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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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때 군인만 1천만명 이상 죽음을 당한 러시아에서, 여성 군인이 느끼는 시각은 남자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만약 전쟁이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더라면 이렇게 끔찍하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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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션 - 어느 괴짜 과학자의 화성판 어드벤처 생존기
앤디 위어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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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도 좋고 재미도 있다. 심심할 때, 슬플 때 보기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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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공화국 - 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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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이 63빌딩과 같은 높은 곳에 올라가 한강을 바라볼 때 무엇이 제일 눈에 띌까? 아마 비슷한 형태의 아파트와 교회의 빨간 십자가일 것이다. 그중에서 아파트는 내 집 마련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 저 많고 많은 아파트 중에 한 곳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그러한 소망이 수없이 많기 때문인지, 아파트 모델 하우스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파트가 제공하는 수많은 혜택과 어떠한 보이지 않는 특권은 단순히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는 거주지의 개념을 넘어서 한 가정의 꿈을 실현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 책처럼『아파트 공화국』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은 아파트가 생겨나는 까닭을 인구밀도에서 찾는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인구 밀도가 높아서 어쩔 수 없이 고층의 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많이 이들이 이 논리에 수긍했고 아파트 개발을 지리적 형편상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인구 밀도라는 측면으로 아파트의 개발 붐과 과열되는 아파트 시장에 대한 열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 가까운 일본의 사례를 보더라도 도시 지역의 인구 밀도가 높아도 우리나라처럼 아파트 시장이 과열되지 않는다. 저자는 이에 대해 심층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통해 인구 밀도 이외의 측면들을 밝혀 나간다.

 

1960년에 이르러 권위주의 정부의 등장과 함께 시작한 경제 개발 정책은 아파트의 개발 의지를 북돋았다. 그녀의 말에 요약하자면, 건설 경기를 진작시키고 그를 통해서 기업을 키우고자 했던 권위주의 정부와 재벌의 합작품이라는 셈이다. 더불어 프랑스에서는 아파트 단지라는 개념이 저소득층,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면 우리나라는 실질적으로 전체 사회 계층을 볼 때는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도 꼽고있다. 다시 말하자면, 70년대 이후 증가한 평수의 아파트들이 생겨나고 중산층이 그곳에서 머물기 시작하자 많은 이들이 아파트를 중산층으로 계층 상승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상징적 지표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책에서는 다루지 않지만, 더불어 하나를 꼽는다면 경제 개발 당시에는 수도권 집중 개발 정책에 힘입어 아마 서울로 올라오는 수많은 인원과 그곳에서 결혼하고 터를 잡는 인구를 수용할 공간을 급하게 마련해야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제공해야 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과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와 맞물려 급속하게 증가한 것도 하나의 요인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하면 재벌들의 기업 부풀리기가 정부의 경제 개발 정책과 맞물리면서 급격하게 늘어난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아파트가 탄생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책은 비교적 술술 읽혔으나 내용의 전반부는 예상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권위주의 정부의 개발 정책과 재벌의 이해관계 속에서 피어났다는 사실은 이 책이 출간된 2003년에는 특이할 만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라나 2015년 현재 정부가 부동산 경기 진작을 위해 시행하고 있는 행동과 건설 기업들의 개발 정책, 대출을 받아서라도 아파트를 사려고 하는 국민의 욕망에 대해서는 여러 미디어나 뉴스를 통해 상당부분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후반부에 점차 사회 구조적으로 접근하면서 여러 소득 계층이 아파트에 대해 가지는 심리를 꼼꼼하게 다루고 있다. 좋은 아파트가 계층적 지위를 대변하게 되는 까닭들에 대해 실증적 사례들을 보여주고 평수에 따라 거주자들의 사회 계층이 다른 것을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놀라울 만 하다. 더군다나 대단지 아파트의 감시체제나 통제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부분은 저자의 한국에 대한 통찰이 엿보인다.

 

프랑스와는 상반되는 사례이지만, 한국의 대단지 아파트 역시 통제의 문제에 대해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한다. 역설적이지만 한국에서 아파트단지는 지속적인 감시체계 덕분에 매우 안정된 주거 공간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국가로 하여금 통제와 감시를 용이하게 하였다. 이러한 감시의 논리는 한국의 아파트단지에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데, 이는 1980년대 말 민주화를 통해 엄청난 정치적 변화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단지 내 일상적 생활환경의 구조와 조건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로 나타난다.

