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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지만, 누구나 그 싸움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中
인간은 자신을 파괴하는데 천재적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 이후 일상에 만연한 우울증이라는 빌어먹을 질환은 곰팡이마냥 우리를 좀먹는다. 누군가는 우울증을 의지의 문제라는 식으로 개인에 한정짓는다. 그러나 한병철이 지적하듯이 이 질환은 자본주의 시스템이 내놓은 위대한 발명품이다. 자본주의의 근원을 이루는 과잉생산이라는 분쇄기에 우리가 찢겨 나가고 있는 지경이다. 따라서 우울증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정신분석학의 현미경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시대착오적이다. 정신질환의 기저가 다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발견한 히스테릭 이른 바 신경증에 ‘억압’이라는 저류가 흐르고 있었다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우울증에는 긍정의 ‘과잉’이 내재되어있다. 이는 ‘부정’과 ‘긍정’으로 나뉘기도 하는데, 억압은 외부에서 들어온 타자의 ‘부정’으로서 기능하는 반면에 ‘과잉’은 자기착취를 합리화하며 종결없는 행진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긍정’이다. 여기서 억압이란 외부의 개입, 즉 타자가 들어섬을 뜻하는 말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권위적인 아버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현대의 아버지는 어떠한가? 아버지는 권위적이기보다 짐스러운 존재에 가깝다. 자식의 월급을 갉아먹고 빚을 물려주는, 없으니 못한 아버지로 말이다. 이제는 명절이 우리를 압박하지 않고 귀찮으며 부담스럽게 다가올 뿐이다. 다음 명절에는 직접 뵐게요~
그렇다면 타자 없는 현대사회에서 우울증은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가. 무한한 교환과 등치되는 무한한 ‘긍정’으로 우리를 착취한다.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동일하다는 점에 물개박수를 치고 싶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에게 이 공로를 바친다. 게다가 착취자는 자기가 피착취자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없다. 서로가 동일하기에 폐쇄적인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으며 고립되기 때문이다. 또한, 착취의 행위가 성과로 이어지면서 은폐되는데, 문제는 성과의 종결이 데리다의 초월적 기의마냥 무한히 유예되고 지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착취자는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자신을 자본주의 시스템에 내맡긴 채 전소되어 우울증 환자로 전락한다. 한병철이 후기 자본주의를 성과사회로 정의한 것은 탁월한 혜안이다. 행복의 척도가 만족도로 예속된 이 마당에 성과는 즉, 끝도 없는 쾌락이 아닌가. 쾌락의 극한에서 마주치는 것이 허무함이라는 사실을 감출 이유는 없어 보인다. 쾌락은 더 많은 쾌락을 그리하여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붕괴시킨다. 중단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중단은 곧 부정을 의미하며 타자가 이 역할을 떠맡는다. 그러나 타자는 부정이지 않은가. 나와 다른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가 타자인데, 우울증은 부정을 말소시키고 오직 긍정 만을 취한다. 내 안에 타자는 없는 셈이다. 단지 긍정성의 과잉으로 자기착취 만이 반복될 따름이다. 이렇듯 평면적인 구조의 자본주의는 타자를 말살한다. 모두가 피착취자이자 착취자로 환원되고,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무너지며(타자가 없는데 외부가 어디에 있는가?), 사유가 계산으로(이과생이 취업이 잘되는 이유가 여기 있었나?) 축소되고, 부정이 아닌 긍정으로 우리를 몰아세운다. 긍정적인 차이. 수치로써 재단되는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한다. 개성이니 다양성이니 고상한 척 떠들어대는 말들로 말이다. 하지만 부정없는 차이란 환상에 불과할 뿐이다. 서로 양립가능한 차이는 긍정이라는 동일자의 논리에 모두를 구속한다. 다지선다 안에서 선택하는 것이 무슨 자유이고 차이인가. 진정한 차이와 자유는 다지선다 바깥의 것을 결정할 의지이다. 다지선다의 부정이 진정한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므로 성과사회에서 타자란 없다. 타자가 자본주의 바깥으로 추방된 셈이다.
이 문제가 까다로운 점은 이전의 억압 사회로 돌아가자는 시대착오적 발상을 해결방안으로 제시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주 훌륭하신 몇몇 작가들은 무릇 여자란 남자의 품 안에 있을 때 가장 편하고 좋은 법이라는 정신나간 주장을 진지하게 관철한다. 굳이 가부장적 사회로 회귀할 까닭이 어디 있으며(여전히 가부장제의 잔재가 흘러 넘치고 있다), 가죽벨트로 아내를 패는 남편이 왜 있어야 하는가.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이 함정에 걸려들어서는 안 된다. 타자가 간절할 따름이지 억압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서 타자와의 윤리학을 요청한다. 나 자신을 낯설게 보기. 내 안에 말소됐다고 여긴 타자와 마주보기. 그런 타자와 세계에 나를 내맡길 사랑을 쌓아올리는 것을 말이다. 한병철이 한트케의 단상에서 힌트를 얻은 무위의 피로란 서로가 고립된 공간에서 벗어나 무차별적으로 타자를 껴안는 태도이다. 타자가 나를 믿듯이 나도 타자를 믿고 사랑의 윤리학을, 공동체를, 건설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