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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 허블 / 2021년 6월
평점 :
<단어가 내려온다> 오정연 지음, 허블 출판사
원래 SF소설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단어가 내려온다> 라는 이 제목을 보면서 내용이 너무 궁금해졌다. 도대체 이 제목은 무슨 뜻일까, 단어가 비처럼 내리는 지구? 아니면 그 어떤 무언가? 그렇게 이 책을 만나게 되었고, 여전히 나는 책의 앞 뒤 표지부터 열심히 읽었다. 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이 쓴 추천사가 적혀있었다.
“책을 읽으며 무언가가 무척 그리워졌다. 아주 먼 어딘가에 놔두고 온 감정, 기억, 잔상들이 하나둘 스쳐 지나간다. 이제는 놓쳐버린 모든 현재, 지나가 버린 아름다운 찰나들이 인사를 한다.”
“먼 미래에도 우리는 결국 지금처럼 느끼고 다투고 사랑하고 있겠구나.”
책을 읽기 전에는 무슨 뜻일지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책을 읽고 나니 내가 느낀 감정이 이 감정이었구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했던 추천글.
책은 <마지막 로그>, <단어가 내려온다>, <분향>, <미지의 우주>, <행성사파리>, <당신이 좋아할 만한 영원>, <일식>의 총 7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깊었던 건 <마지막 로그>. 안락사가 가능한 2078년. 스스로 생을 마치고자 안락사 센터인 ‘실버라이닝’에 입소한 주인공과 담당 인공지능 로봇인 ‘조이’ 의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는 이야기이다. D-6부터 D-day까지의 이야기를 읽으며, 어쩌면 주인공이 아직 죽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까, 조이가 주인공을 살리진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로봇 ‘조이’의 프로그래밍도 의뢰인의 감정을 읽어 안락사를 취소할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었으나, 조이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조이는 ‘자유의지’라는 오류가 생긴 로봇이었고, 맑은 마음으로 쌓아 올린 결심을 충동적으로 되돌린 인간들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보았기 때문이다.
“A17-13은 이후 내가 연기 권유 메시지를 무시한 첫 번째 인간이다. 고스란히 그 자신으로 남고 싶다는 A17-13의 의지는 살고 싶다는 본능만큼 강렬했다. 인간, 아니 생명의 무한한 능력은 익히 알고 있으므로 A17-13 역시 주어진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A17-13은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것이었다. 그는, 그리고 나는 그러지 않기를 원했다.” (p.50~51)
저 문장을 읽으면서 뭐라 표현해야 할지 애매하던 내 감정을 작가의 말을 읽은 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아하게 삼을 종료할 선택권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줄 알았는데, 몇 번에 거친 개작을 통해 나는 사실 온전한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말하고 싶었음을 깨달았다.” (p. 256)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권리. 지금의 나 또한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
그리고 마지막 결말까지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라 더 기억에 남았다. 보통 내가 본 SF영화들은 자유의지를 갖게 된 로봇들의 도망이나 삶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이 소설의 로봇은 사전에 지정된 와이파이를 통해야만 작동하기 때문에 실버라이닝의 경계를 벗어난 뒤 3시간 후 끝나고 만다. 꽤나 충격적이었던 내용.
아, 그리고 표제작인 <단어가 내려온다>의 뜻은 단어가 비처럼 내려온다는 뜻은 아니었다! 국어학 SF라니 정말 경험해 본 적도 없는 내용. 생각보다 어렵고 생각보다 재밌었다.