서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경우와 한국의 경우를 대조해 보는 것은 여전히 흥미롭다. 이 책 본문에서도 강조했지만 도시가 특정의 형태를 갖게 된 데에는 그 어떤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단지 아파트가 갖는 물리적 특성 때문에 프랑스의 대단지 아파트가 문제의 위험지역으로 변한 것도 아니다. 프랑스의 아파트단지는 적어도 1980년대 이전까지 도시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지역이 아니었다. 그곳을 도시 폭력의 중심지로 만든 것은 합리적인 도시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점차적인 감시와 통제의 확대가 필요한 지역으로 규정하고 접근한 데 있다. 반면 한국의 경우는 아파트단지에서 감시와 통제의 체제가 민주화와 같은 정치적 격변과 경제위식 이후의 불안정한 시기에 오히려 사회 질서를 지탱해 준 완충 요인으로 기능했고 아마 지금도 그렇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감시체제와 사회안정의 병행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발레리 줄레조, 아파트 공화국, 245p.>

 

우리에게는 사실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말보다 삼성 공화국이라는 말이 익숙하다. 그리고 그 공화국 안에 사는 사람들, 흔히 삼성과 같은 대기업에 다니는 이들에게 우리는 중산층이라는 시선을 던진다. 서울의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 대부분이 중산층에 접근해 있고 실상, 이들이 바로 대기업을 다니거나 월평균 소득이 300만 원 이상인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대기업 중심의 사회 구조는 아파트 개발과의 관계에 밀접하게 영향을 미친다. 가령, 첫째, 단독 주택은 손이 많이 간다. 내외가 일하는 구조에서는 집을 관리하기보다 말 그대로 쉬기 위한 공간을 활용하기를 원한다. 둘째, 아이가 있을 경우, 아이의 안전을 고려할 때 단독주택은 아파트보다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다. 아파트는 단지 내부에 학교와 편의 시설, 공원 등이 존재하며 별도의 관리 사무소가 존재한다. 이들은 매일 주변을 관리하고 점검한다. 이러한 닫힌 공간에서 아이들은 부모가 낮에 없어도 비교적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다. 셋째, 자기와 비슷한 주변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게 된다. 대기업을 다니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환경에서 거주하면서 자신의 계층적 지위를 확인하는 공간이 된다.

 

저자는 이러한 대규모 아파트들이 등장하면서 사회 공간적 차별화를 고착시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관리와 유지 문제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비용을 증대시키고 나아가 도시 형태의 견고함을 취약하게 만들어 쇠락하거나 재개발이 불가피할 것이라 우려를 표하면서 책을 마친다.

 

저자의 애정어린(?) 우려가 담긴 책이 나온지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 여기저기에서 그 우려가 현실화된 것도 있지만, 도시 붕괴와 맞물릴지, 아파트 가격이 내려갈지는 의문이다. 보수 정부의 땜질식 부동산 정책은 아파트 개발과 재개발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듯이 보인다. 이제는 그녀가 말한 '하루살이 도시'라는 말, '주택이 유행 상품처럼 사고 팔린다'는 말이 고리타분할 정도이다. 이러한 상황과 사회 구조 속에서 어쩌면 우리는 현재 아파트 중심 구조에서 가족이 살아갈 터전이라는 전통적 주거 개념에서 가족이 잠시 쉬다 갈 곳이라는 개념으로 인식을 바꿔버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2003년에 나온 책이다 보니 2000년 이후 등장하게 된 브랜드 아파트들에 대한 다루지 않는다. 브랜드가 달리면 부동산 가격이 급격하게 뛰는 현상을 목격한 우리에게는 이 현상 역시 간과 할 수 없는 부분이다. 과거의 부동산 정책 가운데에는 단순히 평수나 주변 입지 환경과 사람들이 입주하려는 욕구와 맞물리는 것이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브랜드 아파트에 대한 이미지가 해당 아파트에 입주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나 계층 문제까지도 얽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 문제를 다룬 수많은 사회 과학 서적이 그러하듯이, 이 책 역시 개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여러 의문과 약간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의 눈으로 본 우리나라의 아파트 문화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분석한 것은 놀랍다. 그러나 국가가 부동산 중심의 경제 정책으로 경기를 부양하려고 하는 한, 주거지에 대한 욕구가 있고 단독 주택보다도 훨씬 좋은 편의 시설이 존재하는 한, 질좋은 일자리가 수도권 중심으로 편중 되어 있는 한, 그리고 신혼부부들의 주거에 대한 선택 권한의 비중이 아내에게 있는 한 아파트에 대한 열기가 사그라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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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골 The Goal - 당신의 목표는 무엇인가?
엘리 골드렛 지음, 강승덕.김일운.김효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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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학부 학생 필독서였고 생산 운영 관리 쪽이 아니더라도 직장인에게 필독서인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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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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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이라면 무엇이 있을까? 쉽게 생각할 때에는 인간이 가지는 기본 욕구에 대한 충족, 즉 의식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필요조건이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충분조건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이다.’이라고 말할 때에는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 이상으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특성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도대체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을 ‘깃털 없는 두발짐승’이라고 정의했고 이에 디오게네스는 깃털을 모조리 뽑은 닭을 데려와 응수했다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정치적(사회적,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이 유명하고 많이 쓰이지만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적이라는 말이 아닌, 정치적 동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동물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하나의 사회를 이루는 개체 중에서도 이성을 사용하며 권력을 이용할 줄 알고 또한 정치적이기까지 한 동물은 지구 상의 인간뿐이기에 이 정의는 23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다.


