'는 연애 코칭의 전문가를 지칭하는 말에서 비롯되기도 했죠. 남녀가 만나고 친해지고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과정까지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 온라인의 소셜 네트워킹에 익숙한 우리 세대의 세태를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연애는 과연 필요한 것일까요? 밀당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연애에도 기술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술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랑하고 싶어서? 아니면 혼자라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서? 혹은 단순히 하룻밤의 불장난을 위해서?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가장 큰 이유라고 하면 가장 앞서 말한 사랑을 찾고 싶어서가 아닐까 싶네요. 연애(戀愛)라는 말 자체에도 '그리워할 연' 자와 '사랑 애' 자의 결합이니까요.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연애가 이러한 뜻으로 나옵니다. '연인 관계인 두 사람이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함.' 이것이 연애라고 하네요. 연애를 하도록 이끄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할까요? 이러한 의문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이 책 '사랑의 기술'입니다.
 
모름지기 기술은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것이 되고 계속해서 사용할 때 진정 값어치가 있습니다. 써먹지 못하는 기술은 기술이 아니라 그저 시간만 축내는 바보 짓거리에 불과할 뿐이죠. 저자인 에리히 프롬은 다른 기술들처럼 '사랑' 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단순히 연예인들이 TV 에 나와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사랑의 본모습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죠.
 
사랑이 기술이라고 할 때에는 기술이 가진 기본적인 속성들이 사랑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론과 실천을 결합해야하고 거기다가 지속적인 관심도 있어야 하죠. 아시겠지만 이론과 실천을 해봤다 하더라도 관심이 없다면 쉽게 잊어버리거나 알고 있는 지식조차도 소멸하고 맙니다.
 
유홍준 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 보면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고 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 때의 사랑이라는 것은 바로 관심으로 비롯된 사랑일 것입니다. 사실 저 셋 중에는 관심이 제일 우선되지 않을까 싶네요. 배우고 싶다는 동기가 부여되어야만 좀 더 볼 수 있으니까요. 아마 사랑을 해본 분들은 알지 않을까 싶네요. 여하튼 사랑, 그 자체도 역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사랑에 관심이 있다면서 돈, 직업, 명예에 더 관심을 쏟죠.
 
 
2. 사랑은 왜 해야 하는가?
 
'나는 지금 당신에게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오. 사랑 없이 살 수 있소. 다만 그게 몹시 지루하다는 거요.'
 
저도 아직 책을 보진 않았습니만, 작가 로맹 가리의 소설 '여자의 빛'에 보면 위와 같은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저자 입장에서는 '사랑이나 유희이고 재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인간은 사랑을 하지 않더라도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다만 사랑을 할 때 좀 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죠. 여기서 생각을 조금 확장하여 지루함을 고독이라는 말로 바꾼다면 어떨까요?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소유냐 존재냐'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상으로부터 분리, 소외되는 인간과 관련하여 탐구를 했습니다. 그의 책에 따르면 인간이 '이성'을 소유하게 됨에 따라,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의 선악과를 따먹게 됨에 따라, 인간의 근원적 소외나 분리에 따른 고독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기술'에서는 그 존재의 분리로부터 자신을 극복하고자 하는 과정이 바로 인간의 역사라고 합니다.
 
과거 기독교 시대 등에서는 소외감을 종교 등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으나 근대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고독감을 완충해 줄 수 있는 장치가 그다지 없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그러한 근원적 소외, 고독감을 벗어나기 위해 권위주의에 몸을 기대게 되었고 그것을 충족 시켜 준 것이 바로 나치즘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20세기 이후 세계사에 있었던 어이없고 끔찍했던 사건에 대한 원인을 소외된 인간 심리와 존재의 분리에서 찾았다면 '사랑의 기술'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갖고 태어나는 그 원인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라는 말을 통해서 말이죠. 물론 책에서는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다양한 방식으로 찾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창조적 활동도 있죠. 하지만 이것은 직장의 사무원들에게는 적용되기 어려운 것이며, 인간과 인간의 결합이 아니므로 대 인간적(對人間的)인 관점에서는 사랑이 그 해답이라고 말합니다.
 
