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8년 1월 25일>

*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by 은유 -

* 평점 : ★★★★반


책을 보다보면 나의 무지함이 보일 때가 있다.

어휘력, 독해력이 뛰어나질 못하여 읽는 내내 문장과 나의 머릿속에 벽 하나가 생길 때이다.

정확한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단어 검색을 열심히 하다가도 읽는 흐름이 자꾸 끊어지니 몰입도가 현저히 줄어든다.

이 책이 나에겐 그랬다. 만만하거나 가볍게 다가오지 않은 첫 인상을 주는 책이었다.

마음 속에서 거부감이 일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산문집이 아니었고, 다룬 하나하나의 내용 또한 쉬 가볍게 여길 내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읽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의 무지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책이 뒤로 갈수록 예뻐지기 시작했다.

내용이 쉬워진 건 절대 아니었지만, 저자의 세상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각과 사고, 평소의 그녀의 모습과는 왠지 다를 것 같은 센 언니 느낌의 글들..

그 느낌이 너무 부담스럽고, 거부감이 일었는데, 자꾸 읽다보니 적응이 된다.

적응이 되면서 글에서 묻어나는 저자의 삶이 다가온다.

그녀의 말처럼 쉬운 삶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녀의 삶도 결코 쉬운 삶은 아니었지 싶은 생각이 든다.


(P. 58) 옆 사람 힘든 게 왜 안 보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보이는 거다. 대대손손 소통 불능의 장애를 겪는 남성들. 그렇게 살아도 삶이 유지됐으므로 타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능력이 퇴화한 것이다. 무심함이 무뚝뚝함, 남자다움으로 미화된 데다가 학교나 학원에서 안 가르쳐주니까 관 뚜껑 닫힐 때까지 모른다. 모르고 편하게 살다가 죽는 남자들이 많으니까 그만큼 한평생 고생만 하다가 죽는 여자들도 많다.

(P.90) 자기중심적인 엄마라는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고작 일곱 살 아이 혼자 두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소주잔 기울이는 나를 스스로도 좀 심한 엄마로 규정하게 된다. 정말로 아이 키우는 일은 순간순간이 어려운 시험이다.


(P. 160) 엄마의 죽음으로 나는 한 차례 변이를 경험했다. 세상을 감각하는 신체가 달라졌다.

삶이라는 것, 그냥 살아감 정도였는데, 엄마를 통해 죽음을 가까이서 보고 나니까 '삶'이라는 추상명사가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 어떻게 이런 문장을 적어낼 생각이 들었을까.

멋드러진 문장을 구사하는 저자에게 다른 미사여구가 생각나질 않는다. 오직 멋지다는 말 밖에는..


(P. 118) 삶은 명사로 고정하는 게 아니라 동사로 구성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그렇게 때문에 일생을 오해받을지라도 순간의 진실을 추구하고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며 살아갈 때만 아주 미미하게 조금씩, 삶은 변한다.

살면서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들은 이름, 감각, 느낌, 음악, 이야기……. 나에게 존재를 위해 금가루 뿌리는 일이란 음악이 내미는 손을 잡는 것,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것, 느낌을 나누는 것. 그리 호사를 누리며 살기로 한다.

(P. 138) 연심의 변심 혹은 절심은 언제나 비약으로 다가오는 사건이지만 생물성이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이치이기도 하다. 나도 그랬다. 어디든 데려다주는 날개이자 비바람을 막아주던 존재가 불편하고 갑갑해지는 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엄마가 그랬고 연인이 그랬고 친구가 그랬고 동료가 그랬다. 어떤 음악이 어떤 책들이 그랬다. 세월이 그렇게 했다.

생의 시기마다 필요한 옷이 있고 어울리는 색과 취향이 있듯이 삶의 체형에 맞게 인연도 변해간다. 식물도감 동물도감 속 개체들처럼 사람 역시 멋진 자기 유지를 위해 색을 바꾼다. 인연의 옷을 갈아입는다.

(P. 168) 오래된 핸드폰처럼 일 하나 처리하면 어느새 배터리가 한 칸만 남는다. 아무래도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야 할 때인가보다. 게으름을 지혜의 알리바이로 삼지는 말되 게으름이 아닌 느긋함으로, 조급함이 아닌 경쾌함으로, 주변의 것들과 아우러지는 행복한 삶의 속도를 만들어나가야겠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올 때 볼 수 있도록.

(P.237) 원래 돈이 속삭인다. 나를 줄 테니 너의 모든 것을 달라고. 그래서 특히 젊은 나이에 첫 직장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것은 위험하다. 마라톤에서 페이스 조절에 실패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돈의 쓰임이 곧 삶의 자세이다. 젊을 때부터 나를 던져 돈과 삶을 '거래'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돈의 흐름에 따라 허겁지겁 쫓아가게 된다. 내 정신으로 살아가기가 점점 힘들다.

(P. 267) 어떤 직업은 노동의 결과물이 보존되고 과정의 수고로움이 기록된다. 존중과 동경을 받는다. 어떤 직업은 아니다. 노동의 성과가 사라지고 고충이 음소거된다. 폄하와 무시를 당한다. 사회적 무지와 몰이해. 그것이 직업의 귀천을 만들고 구조적 불평등을 낳는 건 아닐까. 대부분의 직업이 몸이 축난다는 점에서 단순직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전문직이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는 첫 번째 단계에 읽는 책과 독후감을 쓰기 위해 내 마음을 동하게 한 문장들을 찾아가며 도중도중 읽어내는 두 번째 단계에 읽는 책의 느낌이 다르다.

모든 책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2번의 책읽기가 끝난 책들에게는 마음이 더 간다.

내 것이라는 소유가 자리잡고, 친밀함이 생겨나고, 토닥여주고 싶고, 더욱 살거워진다.

첫 번째 읽을 때는 지인과 수다 떨며 만나는 시간같고, 두 번째 읽을 때는 그 지인과 목욕하러 가서 서로의 맨살을 마주 대하는 시간같다고 할까..

그래서, 책에 주는 나의 평점은 처음 매기려했던 평점보다 후해진다. 단순히 별 하나, 별 둘로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 생겨버린다.

그렇게 두 번 읽는 작업을 할 때마다 '내 것'이 되었다는 만족감이 가득해진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이 아이..

아직도 완전한 내 것이 안 된 느낌이 가득하다.

내가 무언가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어 옆에 놓여있는 책을 곁눈질한다.

가감없이 내뱉는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이 핑크색 표지보다 좀 더 강한 색으로 저자의 마음을 대변했어도 좋았다.. 싶기도 하고,

첫 인상이 별로라고 내 마음 한 구석에서 정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책을 덮으며 홀가분한 마음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서, 내 것이라는 낙인을 찍어넣고, 옆에 두고 매일 쳐다볼 수 있으면..하는 미친 소유욕을 불태우게 한다.


자신의 일생 그리고, 여자들의 일생을 저자는 열변을 토하며 말한다.

일과 연애, 결혼, 역할에 쌓인 거 많아 울컥하는 글들.. 글들을 보며 깨어있는 여성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삶에 내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고 속으로 삭히는 이들을 대신하여 저자는 과감히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지른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엄마로, 직장맘으로 살기 힘들다고....

대한민국에서 엄마로 살아가고 이들에게, 더불어 직장맘이라는 호칭을 달고 있는 이들에게, 슈퍼우먼을 꿈꾸는 혹은 되길 원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사견을 덧붙이자면, 이 책을 두 번이상 읽기를 권하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