인간에 대해 그 물리적 형태를 보고 정의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인간 집단이 가진 보편적 특성을 잡아 정의하기도 쉽지 않다. 그 때문에 여러 철학자가 그토록 고심하여 인간이 어떤 동물인지 규정하려고 노력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인간을 무엇이라 확고하게 규정하기 어렵더라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가치들이 무엇인지는 법과 도덕, 이성과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다. 그러한 가치들은 인간의 존엄성, 보편적 인권과 연관된 것이며 이는 인간이기 때문에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이다.

인류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다양한 인종으로 분화해왔다. ‘넓고 평평한 손톱과 발톱을 지닌 깃털 없는 두발짐승’의 형태를 띠고 있음에도 환경적 영향 등으로 말미암아 흑인, 백인, 황인 등으로 구분되었고 혈족으로 구성된 부족집단이 거대해지면서 국가와 민족의 개념이 등장하였다. 특정 민족을 중심으로 결집된 국가는 이웃 민족 또는 국가와 부딪히는 일이 많았고 영토 분쟁 등으로 서로의 집단을 우위에 두고 상대를 지배하려고 하거나 상호 간에 적대감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민족과 국가로부터 비롯된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대체로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다. 이러한 민족주의가 강해질수록 자기 민족 또는 국가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고 그 이외의 집단을 무시하거나 복속시키려는 일도 많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복속의 과정 중에는 주종 관계로서 자신의 국가에 공물을 바치는 행위부터 전쟁을 통한 식민지화, 노예화하는 것까지 다양한 모습을 띠었다.
이러한 차별적인 조치 안에는 어떤 집단이나 민족이 가진 강인한 육체와 정신은 신이 자신들에게만 부여한 특권이라는 환상이 있었다. 또한, 신의 대리자인 왕이 부여한 권능으로 말미암아 민족 안에서 계급을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비과학적 신념 또는 신앙은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민족을 복속하고 노예로 삼는 것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과학은 전 지구의 모든 인간이 동일한 핏줄에서 나왔고 인종의 색이나 능력 등은 환경과 우연의 결과라는 사실을 점차 밝혀내었다. 이에 따라 서구 유럽사회에서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생각이 보편화 되고 있었다.
과거 유럽사회에서 평등하다는 생각은 단순히 외관상 보이는 인종의 범위 이전에 지배층과 피지배층(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사이에서도 적용되었다. 달리 말하면, 왕후 장상의 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똑같은 피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그와 관련된 과학적 증거들과 부르주아 계급을 중심으로 한 사상적 기반이 사회 저변에 등장하게 되면서 프랑스 대혁명 등의 결과를 이끌어 내었다.

평등을 위한 민주주의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갈 무렵, 1863년 미국에서는 노예 해방이 일어나고 보편적 인권은 한 단계 진일보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민족 안에서의 평등을 넘어서 인종 간에도 평등을 찾게 된 것이다.


인간의 조건을 이야기할 때에는 이처럼 평등·자유를 위한 저항의 과정에서 발생한 보편적 인권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적용되어야 할 가치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가 충분히 무르익었어야 할 20세기에 특정 민족의 혐오감으로 비롯된 학살 정책이 계획된다. 그것이 바로 홀로코스트, 반유대주의로부터 비롯된 나치의 유대 민족의 강제 이주 및 학살 정책이다.