 
3. 진정한 사랑이란?
 
그가 말하는 사랑은 타인을 소유하거나 소유 당하려는 사랑, 혹은 복종을 요구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고립감을 극복하면서도 서로 간의 개성을 존중하는 사랑입니다. 너무나 이상적이면서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실에서는 참으로 지켜지기 어려운 사랑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이유는 우리가 제대로 된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어렴풋하게 '이것이 사랑일거라는 생각만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가 말한 사랑에는 크게 4가지 측면이 결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체크해보시고 지금 하고 있는 사랑을 점검해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첫째 보호와 관심의 측면입니다. 사랑을 하면 보호하고 싶고 관심을 두고 싶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보호하는 것, 아이의 울음소리만 들어도 어떠한 것을 요구하는지 아는 것과 같이 그러한 측면이 있어야 한다고 하죠. 사랑하는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의 사소한 모습, 행동 하나까지 관심을 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둘째는 책임의 측면입니다. 드라마 등에 보면 한 남자가 고백할 때 '사랑해, 널 책임질게!' 라고 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누군가의 모든 허물까지도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연인 사이 뿐 아니라 더 큰 의미에서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북한 동포를 보면서 가슴아파 하는 것이나 안타까운 이들의 이야기를 보며 슬퍼하는 것들도 (보호와 관심의 측면도 있지만) 공동체적 관점에서 동포, 같은 민족 더 나아가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점에서의 책임의 측면 때문일 겁니다.
셋째는 존경의 측면입니다. 누군가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존경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것이죠.
마지막은 지식의 측면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할 때 많이 싸운다고 합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서로 간에 관심이 있어서라고 포장하며 관심이 없다면 아예 말도 안 하고 남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다만 이 상황에서 우리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관심만 있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이에 발생한 어떤 문제를 타인의 관점이 아닌 전적으로 자신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만약 그 사람에 대한 지식 혹은 그가 보는 관점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지식은 나라는 관점을 벗어나 그 사람 혹은 타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가령, 그 사람이 화를 내거나 노여워할 때, 그 사람에 대해 깊이 알수록 그 표면으로 드러나는 노여움 속, 즉 핵심 안에는 다른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 사랑을 한다면 그가 왜 괴로워하는지, 왜 그런 말을 해야 했는지 등의 이유를 알아차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것을 에리히 프롬은 지식의 측면으로 생각했습니다.
 
여기까지 읽어보셨으면 알아차리셨겠지만, 그는 사랑을 단순히 단순히 남녀 간의 성애(性愛)적 사랑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양한 사랑의 모습과 대상을 책을 통해 규명하고 그것을 통해 진정한 사랑에 대한 관점을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 대상은 다르나 종교로서의 사랑이기도 하고 모성애, 형재애적 사랑에 적용되기도 합니다. 단지 그 대상에 따라 약간의 방식에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마치 자동차 운전 기술을 배우면 1종 대형 버스나 2종 보통의 소형차나 그 작동원리는 같으나 운전 방식이나 운영 방식에는 약간씩 차이가 나는 것처럼요.
 
 
4. 사랑의 실천?
 
엊그제 친한 친구와 사랑과 결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중 설날에 절에 갔는데 스님이 결혼하고 싶으면 절에 가서 매일 꽃을 바치고 남편이 생기면 부처님처럼 받들겠다고 하라고 했다고 제게 말하더군요. 저는 종교가 불교가 아니라서 부처님처럼 받든다는 말이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매일 108배를 서방님께 하라는 것인지, 살생을 금하니 채소만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먹이라는 말인지 잘 모릅니다. 다만 스님이 부처님과 같은 사랑을 의미한 것이라면 '그 사람을 통해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 아닐까 싶네요. 부처님이 세상을 그처럼 사랑했듯이 말이죠. 물론 그것은 에리히 프롬이 원하는 사랑의 기술이기도 합니다.
 