1935년, 나치는 뉘른베르크에서 반유대주의를 공식화하는 법안을 발표한다. 이에 따라 유대인들은 독일을 비롯한 그들의 점령지와 동맹국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이러한 유대인 차별정책은 초기에는 강제 추방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9년 9월 1일,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차츰 범죄적 성향을 띠었다. 그들은 두 번째 해결책으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등을 비롯한 수용소로 유대인을 강제 이송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수가 수백만에 이르게 되자 그들 스스로 '최종 해결책'라 부르는 대학살을 감행한다.


프리모 레비의 책 『이것이 인간인가』는 나치가 절멸이라는 최종 해결책을 수행할 무렵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모조리 걷어내어야만 했었다.

그가 겪은 경험에 대해 감히 비슷하다고 말하기가 부끄럽지만, 그가 수용소 안에서 느꼈던 경험은 2년의 강제 군 생활을 경험한 우리에게 조금 더 가깝게 다가온다. 훈련소에 들어가던 첫날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빼앗겨야만 했다. 가지고 있던 팬티마저 빼앗기고 조교들의 화난 모습과 기합 소리에 놀라 허둥지둥했던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강압적 모습 이외에도 군 생활 동안 우리는 모욕적인 언사와 구타 가운데에서도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 훈련소와 자대 생활을 적응하기까지 우리는 사회에서 느꼈던 자유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지만, 누구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잘못된 것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우리는 아우슈비츠에서 언제 살아 돌아갈지 기약이 없던 프리모 레비가 아니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우리는 2년이라는 시간만 버티면 이곳을 빠져나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군대 안에서 우리는 수많은 부조리를 경험했고 때로는 그 부조리를 당연시하거나 이용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계급이 오르면 우리 역시 계급의 특권을 누리게 될 것을 기대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러한 부조리를 견디지 못하는 이병, 일병 후임을 보면 도리어 ‘군 생활 적응 못 한다, 고문관이다.’라는 말로 무시하거나 나아가 멸시하기조차 했다.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지 어렴풋하게 알았지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알아도 나의 특권을 위해서라면 모른 척하는 것이 더 좋았다. 그리고 그것을 군대라는 시스템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포장하기까지 했다.

 

레비는 그의 유작인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구조된 자들은 대부분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에서 특권을 가진 자였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같은 해프틀링(죄수)임에도 이발사, 구두 수선공, 가스실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유대인 특수 부대, 유대인 포로 관리자였던 카포, 화학자로서 라거의 화학 공업 업무를 도왔던 자기 자신이 바로 특권층이었다. (그는 그 안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직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인간임을 인식했다고 한다.) 그러한 특권은 그 안에서 재산이 되는 것들을 축적할 수 있도록 했다. 빵 한 덩이, 숟가락, 철사 하나를 더 가진 것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를 구분 짓는 기준이 되었다. 이러한 특권은 많은 경우 내가 아닌 내 옆의 특권을 가지지 못한 자가 가스실로 가게 되는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살아남으려면 옆 사람의 물건을 도둑질해야 했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외면하고 불의에 저항하지 말아야 했다. 그것이 아우슈비츠의 도덕률이었다. 물론 그가 수용소 안에서 한 이와 같은 행동들은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살아남은 자들은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의로운 죽음이 아닌 수치스러운 삶을 선택해야 했고 나 이외의 다른 이들을 외면해야 했던 사실은 구조된 자들에게는 평생의 얼룩으로 남았을 것이다. 바로 괴로움과 슬픔이라는 비관의 얼룩으로 말이다.

 

한홍구의 『지금 이 순간의 역사』라는 책을 몇 장 펼치다 보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도청을 지키다가 죽어간 자들을 보면서 외면해야 했던 광주 시민과 다른 대학생, 지식인들이 겪는 슬픔을 뜻한다. 그들은 살아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의롭게 죽은 이들을 보며 슬퍼했다. 이들이 죽은 이들을 대신해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들의 뜻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80년대 민주주의와 노동운동을 이끈 장본인이 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지켜보았던 살아있는 자들이 ‘민주주의의 투사’가 되었다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구조된 프리모 레비는 그 시대를 증언하는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대신해 할 수 있는 일은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치의 만행을 세상에 적극적으로 증언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일은 물론 딱지가 진 상처를 다시 뜯는 행위였을 것이 분명하다. 너무 괴로워 잊고 싶어 하는 일을 다시금 들춰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의 통찰이 담긴 책이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지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보다 수용소의 삶을 이야기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인간다움 또는 인권에 대한 생각을 던진다. 그것은 훌륭한 철학자의 대단한 철학이나 이론이 아니더라도 이야기가 가진 놀라운 힘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인간인가?'에 대한 답변을 생각토록 요구한다.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우리와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를 빼앗긴 인간이고 저항을 할 수 없는 인간이다.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인간,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 시키는 대로 복종만 해야 하는 인간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죽음을 외면하고 살아남은 것을 기뻐하는 인간, 수치심을 버린 인간, 생각을 하지 않는 인간이다.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모든 생물이라는 개체가 유전자의 생존 기계라고 하더라도 인간이기에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그들은 빼앗겼다. 그리고 그들이 구조되고 다시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그 시절을 괴로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누구나 익히 알고 있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 중 하나인 윤동주의 『서시』이다. 레비는 살아남았고 죽은 자들을 생각하며 부끄러움을 느꼈다. 윤동주가 괴로워한 것은 아마도 그 역시 레비와 같이 그 당시 살아남은 자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길을 외면하지 말고 끊임없이 걸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것이 살아있는 자의 부끄러움에 대해 속죄하는 길이었을 것이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적극적인 행위였을 테니까. 그가 가야 할 길은 끊임없이 시를 쓰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행위였고 레비는 글을 쓰고 역사를 증언하는 행위였다. 그것이 고통스럽고 설령 죽음을 향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위험을 무릅써야만 했고 자신의 상처를 들춰야만 했으리라.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벌써 70주년이 되었다. 세계 대전을 경험한 사람들의 대다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설령 살아있다고 해도 꽤 어린 나이에 경험하여 전쟁을 증언하기조차 어려운 이들일 것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은 더욱 많지 않을 것이다.
프리모 레비와 같은 이들이 존재함으로 우리는 아우슈비츠와 나치의 만행을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 그만큼 아우슈비츠와 나치 역시 역사로만 희미하게 기억될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의 엄청난 고통과 절망에 대한 공감은 점차 사라지고 단지 ‘그랬었구나!’라는 식의 판단만이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기억과 통찰이 사라져 갈 때쯤 다시 어두운 역사가 되풀이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망각은 시작되었다고 과언이 아닐 것이다. 캄보디아 킬링필드, 518 군부의 학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침공 등, 세계 대전 이후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학살이 그것을 방증한다. 차별, 혐오, 폭력, 민족주의가 카리스마를 가진 권력자의 의지에 반영된다면 또다시 아우슈비츠나 반유대주의와 같은 기형적인 특징을 가진 일들이 전 세계를 강타하지 말라는 법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도 역시 뼈아픈 고통을 겪었다. 일본의 폭력적 식민지 지배 및 학살, 종군 위안부, 731부대의 인간 생체 실험 등은 인간의 존엄성을 극도로 떨어뜨리려고 했던 일본의 만행이었다. 물론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일본인들에게는 직접적인 잘못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책임을 외면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자기 민족과 국가가 행한 악의 역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다룬 또 다른 작품 중에 아트 슈피겔만의 『쥐』라는 만화가 있다. 이 만화는 아버지가 겪은 수용소의 참상과 현재의 아버지의 삶을 번갈아가며 보여주고 있다. 만화에 등장하는 아버지도 프리모 레비와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지옥과도 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 역시 유대인이었기에 나치로부터 차별과 핍박을 받았다. 그랬던 아버지가 흑인을 혐오하고 멸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기 자신이 인종 차별의 희생자였음에도 누군가를 차별하는 이중적인 모습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바로 누구든 생각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대해 의문을 던지지 않으면 잘못된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마치 내가 ‘폭력’은 당연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군대 안에서의 폭력은 용인했던 것처럼 모순적인 모습들은 어느 때고 등장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스스로 ‘악’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바로 인간 고유의 조건인 ‘생각하기’로부터 비롯된다. 우리의 이성을 일깨우고 통찰을 하도록 이끄는 것이 바로 이 "생각"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하기를 멈출 때 우리는 단지 동물일 뿐이다.

 

‘생각하지 않는 인간’

 

나는 우리가 우리 눈 속의 들보를 보려면, 보다 깊이 있는 생각, 즉 ‘숙고’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때로는 고통을 참으며, 때로는 자신의 특권마저 포기하면서까지 숙고하는 이들을 ‘지식인’이라고 이름 부르고 싶다. 우리 사회에 그러한 지식인들이 많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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