 
5. 사랑의 결실.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을 보면 사랑에 관해 두 가지 상반된 관점을 가진 남녀가 연인이 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성관계가 별개라는 관점에 있는 남자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그녀가 그의 것이 되고 그 역시 그녀의 것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관점의 여자입니다. 둘은 서로 만날 때 전에 없던 영혼의 충만함을 느낍니다. 그 충만함으로 남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관점을 일부 버리고 그녀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녀 역시 그의 그러한 성향을 일부 인정하죠.
 
에리히 프롬은 현대의 젊은이들이 성적인 결합과 사랑을 혼동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다소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 소유, 물질주의와 결합된 성 상품화 및 성적 결합 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에는 종교적, 문화적인 보수성으로 인하여 '결혼 = 성적 결합 = 사랑'이었고 사랑을 알기 전에 이미 결혼과 성적 결합 등이 끝나버리는 통에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는 것이 어려웠죠.
 
사랑의 결실은 무엇일까요? 남녀 간의 성애적, 유전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일 겁니다. 종교적, 형재애 관점에서는 주변의 가난한 자를 긍휼히 살피고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일 겁니다. 자기애적 관점에서 보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개성을 키우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는 어쩌면 많은 부분 사랑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유하고 소유 당하려고 하는 것이 사랑이다. 혹은 시기, 질투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속성이다.' 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죠. 그리고 에리히 프롬이 추구하는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사랑에 관한 이상적 견해일 뿐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덕을 배우는 이유는 그것이 마땅히 지켜야 할 까닭이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올바른 인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기틀을 제공하는 데에도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6. 끝으로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하며, 교만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으며……
 
어릴 적 다닌 교회에는 이러한 노래가 있었습니다. 오래 참는 것, 온유한 것, 교만하지 않은 것, 시기하지 않는 것이 어찌 사랑일까? 사랑을 해보면 아시겠지만 오래 참는 자가 사랑의 권력관계에서 을이 됩니다. 사랑의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교만하고 자신만만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다른 이성과 함께 있으면 질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저게, 사랑이랍니다……
 
교회는 사랑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배웠습니다. 부처님은 자비를 베푸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수천 년전부터 지금까지 오만가지 사랑을 이야기하고 사랑은 결코 쉬운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친구에게 말해준, '당신을 통해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라는 말, 저도 한번 해보고 싶네요. 싱그러운 이 계절에 그런 아름다운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0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엔트로피는 에너지 전환, 엔진, 기계와 같은 것에서 일어나는 열역학적 과정에서 일로써 사용 불가능한 에너지를 결정하는 데 쓰이는 열역학적 특성이다. 이러한 장치들은 사용 가능한 에너지에 의해서만 작동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에너지가 일로 전환될 때 이론적인 최대 효율을 지닌다. 이러한 일이 진행될 때, 계의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위키 백과>


열역학 제2 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은 저 같은 이공계 학생이 아닐 경우 들어본 적은 있을지 몰라도 꽤 생소하게 느껴지는 용어입니다. 저로서도 단순히 아는 사실이라곤 '엔트로피는 총량은 증가한다.' '엔트로피가 증가할수록 쓸모없는 에너지의 양은 늘어난다.' '에너지는 질서에서 무질서로 향한다.'라는 것뿐입니다. 이마저도 관심이 없으면 모를 수 있죠. 사실 위의 말만 들어서는 '이게 분명 한글인데 무슨 말이야?' 하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러나 역학을 공부한 이들은 제 1 법칙인 에너지 보존 법칙만큼이나 단순한 게 바로 제 2 법칙이라고 합니다.


과학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단순한 법칙을 자신이 보고 있는 세계에 접목하고자 했습니다. 미학자들은 미술 작품에 이러한 엔트로피를 대입시켜 질서와 무질서에 따른 미학적 관점을 표현하고자 했죠. 경제학에서도 이러한 시도는 진행되었습니다. 일부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수천, 수조의 분자 단위가 지배하는 열역학을 고작 60억(인구)에 비교를 한다고 비판을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비판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제러미 리프킨의 책 '엔트로피'입니다. 그는 이러한 과학적 법칙을 바탕으로 에너지와 이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세계관과 역사를 이해하려고 시도합니다.


오컴의 면도날 이론이라는 게 있습니다. 14세기 영국의 논리학자이자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사였던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cam)의 이름을 따서 나온 선택의 방법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단순함이 정답이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이론입니다. 지금까지도 세상을 포괄할 수 있는 진리 혹은 법칙을 알고자 하는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말이죠. 이러한 진리에 가까운 법칙이 바로 엔트로피의 법칙이었으니 그것을 저자가 얼마나 매력적으로 바라보았을까는 두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그의 책을 대략 요약하면 시대의 세계관은 그 시대에 어떠한 에너지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차 산업혁명부터 지금까지는 사회와 인간은 갈수록 '진보'한다는 세계관에 있으며 그 세계관의 성장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재생 불가능한 화석 에너지라는 것이죠. 문제는 에너지는 제 1 법칙인 에너지 보존 법칙에 의해 보존되지만 제 2 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쓸모 있는 에너지에서 쓸모없는 에너지로 변화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에 따라 사회도 그러한 에너지의 엔트로피의 영향을 받아 질서에서 무질서로 갈수록 변해가고 있는 것이고요.


그러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는 베이컨과 데카르트 그리고 뉴턴이 만든 기계론적 세계관을 버리고 엔트로피적 세계관, 즉 세상의 모든 것은 갈수록 진보한다는 세계관이 아닌 모든 세상은 질서에서 무질서로 이동한다는 세계관으로 재인식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무질서로의 진행을 늦추기 위해서는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 사용을 줄이고 태양 에너지 등, 재생 가능한 에너지 사용을 활성화 시켜야 한다고 하죠.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기후 문제 및 에너지 문제가 발생한 시점인 21세기에 이르러 그는 또다시 엔트로피적 세계관을 뒷받침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재생 가능한 에너지에 대해 이제는 어느 정도 실효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는 2012년에 발간한 '3차 산업혁명'이라는 책을 통해 태양광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활용하는 방안들을 설명합니다. 물론 아직은 학계나 기업에서는 그것들이 실효성 단계에는 못 미치고는 있지만, 앞으로 국가와 기업, 그리고 사회가 논의해야 할 방안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실제로 제주도에서는 에너지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그의 책에 나온 대안들이 시행되었습니다.) 더불어 엔트로피에서 제시한 그의 생각이 점차 구체화하고 부분마다 도입이 되고 있죠. (물론 아직도 그가 제시한 미래와 에너지 혁명이 그다지 눈에 띄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산업혁명은 에너지와 언어 수단의 발달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차는 산의 나무와 같은 땔감으로 쓰는 단순 에너지 저장기술과 문자의 발달 2차는 석탄 석유 등의 화석 에너지 사용과 활자 술 그리고 3차 산업혁명은 바로 인터넷 기술과 태양광 등 거의 무한정에 가까운 재생 가능 에너지로 인해 발달한다고 합니다. 그 시대가 언제 어떻게 올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시대는 그가 말한 무한 에너지에 가까운 태양광이 자리하는 시대가 될 수 있고 혹은 다른 재생 가능한 에너지 자원이 주를 이루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재생 불가능한 화석 에너지는 이제 더이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에너지 시대의 우리의 삶과 에너지 소비는 지금과 같을까요? 지금의 과학이 인류의 역사 진보를 이끌어갈 수 있을까요? 엔트로피는 비록 30년도 더 된 책이지만 머지않아 가까운 미래를 짚어 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